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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병남 노거사 약력 정토문답 제1조 제2조 제3조 (중략) 제726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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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조
문: 저는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었는데 : 처의 방에서 잠을 자는 것은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염불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잠을 잘 때 꿈속에서는 염불이 가능한데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 제가 한 권의 권세문(勸世文)을 보았는데, 행(行)ㆍ좌(坐)ㆍ입(立)ㆍ와(臥)ㆍ한(閑)ㆍ망(忙)의 염불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처가 있고 없음과 구별이 있습니까? (方觀音) 답: 침실과 더러운 곳에서는 입으로 하는 염불(口念)을 할 수 없으나, 오로지 마음으로 하는 염불(心念)은 무방하다. 꿈속의 염불은 곧 훈습이 날로 깊어지는 것에 대한 표현이니 바로 좋은 경계로 결코 죄과가 없다. 재가거사는 대다수가 처가 있다. 부부가 같이 수행하고 서로 책려하는데 어찌 아니되겠는가! --- p.13 ※ 제23조 문: 염불의 방법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두 가지를 겸하여 수행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면 지명(持名)과 관상(觀想)을 병행할 수 있습니까? (智恒) 답: 관상(觀想)과 지명(持名)은 고인께서 겸수한 분이 매우 많지만, 연지대사(蓮池大師) 이후에는 점차 한 가지 방법만 사용하였다. 그것이 일심(一心)에 이르는데 쉽기 때문이다. --- p.15 ※ 제36조 문: 소설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하거나 연극을 듣고 하는 것은, 모두 망아(忘我)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으니, 일심불란(一心不亂)입니다. 이것이 일심불란과 같은데, 염불의 일심불란과 어떤 분별이 있습니까? (智煌) 답: 소설, 영화, 희극 등은 음란함을 가르치고, 도둑질,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을 가르칠 뿐이어서, 그것을 대하면 곧 희로애락이 생기니, 이와 같이 마음이 움직이고 정신이 옮겨지면, 어찌 일심불란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일심불란이라는 것은 만 가지 인연을 내려놓고, 팔풍(八風)에 동요하지 않으며, 밖으로 모든 경계를 떠나고, 안으로는 고요한 물(止水)과 같은 것이다. --- p.16 ※ 제49조 문: 때때로 꿈속에서 경을 읊거나 염불을 하여, 한 자 한 구절이 마음에 분명하고, 털끝만큼의 잡념도 없어, 그 경지가 고요하여,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 어떤 때는 꿈속에서 염불하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심지어 계속 염을 지속하는 것을 희망하여, 깨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 꿈의 경지는 좋은 것입니까? (章普明) 답: 꿈속에서 만약 항상 염불할 수 있어 다른 경계가 나타나지 않는 것, 이것은 점차 전일(專一)해질 수 있는 모습(象)이다. 꿈꿀 때 하는 염불은 확실히 좋고, 만약 다시 깨어 있을 때도 염하여 중단되지 않으면 더욱 좋다. --- p.26 ※ 제107조 문: 실념(失念)은 공부에 힘을 씀에 있어 장차 타성일편(打成一片)일 때에, 내려놓으면(放下) 실념이 되는 것입니까? (許?) 답: 무념(無念)과 실념(失念)은 같지 않다. 이미 전조(前條)에서 분석을 하였다. 무념은 삼매경지이고, 실념은 곧 혼산(昏散) 등의 일로 양자는 천양지차이다. 본조(本條)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바가 어떤 공부에 힘쓴다는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예를 들면 염불을 말할 수 있는데, 즉 「타성일편(打成一片)」은 정념(淨念)이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는 것이다. 순숙(純熟) 시에는 염이 곧 부처이고(念?是佛), 부처가 곧 염인데(佛?是念), 협잡이 없어 이를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이름하고 바로 적조(寂照)가 쌍융(雙融)한다. 적(寂)은 만연(萬緣)이 모두 쉬는 것이고, 조(照)는 불호(佛號)가 분명한 것이며, 내려놓음은 진연(塵緣)을 내려놓는 것으로, 불호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공부에 힘쓴다는 것은 정념(正念)을 제기하는 것이고 실념(失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 p.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