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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날들이 흘렀다 런던라사 삐에르 판근은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만나러 갑니다 도둑 전화위복 복순이 누나 소원을 들어줘 소문, 시작도 끝도 없는 복사꽃 사랑 어느 날 판근은 복순이 누나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판근, 삐에르에게 실망하다 그해 바캉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판근 디자이너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런던라사 삐에르의 세련된 옷차림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방학이 끝났다 할머니, 쟤 좀 이상해요 다시, 빨간 달 새로운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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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근은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낮잠 한번 잘못 잔 것이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다니, 판근은 기가 막혔다. ‘비록 세상이 망하진 않았을지라도 이 김판근의 세상은 무너졌다, 고로 모든 게 끝났다’고 판근은 생각했다. 하여 판근은 울다 지쳐 죽어버리기로 했다. 하늘이 낮잠 한번 잘못 잔 사소한 죄로 죽어버린 자신을 가엾게 여겨 종달새로 다시 태어나게 해준다면 정말 다행한 일이겠다고 생각하던 판근은 울다 지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새가 종달새가 아니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자 그 새가 어떤 새였는지가 무척 궁금해졌다. 그래서 판근은 울음을 그치고 그 새가 어떤 새였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떠오를 듯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판근은 너무 갑갑했다. ‘이럴 때 할머니가 있었다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던 판근은 다시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은 모두 자신이 낮잠 한번 잘못 잔 탓이며, 자신의 잘못으로 가족이 동네에서 쫓겨나게 됐으니 자신은 죽어 마땅하지만, 낮잠 한번 잘못 잔 탓으로 이토록 가혹한 운명을 맞은 것은 아무래도 너무한 것 같아서 다시 울음이 터져 나왔다.
--- pp.11-12 그것을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여러 개로 조각난 거울과 같아서 도무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알려 하면 할수록 아이의 입에서는 ‘아니오’라는 말이 속출할 것이며,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아이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미궁 속으로 더 깊게 침잠할 것이다. 그러므로 판근의 마음을 어른의 관점으로 재단하지 말기로 하자. 다만 한 가지 조심스러운 가설을 제시해볼 수는 있다. 그것은 바로 ‘삐에르에 대한 그리움’이요, 더 나아가서는 ‘환상과 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판근은 런던라사에서 삐에르가 준 커피를 마시던 그 첫 순간에 영원히 그 맛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운명적인 생각을 했다. 달달하고 향긋하고 따뜻한 그 갈색의 액체는 판근을 순식간에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도 전혀 창피해하지 않는 서양의 왕자로 만들어주었다. [왕자와 거지] 이야기에 나오는 거지도 아마 이 마법의 음료를 마시고 거지에서 왕자로 탈바꿈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 pp.42-43 한번 부서진 복순이 누나의 복숭아뼈는 다시는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복순이 누나는 웃음을 잃고 절뚝이는 여자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복순이 누나는 조선 최고의 미녀였다. 그러나 어쩐지 슬픈 미녀였다. 복순이 누나의 아버지는 복순이 누나가 절뚝이며 걸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속으로 쓰디쓴 눈물을 삼켰다. “미련한 년, 잘 좀 피할 것이지.” --- pp.136-137 “여자의 마음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구나. 복순이가 연애를 하는데 왜 네 엄마가 들떠서 난리인지 모르겠다.” 밭에서 일하느라 땀에 푹 젖어 돌아온 아버지가 몹시 피곤해하며 말했다. 마치 아버지가 지친 건 밭일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엄마의 수다 때문이었다는 듯. 판근 역시 동네 아줌마들이 왜 그렇게 복순이 누나의 연애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근거 없는 뜬소문이라는 사실이 뻔히 드러났는데도 말이다. 판근 또한 아버지처럼 몹시 피곤해져서 아버지의 말에 동감의 뜻을 표했다. “그러게 말이야.” 샘에서 발을 씻으며 부자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할머니가 여태 그것도 모르느냐는 투로 말했다. “복사꽃이 피었잖냐. 에미도 여자인 게지.” --- pp.191-192 “아가, 빨간 달이 떠서 사람이 죽는 건 아니란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죽을 수 있지. 빨간 달이 뜰 때도, 누런 달이 뜰 때도, 달이 아주 안 뜰 때도 사람은 죽는단다. 사람들이 죽는 걸 너무 두려워해서 그렇지 어쩌면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닌 건지도 몰라. 그저 눈 감고 이세상에서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것뿐일지도 모르지. 저세상이라고 이세상과 뭐가 그리 다르겠느냐? 어차피 죽으면 우리 모두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걸.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라. 그나저나 내 강아지가 그런 생각을 다 하는 걸 보니 이제 어른이 되어가는 게로구나.” --- pp.256-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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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지의 첫 장편소설 『런던라사 삐에르의 세련된 옷차림』은 십대 김판근의 성장기로 ‘조국 근대화 시기’를 견디며 지나온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속에 숨겨둔 이야기들이 총출동한다. 감수성 예민한 주인공 김판근, 눈물 많은 김판근, 매질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 한복판의 김판근이 탈피하면서 성장하는 이야기이며, 생의 목표를 따뜻하게 수정해 가는 이야기이다. 긴말 필요 없이, 다 큰 김판근의 나라는 참 재미지겠다. - 윤석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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