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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들어가며 Ⅰ. 진경산수화의 정의와 제작 배경 1. 진경산수화의 정의: 진眞·진경眞境·진경眞景 2. 진경산수화의 제작 배경에 대한 논의 1) 현실주의 2) 새로운 시각 인식과 시각적 사실성의 추구 3) 천기론의 영향 4) 전통 실경산수화의 영향 Ⅱ. 진경산수화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진경산수화에 대한 선행 연구 2. 진경문화·진경시대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3. 나가면서 Ⅲ.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제재와 관점 1. 진경산수화의 제재 1) 명승명소도 2) 야외아회도 3) 유거·정사·별서도 4) 구곡도 5) 공적 실경도 6) 기행사경도 2. 진경산수화의 시점과 투시법 1) 다초점투시 2) 조망 3) 풍수 4) 원근투시 Ⅳ. 진경산수화의 유형과 변천 1. 천기론적 진경산수화: 답경모진과 천기유동 1) 천기론과 진경산수화 2) 겸재 정선의 천기론적 진경산수화 2. 사의적 진경산수화: 현실 관조와 산수 취미 1) 조선 후기의 선비그림, 유화의 발전과 사의성의 추구 ① 조선 후기의 선비그림, 유화의 발전 ② 사의성의 추구와 사의적 진경산수화 2) 사의적 진경산수화에 미친 중국 판화의 영향 3) 사의적 진경산수화의 성격과 특징 그리고 화풍 ① 선비화가 심사정·강세황·허필 외 ② 선비화가 김윤겸·이인상·윤제홍 외 ③ 선비화가 정수영·이방운·이의성 외 4) 나가면서 3. 사실적 진경산수화: 새로운 시각 인식과 시각적 사실성의 추구 1) 조선 후기 서학의 도입 ① 과학기술 문물에 대한 탐구와 실용 ② 현실 개혁의 대안 ③ 과학적 지식의 교양화 2) 시각적 사실성의 추구 3) 서양 투시도법의 성격 및 기법 ① 개념 및 표현 기법 ② 중국 회화에 반영된 서양 투시도법 4) 서양 투시도법의 수용과 사실적 진경산수화 ① 산술적 이해 ② 회화적 실험과 수용 ③ 평행사선투시도법의 새로운 정립 5) 나가면서 Ⅴ. 겸재 정선과 진경산수화 1. 발견된 대가: 겸재 정선에 대한 평가의 역사 2. 사의와 진경의 경계를 넘어서: 기려도를 중심으로 3. 겸재 정선과 소론계 인사들의 교류와 후원 1) 18세기 전반 문예계와 소론계 인사들의 활동 양상 ① 겸재 정선과 소론계 인사들의 교류 ② 18세기 전반 소론의 사상과 학풍 그리고 문예 2) 소론계 인사의 정선에 대한 후원과 평가 3) 나가면서 4.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서양화법 1) 정선의 천문학겸교수직과 서학의 경험 2) 정선이 구사한 서양화법 ① 지면과 수면의 표현 ② 대기의 표현 ③ 서양식 투시도법의 구사 ④ 전통적인 기법과 서양화법의 절충 3) 나가면서 5.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풍과 고지도 1) 겸재 정선 화풍의 구성 요소: 필묵법·준법·수지법·태점을 중심으로 2) 18세기 후반 고지도에 나타난 정선 화풍의 영향과 변용 ① 정선 화풍의 수용과 변용: 18세기 중엽 ② 정선 화풍의 변용과 남종화풍으로의 전환: 18세기 말엽 3) 19세기 고지도 화풍의 변화와 정선 화풍의 잔영 ① 보수적 화풍의 고지도: 19세기 전반 ② 새로운 남종화풍으로의 전환: 19세기 전반 ③ 정선 화풍의 잔영: 19세기 후반 4) 나가면서 Ⅵ. 진경산수화의 다양성 1. 조선 후기 관료 문화와 진경산수화: 소론계 관료를 중심으로 1) 17세기 남구만계 십경도류 회화 2) 18세기 소론계 관료의 환력과 진경산수화 3) 나가면서 2. 표암 강세황의 사실적 진경산수화: 일상과 평범, 상경의 추구 1) 강세황의 기행사경도 2) 일상과 평범, 상경의 추구 3) 새로운 시각 인식과 서양화법의 수용 4) 공인 의식과 환유의 기록 5) 나가면서 3. 남한강 실경산수화 1) 명승유연과 기행사경 2) 은둔과 풍류 3) 비운과 충절의 역사 4) 나가면서 4. 현실의 풍경, 마음의 풍경: 조선 후반기의 전별도 1) 헤어짐의 미학과 전별도의 제작 2) 조선 후기 이전의 전별도 3)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와 전별도 4) 조선 말기 사의적인 전별도 주 참고문헌 도판 목록 찾아보기 |
朴銀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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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려고 하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조선 후기, 18세기에 제작, 유통된 실경산수화이다. 그 이전부터 실경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18세기 즈음부터는 현존하는 경관을 그리면서 진경(眞境) 또는 진경(眞景)으로 부르는 일들이 잦아졌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존하는 산수경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해석이 반영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18세기에 그려진 실경산수화는 이전과 이후의 실경산수화와 구분하여 진경산수화라고 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에는 전국 각지의 명승명소들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자주 그려진 곳은 한양과 주변 지역의 경관이다. 이는 18세기 초엽경 진경산수화가 한양에 세거하던 경화사족들의 주문과 후원으로 시작되었고, 이후에는 궁중뿐 아니라 중인, 서민들까지도 진경산수화를 애호함으로써 가장 많은 생산과 유통이 일어났던 곳이 한양이기 때문이다. 진경산수화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18세기에 일어난 현실에 대한 자각과 관심이 이전까지 주류를 차지했던 관념적, 명분론적 사고를 대치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며 예술이라는 데 있다. 진경문화 · 진경시대론의 본질은 정체성론의 극복을 위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역할과 조선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 연구의 출발점이 된 것이 겸재 정선이며 그의 진경산수화였다. 최완수가 시작한 정선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이후 인문학계의 화두가 되었던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명분과 이념으로 점철되고 있다. 정선의 [금강전도]는 금강내산(金剛內山)의 전경을 담은 작품이다. 정선은 유명한 만이천봉과 둥근 토산(土山)들을 화면에 꽉 차게 포치하여 강렬한 인상을 느끼게 하였다. 사실 금강내산의 전경을 이처럼 하나의 화면에 담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정선은 금강내산의 경관 중에서 당시 여행자들에게 중요하게 여겨졌던 주요한 경관을 부각시켜 그렸다. 즉 내산 초입에 위치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만폭동과 금강대, 대소(大小) 향로봉 등을 실제보다 더 눈에 잘 띄도록 표현하였다. 현재(玄齋) 심사정은 18세기 중엽경 활동하면서 한국적 남종화풍을 정립한 선비화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 후기의 그림을 말할 때 흔히 겸현(謙玄)을 쌍벽(雙璧)으로 손꼽기도 하는데, 이 중 겸은 겸재 정선을, 현은 현재 심사정을 가리키는 만큼 심사정은 18세기 회화의 대표적인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두 화가를 모두 잘 알고 있던 강세황은 심사정에 대하여 “호방하고 걸출하며 원기가 넘치는 것[豪邁淋?]은 겸재에게 약간 떨어지나, 굳건하고 건장하며 우아하여 속기를 벗어난 것[徑健雅逸]은 오히려 앞지른다”고 평하였는데, 이는 각자의 특기와 장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정수영이 1806년 그린 [천일대망금강도]는 어느 날 도성 동편 낙산(駱山) 즈음에 살던 지인을 방문하였을 때 금강산 여행을 추억하던 지인의 요청으로 기억에 의존하여 초본도 없이 즉흥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정수영은 1799년에 제작한 《해산첩》에도 같은 화제를 그린 적이 있으므로 그러한 경험과 근거를 토대로 그렸을 것이지만, 역시 기억에 의존한다는 것은 사실보다는 사의를 선택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작품에는 화면 아래쪽에 천일대(天一臺)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보이는 금강산 만이천봉과 비로봉, 소향로봉, 대향로봉 등이 부각되어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서양화의 기법을 그림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엽경부터였다. 그러나 화제에 따라 시차는 있었다. 사실적인 재현을 중시한 초상화나 영모화에서는 비교적 일찍이 적용되었으나, 산수경관을 재현하는 진경산수화에서는 정선이 18세기 초엽경부터 서양화법을 활용하기 시작하였고, 강세황이 18세기 중엽경 서양화법에 대한 적극적인 시도를 이어갔다. 그러나 서양화법이 화단에서 크게 유행한 것은 18세기 말엽 정조 연간 즈음이다. 이러한 시차는 결국 각 화목의 고유한 성격과 기능, 그에 따른 표현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서양화법의 영향을 수용한 ‘사실적’ 진경산수화는 18세기 중엽 이후 유행하였는데, 새로운 개념과 기법의 서양화풍과 전통적인 산수화풍 및 남종화법을 융합시킨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적 진경산수화의 등장과 정립에는 시각에 대한 심화된 인식과 평가, 이를 적용한 회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지,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서양 투시도법의 영향이 컸다. 김홍도는 화성의 여러 경관을 진경산수화로 재현하였는데, 현존하는 [서성우렵도]에서도 서양화법을 활용한 것이 확인된다. 김홍도는 서양화법의 주요한 원리를 화면 구성과 공간 표현에 적용하였다. 이 작품에서 화성(지금의 수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정조가 군사훈련을 지휘하여 왕권을 상징하는 장소인 서장대가 화면의 아래쪽에 크고 또렷하게 나타나고, 그 위쪽 화면에 화성의 시가지와 먼 산들이 펼쳐져 있다. 가을 무렵 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이 그림의 주제이지만 아주 조그맣게 등장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 화성 시가와 자연 경관은 먼 곳에 위치하여 거리가 멀어지면서 희미해지는 대기원근법으로 재현되었기에 구체적인 모습이 없고, 잘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일정한 시점과 거리에 따른 원근감을 강조하는 서양 투시도법과 관련이 있다. 정선은 진경산수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평생 수많은 사의산수화와 고사도, 시의도 등을 제작하였다. 진경산수화를 그리면서 현실 속 경물을 관찰하고, 재현하였던 반면에 사시산수도와 소상팔경도 등을 비롯한 사의산수화와 관폭도 · 기려도(騎驢圖) · 심매도(尋梅圖) 등 고사를 토대로 한 고사도,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토대로 한 귀거래도 등의 시의도를 통해서 정선은 사의와 진경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정선은 관념적, 사의적 주제를 다루면서 고사와 시에 나타나는 제재를 현실 속의 경관으로 치환시키는 시도를 하였다. 정선은 고사와 시의(詩意) 등에 담긴 제재와 소재를 현실적인 것으로 변화시켜 재현하면서 이상과 현실의 조화가 구현된 진경산수화로 표현하곤 하였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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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의 풍광을 담다
조선 후기 회화사의 정수, 진경산수화의 진면목 미술사학자 박은순의 평생 연구를 집대성한 책 진경산수화란 무엇인가 미술사에서 실경을 그린 그림을 가리켜 실경산수화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후 조선 시대까지 이러한 실경산수화가 꾸준히 제작되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18세기에 그려진 실경산수화는 일반적인 통칭을 사용하지 않고 특별히 진경산수화라고 불리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가 이처럼 이전의 실경산수화와 구분되고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그것이 한 시대의 정신과 예술을 대변하는 회화로서 크게 유행하였을 뿐 아니라 독창적이고 수준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냄으로써 한국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진경산수화의 등장은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의 사상적, 문화적인 전환과 관련이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성리학적인 명분과 이념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가치관이 퇴조하고 현실주의적인 사상과 가치관이 대두하였다. 전반적으로 이념보다는 현실, 명분보다는 실제, 관념보다는 경험, 고(古)보다는 금(今), 규범이나 법보다는 개성과 자아를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문학과 회화에서는 관념적, 고답적, 은유적 주제보다 현실적, 사실적, 직설적인 주제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산수화에서도 성리학의 이념적 · 이상적 가치를 은유적으로 담아낸 관념산수화보다 실제로 존재하고, 경험하고,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인 실경, 곧 진경을 그리는 진경산수화가 유행하게 된다. 궁중과 사대부, 중인과 서민 등 다양한 계층의 주문과 후원을 받으면서 진경산수화는 화단의 변화를 촉진하였고 조선 후기 회화 예술을 대표하게 되었다. 239점의 도판과 함께 보는 조선 후기 회화사 ? 진경산수화의 주요 작가와 대표작들 대거 수록 윤두서, 〈자화상〉 외 정선, 〈금강전도〉 · 〈인왕제색도〉 · 《풍악도첩》 외 강세황, 〈송도전경도〉 · 〈영통동구도〉 외 김윤겸, 〈백악산도〉 외 정수영, 〈백사회야유도〉 외 이인상, 〈구룡연도〉 외 심사정, 〈만폭동도〉 외 허필, 〈죽서루도〉 외 김하종, 〈헐성루망전면전경도〉 외 강희언, 〈북궐조무도〉 외 김홍도, 〈총석정도〉 외 김득신 외, 〈환어행렬도〉 외 윤제흥, 〈화적연도〉 외 이방운, 〈금병산도〉 외 김응환, 〈금강전도〉 외 진경산수화는 무엇을 그렸을까 ? 진경산수화의 제재 명승명소도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한강변의 경치는 조선 초부터 각종 행사와 모임의 배경이 됨으로써 많이 재현되었고,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에서도 크게 애호되었다. 정선은 다양한 계기로 한양의 여러 승경을 재현하였다. 〈장안연우도〉(長安煙雨圖), 〈서빙고망도성도〉(西氷庫望都城圖), 〈서교전의도〉(西郊餞儀圖) 등은 한양의 전경을 웅장한 구도로 재현한 작품들이다. 〈인왕제색도〉, 《장동팔 경첩》(壯洞八景帖), 《양천팔경도》 등은 특정 경관을 부각시킨 작품들이다. 정선 이후에도 김윤겸, 강희언, 김석신, 유숙 등의 여러 작가들이 한양의 승경을 지속적으로 재현하였다. 야외아회도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와 선비, 여항인들의 다양한 사적인 모임이 유명한 경관이나 이름난 정원 등에서 이루어지곤 하였고, 그 모임과 장면을 재현한 야외아회도가 유행하였다. 1739년 소론계 권력가 이춘제는 소론계 사대부들과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고 인왕산의 옥류동을 함께 등산한 뒤 이를 기념하고 기록할 것을 정선에게 요청하였다. 정선은 옥류동 산등성이를 넘어 청풍계로 가는 일행을 작게 그리고 주변의 경관을 크게 부각시켜 전통적인 계회도와는 다른, 새로운 야외아회도, 진경산수화의 등장을 보여주었다. 이후 많은 선비화가와 직업 화가들이 야외아회도를 제작하였다. 유거(幽居)·정사(精舍)·별서도(別墅圖) 유거도와 정사도는 선비가 일상적으로 거주하거나 학문을 전수하는 공간을 그린 것이고, 별서도는 교외나 전원의 정원 및 별장을 그린 것이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에서도 유거와 정사, 서원을 그리는 관습이 지속되었다. 윤두서의 〈백포유거도〉(白浦幽居圖)와 정선의 〈도산서원도〉가 조선 중기까지 성행한 풍수적인 구성과 소재를 보여준다면, 정선와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와 이만부의 《누항도》(陋巷圖) 화첩은 남종화풍에 기초한 조선 후기 정사도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구곡도(九曲圖) 주자는 무이구곡을 경영하고 무이도가를 지으며 무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이를 본떠 조선 중기 이후 선비들 사이에 구곡을 경영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17세기 후반 김수증은 강원도 화천의 화악산에 곡운구곡을 경영하고, 조세걸(曺世傑)을 초빙하여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는데, 이 작품은 정선풍의 진경산수화가 정립되기 직전 실경산수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18세기 이후 《화양구곡도》(華陽九曲圖), 《황강구곡도》(黃江九曲圖), 《무흘구곡도》(武屹九曲圖) 등이 지속적으로 제작되며 구곡도는 진경산수화의 한 제재로 이어졌다. 공적 실경도 국가나 관아에서 주관한 공적 행사 장면이나 절차를 기록하고, 중요한 사건을 전수하기 위한 그림이다. 조선 후기에는 궁중 행사와 관련된 진경산수화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김득신, 이인문 등 당대를 대표하는 화원들이 함께 그린 《화성원행도병》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기행사경도 이름 높은 명승지나 유적지를 여행한 뒤 그 기행의 성과를 그림으로 재현한 작품을 가리키며,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성격과 특징을 대표하는 제재이다. 18세기 전반 정선과 그 주변 사대부 선비 및 여항인들이 추구한 천기론의 영향으로 기행과 사경을 결합한 진경산수화가 유행하였다. 정선의 진경산수화에서 한양과 함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장소는 금강산과 그 주변의 관동팔경이다. 금강산과 관동 지역으로의 여행을 표현한 그림은 해악전신첩, 해산도, 풍악권 등으로 불리었다. 전신첩이란 초상화를 가리키는 전신(傳神)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풀어서 말하면 ‘바다와 산의 초상’이라는 의미이다. 정선의 〈금강전도〉·《해악전신첩》·《풍악도첩》·《관동명승도》, 김윤겸의 《봉 래도권》, 정수영의 《해산첩》, 김홍도의 《해산도병》, 김하종의 《해산도첩》·《풍악권》 등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다. 금강산과 그 주변의 관동팔경이 가장 선호된 승경지였지만, 충청도의 사군(四郡)산수, 평안도의 관서팔경, 함경도의 관북팔경, 개성과 평양 등 역대 도읍지의 명소, 영남과 호남의 지역 등도 그려졌다.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김윤겸의 《영남기행첩》,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권》, 윤제홍의 《학산묵희첩》 등의 많은 작품이 전한다. 잔경산수화의 세 가지 유형 천기론적 진경산수화 진경산수화의 핵심은 진(眞)과 진경(眞景)의 추구에 있다. 이를 표출하기 위한 예술적 방법론으로 제기된 것이 천기론(天機論)이다. 정선은 그림을 평하면서 “이 그림은 참으로 잘 그렸다. 다만 천취(天趣)가 부족할 뿐이다. … 마음 내키는 대로 붓을 맡기면 자연히 경치가 모두 천취가 되어 인위(人爲)를 닮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활필(活筆)인 것이다.”라고 하며 천취를 강조하였다. 선비화가 조영석은 “선비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 그 천기를 사랑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회화 창작의 동기와 방법론으로서 천기를 강조하였다. 서화고동의 수장가와 감평가로서 유명하고 정선과도 막역하게 교류했던 이하곤도 그림에서 의고적인 경향을 비판하고 개성과 천기를 중시하는 회화관을 주창하였다. 18세기 전반 무렵 정선은 천기론적 문예관을 주창하고 실천한 그룹의 일원으로서 조선의 실재하는 경관을 독특한 화법으로 재현한 진경산수화를 형성하고 정립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천기론에서는 기위(奇偉)한 경치와 사람이 합일하는 천기유동(天機流動)을 경험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현장을 찾아가 경물을 직접 대한 뒤 묘사할 것, 곧 즉물사경(卽物寫景)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위해 우경모진(遇景摸眞, 경치를 만나 진을 모사하는 것)과 천답실경(踐踏實景, 실경을 직접 답사함)이 중시되었다. 18세기 이후 낙론계와 경화사족 선비들 사이에 금강산 여행이 유행했는데, 이는 금강산과 같은 기준(奇寯)한 진경을 답사하여 자신의 성정을 고양시키고, 그러한 진경을 천기를 잘 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행의 견문과 감흥을 그림으로 기록한 기행사경도는 진경산수화의 주요한 분야가 되었다. 천기론적 진경산수화는 정선의 그림에서 보듯 현장의 경물에 대한 화가의 반응을 강렬하고 빠르게 전달하기 위한 표현으로서 역강한 구도와 빽빽한 공간, 빠르고 강한 필치와 물기가 많은 묵법을 회화적인 특징으로 한다. 사의적(寫意的) 진경산수화 사의적 진경산수화란 진경을 그릴 때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와 재현보다 화가의 주관적 해석과 감흥을 중시하고 사의성을 강조한 진경산수화를 가리킨다. 심사정, 김윤겸, 이인상, 이윤영, 강세황, 정수영 등 18세기 중엽경부터 활약한 일군의 선비화가들은 진경산수화를 그리는 데 동참하였지만, 정선의 진경산수화와는 구별되는 화풍을 구사하면서 진경산수화의 외연을 확장하였다. 이들도 여행을 통해 경물을 관찰하여 재현하고 현장의 체험과 흥취를 담아내는 사생과 묘사를 중시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시각적 사실성보다는 주관적인 서정과 개성적인 해석에 중점을 두면서 남종화법을 토대로 한 화풍을 구사하였다. 회화적 표현의 측면에서 보자면 남종화에서 유래된 부드러운 필법과 담묵 위주의 절제된 묵법, 우미한 담채의 구사, 아치(雅致)와 사의성의 중시 등이 그 특징이다. 조선 후기 화단의 흐름 가운데 주목되는 경향의 하나는 선비 화가들의 등장과 활약이다. 18세기의 선비 화가들은 직업 화가들에 못지않은 기량을 표출하였으며 직업 화가와는 구별되는 선비 그림, 유화(儒畵)의 영역을 구축하였다. 유화는 형사(形似)나 기교를 중시한 직업 화가들의 화풍과는 다른, 선비로서의 가치와 취향을 담은 화풍으로 표현되어야 했고, 그것은 곧 사의적인 화풍의 추구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선비 화가들의 주도로 조선 후기 화단에 남종화풍이 도입되었으며 유화의 이상을 실천하는 방편으로 선호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세기 중엽 이후 진경산수화의 분야도 천기론적 진경산수화에서 사의적인 진경산수화로 변화해 나갔다. 사실적 진경산수화 17세기 이후 중국을 통해 유입된 서양 문물은 조선 사회에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주면서 지식인들 사이에 서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서학의 영향은 마침내 회화에도 미쳐 서양 투시도법을 수용한 표현이 등장하게 되었다. 18세기 초엽 무렵부터 정선은 진경산수화에 서양화법을 선구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중엽 강세황은 서양화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사실적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송도기행첩을 보면 일점투시법, 원근법, 질량감의 표현, 명암에 대한 관심 등 서양화법의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고 있다. 노론계 선비화가 김윤겸도 〈백악산도〉와 〈청파도〉에서 보듯 서양화법에 유래된 기법을 부분적으로 활용한 진경산수화를 제작하였다. 18세기 말엽 김홍도에 의하여 사실적인 진경산수화는 세련된 경지로 발전하였다. 그의 〈명경대도〉와 〈총석정도〉에서 18세기 말엽경 형성된 사실적 진경산수화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