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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부 초원에서 길 다싱안링 바람의 땅 조드 가축 이야기 개 말 말조심 하세요 늑대를 찾아서 늑대, 두 번째 이야기 가장 못생긴 동물 가장 못생긴 새 사냥, 첫 번째 이야기 텐샨의 늑대사냥 벌레 몽골의 바다, 흡스굴 부이르의 어부들 “게르” 방문 매뉴얼 도살 음식으로 하는 초원 이야기, 첫 번째 음식으로 하는 초원 이야기, 두 번째 음식으로 하는 초원 이야기, 세 번째 고비 손톱의 때 초원의 아이들 초원에 부는 바람 2부 고산에서 그곳에 정말로 다녀왔을까? 알타이의 검독수리 사냥꾼 내 친구 ‘아다이’ 말고기 순대 ‘가쯔’ ‘텐샨’의 추억 신화가 된 동물 히말라야 그리고 돌포 히말라야 사람들 폭순도 호수, 그리고 상돌포 셰이곰빠 5월의 눈보라 줄레이 라다크 눈표범을 찾아서 파미르 사과나무 집에서의 꿈같은 밤 두 곳의 “꽃의계곡” 파미르의 호수들 마르코폴로양 나오며 |
서준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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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같은 풍경이 한없이 계속되는 초원. 그래서 초원의 여행은 사실 지루하다. 이정표나 표지판이 거의 없는 초원길에서는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앞으로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운전기사에게 물어봐도 항상 곧 도착할 거라는 답만 돌아오므로 ‘알아서 데려다 주겠지’하고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다.
---「길」 중에서 빛 공해도 전혀 없고 몸도 피곤하니 바로 잠이 들어야 할 텐데 나는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바람소리 때문이었다. 그날 밤 처음으로 초원의 바람소리를 들었다. 사실 바람소리야 우리나라와 몽골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초원의 바람소리는 다른 소리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바람만의 소리였다. ---「바람의 땅」 중에서 몽골에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기르던 개가 죽으면 몸에 우유를 뿌려주고 꼬리를 잘라서 개의 머리 밑에 놓아둔 모습으로 땅에 묻어준다고 한다. 개는 사람으로 환생하기 직전 단계의 존재여서 그렇게 꼬리를 자르고 묻어줘야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개」 중에서 독수리의 못생긴 외모에도 이유가 있다. 특히 독수리의 대머리는 청소부 일을 하는데 적합한 모습인데, 만일 머리에 깃털이 많다면 사체를 파먹다가 거기에 찌꺼기가 묻거나 병균에 오염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오지에 갈 때면 독수리처럼 거의 삭발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랄까. 머리를 감지 않을 테니 말이다. 자연에 의미 없는 존재는 없다. 궂은일을 하는 존재의 소중함을 잊기 쉬운 것은 야생이나 사람 사는 세상이나 비슷한 것 같다. ---「가장 못생긴 새」 중에서 오지에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느냐고 물으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모기’라고 답한다. 극심한 추위나 더위, 고산병, 엄청나게 가파른 파미르와 히말라야의 고개들, 입에 안 맞는 음식 등 그 어떤 어려움보다 모기에 물리는 고통이 훨씬 견디기 어려웠다. ---「벌레」 중에서 방송에 나간 후, 시청자의 여러 반응이 있었다. 대부분 가마우지를 무자비하게 죽이는 어부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부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니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이르 호의 어부들처럼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존재, 특히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며 살고 있지 않은가. ---「부이르의 어부들」 중에서 몽골의 이곳저곳에서 수없이 많은 집을 방문했지만 숙박을 거절당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전통은 사람이 드물고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온 유목민에게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겨울에 여행을 하다가 어렵게 집을 찾아 묵기를 청했는데 거절당한다면, 그 사람은 밖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은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유목민들은 암묵적인 사회적 약속을 한다. ---「게르 방문 매뉴얼」 중에서 몽골의 경우 해가 진 후나 비가 오는 날에는 절대로 가축을 도살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팔지도 않는다. 또한 도살을 할 때 가축의 비명 소리가 나서는 안 되며 땅에 피를 흘려도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축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죽여야 한다. 도살할 때는 양을 땅에 눕히는데, 평생 땅만 보고 다녔으니 죽을 때라도 한번 하늘을 보라는 의미라고 한다. 다음에 예리한 칼로 가슴을 약간 째고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척추를 지나는 신경다발을 손가락으로 끊는다. 그리고 가축이 발버둥치지 못하도록 잡아준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양이나 염소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숨을 거둔다. ---「도살」 중에서 사람들은 보통 화려하고 예쁜 데서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극한의 황량함이 주는 아름다움도 그에 못지 않았다. 겨울의 바얀울기는 매우 춥고 황량하고 건조하다. 대부분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든 거친 바위산으로 마치 인공위성에서 보내온 화성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세상에 뭐 이런 곳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그 황량함 속에는 비현실적으로 묘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곳에 정말로 다녀왔을까?」 중에서 마치 운명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검독수리 새끼를 포대기에 싸는 작업을 마친 리자벡은 흰 천을 빈 둥지에 묶었다. 어미에게 ‘하얀 마음’, 즉 좋은 마음으로 새끼를 잘 기르겠다는 약속의 표시란다. 이 모든 과정을 어미 검독수리는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새끼와 마찬가지로 리자벡을 위협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내 친구 아다이」 중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초원 생태계의 지배자가 늑대라면 고산지대는 눈표범의 영토라고 할 수 있다. 즉, 고산지대에서 반드시 카메라에 담아야 할 동물은 눈표범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눈표범은 높고 험한 산악지대에서만 살아가며 워낙 은밀하게 행동하는 까닭에 촬영이 가장 어려운 동물이어서 세계적으로도 야생의 눈표범 촬영을 성공한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신화가 된 동물」 중에서 해가 질 무렵, 흙더미를 핥아대던 푸른양 무리가 갑자기 동요하더니 슬금슬금 하나, 둘 자리를 피하는데 평화롭던 계곡에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멀리서 드디어 고대해 마지않던 눈표범이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잠복지 근처로 천천히 다가왔다. 자신이 히말라야의 주인이라는 듯 당당한 모습이었다. ---「눈표범을 찾아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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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생명의 땅
오지 다큐멘터리 전문 PD 서준의 중앙아시아 오지산책 "늑대만큼 용감한 사람만이 늑대를 볼 수 있고, 늑대보다 용감한 사람만이 늑대를 죽일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방송계에서 ‘오지의 PD’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방송국 생활 내내 생사를 넘나드는 악전고투를 통해서 세계의 오지만을 카메라에 담아온 사람, 국내외에서 이미 자연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EBS 프로듀서 서 준이 처음으로 털어 놓는 특별한 아시아 이야기. 2012년 절찬리에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아시아대평원]이 1년 만에 책으로 나온다. 책을 쓰기 위해 저자는 오지 촬영 내내 모래폭풍에 갇히거나 눈 덮인 히말라야의 혹한 속에서도 곱은 손으로도 메모를 잊지 않았고, 메모 한 줄 한 줄에 기억을 덧붙여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다. "검독수리 사냥을 위해 카자흐족은 새끼 독수리를 둥지에서 꺼내 오는데, 새끼를 꺼낸 다음 흰 천을 빈 둥지에 묶어준다. '하얀마음' 즉 좋은 마음으로 새끼를 잘 기르겠다는 약속의 표시다." - 본문 중에서 지구 상에서 가장 넓은 평야, 유라시아 스텝의 일부이면서도 영하 40도와 영상 4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막과 지구의 천정 히말라야에 둘러싸인 아시아대평원. 그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유목민과 가축 그리고 야생동물의 공존과 갈등을 방송에서 미처 전하지 못한 뒷 이야기들과 함께 독자들에게 전한다. "그날 밤 처음으로 초원의 바람소리를 들었다. 초원의 바람소리는 다른 소리가 전혀 섞이지 않은 바람, 그 자체만의 소리였다." - 본문 중에서 고비의 늑대와 히말라야의 눈표범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목숨을 건 저자의 생생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독자들은 늑대의 서늘하고 푸른 눈빛을 직접 만나고, 눈표범의 굵고 긴 꼬리가 살랑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뿐인가. 초판을 구매하는 2000명의 독자들에게는 DVD가 부록으로 제공되어, [아시아대평원]의 아름답고도 숨 막히는 장면을 영상으로도 바로 감상할 수 있다. “내게 자연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매력은 불확실성이다. 어떤 대상이나 장면을 찍게 될 지를 모른다는 점이 나를 가슴 설레게 한다. ... 자연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 본문 중에서 “히말라야에서는 동물들도 명상을 한다”는 저자의 농담은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 책은 흔한 여행기도 단순한 후일담도 아니다. 목숨을 걸고 자연을 만난 한 사내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며,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잊어버린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오지의 자연과 사람을 만나고 다니다 그 자연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된 한 사내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 저자 후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게 자연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매력은 불확실성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대상이나 장면을 찍게 될지를 모른다는 점이 나를 가슴 설레게 한다. 미리 만들어 놓은 대본대로 촬영을 할 수 없고, 찍고 싶은 동물을 미리 섭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항상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대감이 내가 자연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몇 년 전 생존이 불확실한 야생동물의 존재를 확인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적이 있다. 민통선 안에서부터 백두대간의 골짜기들을 다니면서 우리나라의 산에는 어떤 동물이 살고 있는지를 확인했는데, 그때 주로 사용한 장비가 ‘무인센서카메라’였다. 무인센서카메라는 근처로 동물이 지나가면 그것을 감지해 자동으로 촬영하는 장비로, 설치하는 과정은 밀렵꾼이 덫을 놓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발자국이나 똥과 같은 흔적을 통해 동물이 지나다니는 길목을 파악하는 과정은 밀렵꾼과 똑같다. 다만 덫이나 올무 대신 카메라를 설치하는 게 다를 뿐이다. 그래서인지 영어로는 camera trap이라고 한다. 카메라를 올무에 비유하긴 했지만 밀렵꾼들이 사용하는 덫이나 올무는 가장 잔인한 살상도구라고 생각한다. 올무나 덫에 걸린 동물들은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인센서카메라를 설치한 후 ‘어떤 동물이 걸렸을까? 혹시 우리나라에서 이미 멸종된 표범이나 여우라도 찍히지 않았을까?’하면서 무인카메라를 확인할 때의 설렘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는 달라 거의 대부분의 무인센서카메라에는 별다른 장면이 찍히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자연다큐멘터리는 ‘기대로 시작해 실망으로 끝나는 과정의 반복’이라고 이야기해주곤 한다. 그러나 자연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 보면 아주 가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때도 있다. 파미르에서 촬영한 마르코폴로양의 자연사自然死 장면이 그 중 하나였다. 그때도 처음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파미르의 해발 4,800m 정도 되는 키르기스 유목민의 집에 묵으며 마르코폴로양 무리를 촬영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고산병환자가 발생했다. 고산병에 걸리고 말고는 정말로 복불복이다. 나이도 많고 저질체력인 나나 카메라감독은 멀쩡한데 우리보다 훨씬 젊고 체력도 좋은 후배들이 고산병에 걸린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산병은 나이나 체력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전에 고산병에 안 걸렸으니 이번에도 고산병이 걸리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단다. 그야말로 그때그때 달라서 정말 복불복인 것이다. 고산병에는 별다른 약도 없고 저지대로 내려와야 한다. 어렵게 촬영장소를 정했는데 새로운 장소로 자리를 옮기기 억울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저지대로 내려오다 새끼와 함께 있는 암컷 마르코폴로양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일반적으로 마르코폴로양의 암컷과 새끼는 수십 마리가 무리를 이뤄 생활하므로 특이한 경우였다. 녀석은 우리를 보더니 천천히 자리를 피하는데 얼마가지 못하고 멈추는 모습이 얼핏 보기에도 무슨 문제가 있어 보였다. 나이도 무척 많아 보이고, 병에라도 걸렸는지 몸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아 보였다. 우리는 녀석이 놀라지 않도록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찰해 보기로 했다. 몇 시간을 제자리에 서 있던 녀석은 갑자기 무릎이 꺾이더니 주저앉아 버렸다. 보통 야생동물은 이렇게 한번 무릎이 꺾이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다. 녀석에게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 듯 했다. 다시 일어나 보려고 한참을 발버둥치던 늙은 마르코폴로양은 어느 순간 천천히 고개를 떨구더니 조용히 숨을 거뒀다. 저녁 노을이 주변 산봉우리를 붉게 물들이던 저녁 무렵이었다. 녀석의 몸에 별다른 외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자연사自然死를 한 것 같았는데, 이렇게 자연 상태에서 야생동물이 자연사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내 기억으로는 국내외를 통틀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생명이 다한 동물은 자신의 육체를 또 다른 생명에게 내주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다음날 새벽, 붉은여우 한 마리가 와서는 마르코폴로양의 사체를 조금 뜯어먹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정오 무렵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적막한 고산평원 멀리서 작은 동물이 마르코폴로양의 사체를 향해 다가왔다. 어제 어미와 헤어졌던 새끼가 분명했다. 어미의 냄새를 따라 온 새끼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서 까마귀의 울음에도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어미 근처로 다가오던 녀석은 웬일인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유목민이 개를 데리고 나타났다. 새끼가 어미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것은 유목민의 출현 때문이었다. 유목민은 마르코폴로양의 사체를 잠시 둘러보더니 자신의 가축을 향해 자리를 떴다. 주인을 따라온 개가 사체를 먹었다. 이야기를 억지로 만들려고 해도 힘들 정도로 드라마틱하고 자연의 섭리를 잘 보여준 상황이었다. 히말라야의 룸박 계곡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촬영을 모두 마치고 당나귀에 짐을 실어 내려보내고 카메라맨과 둘이서 천천히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았는데 계곡 너머에서 여우가 짝짓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됐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짝짓기야 원래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여우는 주로 밤에 짝짓기를 하기 때문에 그 장면을 보기 어려운데 뜻밖이었다. 여우도 우리의 갑작스런 출현에 당황했는지 서둘러 짝짓기를 마치더니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촬영을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허가받지 않고 비밀스런 장면을 촬영했지만 여우는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느냐’며 항의하지 않았다. 초상권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점, 자연다큐멘터리의 또 다른 장점이 아닐까? 모든 게 계획대로, 혹은 예상한대로만 이뤄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재미없을까? 하지만 자연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자연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그러기에 생각지도 못한 여우의 짝짓기나 마르코폴로양의 죽음의 순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정해진 대본이 없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자연다큐멘터리가 다른 장르에 비해 힘든 이유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내가 자연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