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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빈
겨울에 창밖의 논을 보며 작업을 하다 보면, 지금 하는 일이 어떤 면에서는 벼를 다 베어간 논에 와서 이삭을 찾는 철새 같은 느낌도 들어요. 박민하 풍경 그리는 것은 지겨울 수 없는 일이에요. 풍경은 정확하 게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정답이 있을 수 없고요. 이양희 퍼포밍을 한다는 것은 저의 지난 모든 시간을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그 퍼포밍의 시간에 오롯이 가져다 놓는 일이에요. 모든 것을 관객 앞에 놓는 그 시간이 공연의 러닝 타임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것이고요. 온도, 질감, 물리적인 조건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공간에서 신체라는 유기체가 반응하는 변수까지 다 가지고 있으니, 퍼포밍 아트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거예요. 춤을 춘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무게, 고결함, 거대한 책임이 생기는 일이 되고요. 이것을 또 너무나 찰나에 보여주죠.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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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제 나름의 형식으로 끝까지 생각해보려는 모습에 (언제나) 감동한다. 그러나 생각 특유의 개인성, 폐쇄성, 은밀함 덕분에 개인은 아무도 모르게 타협점을 찾아내곤 한다. 개인의 타협은 이내 개인이 선택한 물질에 투영된다. 게다가 생각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변덕을 부리며 (언제든) 물질과 간편히 멀어질 준비가 되어있다. 때문에 개인에게는 지속적인 긴장이 심심찮게 요구된다. 한편 개인을 지켜보는 개인은 (언제나) 투명한 감동을 기대한다. 이를 위해 생각이 물질과 어떻게 관계했는지, 관계하는지, 관계할 것인지를 살피는 애씀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 애씀은 (언제나) 효용이 없다. 물질은 물질의 존재가 있어야 해서 있는 것일 뿐, 관계의 모양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위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는 (언제나) 개인에게서 출발한다. 역사는 (언제나) 개인을 선행한다. 그러나 역사를 딛는 것 또한 (언제나) 개인이다. 둘 이상의 개인이 세계를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세계를 인지하는 일은 (언제나) 개인적인 차원의 문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예술 창작 또한 (언제나) 역사를 딛고 발생한다. 물론 역사를 딛는 정도는 (언제나) 개인의 몫에 따라 결정된다. 개인의 몫은 자신의 앎과 경험 사이에서 배움과 폐기, 질문과 연구를 반복한다. 요컨대 예술 창작은 (언제나) 나름의 몫으로 역사를 디딘 개인이 발생시킨다. 이때 개인의 몫은 시대에 반응하거나 시대에 편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몫은 때때로 그에게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다. 개인은 명확한 한계 안에서 역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세계 차원의 돋움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이 일이 수없이 반복되며 개인은 과거라는 덩어리에 제 부피를 찾아 귀속된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이미 죽어버린 역사 당사자가 아닌 지금 살아있는 개인을 통해 반성된다. 지금 살아있는 개인은 자신의 앎을 구성하는 역사를 배우고, 부정하고, 복기하고, 폐기하고, 반성하며, 그 여정의 어딘가에서 (언제나) 창작한다. 개인은 이미 죽은 이가 했던 선택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선택을 찾고자 열망한다. 예술은 그래서 한 개인의 앎에 대한 의지, 용기를 수반하는 질문, 한계인 것으로서의 자유, 느낌으로부터의 희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거쳐 가는 시간을 통해서 (언제나) 물질로 발현된다. 물질은 개인의 시간보다 길거나 혹은 짧게 (언제나) 상대적인 시간을 점유한다. 서로 다른 여럿의 개인은 물질로서 그들 각자의 진실을 다듬어낸다. 그 여럿의 진실은 서로를 견주며, 그것이 대체 불가능한 나름의 진실이 맞는다는 전제하에 서로를 수용한다. 진실의 생김이 다를 뿐 진실의 속성은 비슷한 종류의 믿음과 쾌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은 (언제나) 이 믿음과 쾌감에 관여한다. 그러나 현실이 개인의 믿음과 쾌감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문해로부터 출발한 현실은 개인과 나란히 교류한다. 그러니 예술 장작에 있어 진실의 독장성이라던가, 믿음의 고유성, 쾌감의 파급력 같은 것은 개인이 세계 문해를 위해 자기만의 시간을 얼마만큼 확보했느냐의 문제가 된다. 현실이 개인이나 그 개인이 만드는 예술 작품에 대해 우위를 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개념은 개인이나 그 개인이 만드는 예술 작품에 선행하지 않는다. 현실과 개념은 (언제나)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 개인이라는 물질, 개인이 다루는 물질에 대해서는 (언제나) 날 선 눈으로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살과 돌과 기름은 (언제나) 눈에 띄는 방식으로 다른 물질을 흡수한다. 그럼에도 제 본래의 성질을 잃지 않는다. 영원히 총량을 가늠할 수 없는 살과 돌과 기름은 그 변모 상태의 완결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끝없이 물질을 흡입하고 배출한다. 완결을 염두에 두지 않는 물질은 (언제나) 전개를 이을 수 있는 상태로 남는다. 그 전개는 물질의 고유한 운동을 발생시킨다. 운동성이 전개되는 전제로 당시의 현실과 개념이 그 물질과 교류한다는 해석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개인의 생각은 (언제나) 물질을 통해 살펴야 하지만, 탐욕스러운 독자나 탐심 어린 청자는 (언제나) 그 개인에 게서 두고두고 문해 할만한 문장을 기다린다. 한 개인의 말이 말의 발설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지 알기 위해서는 개인의 죽음과 그 이후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개인의 말은 향후 무엇이 될지 모르는 생각의 변화를 이미 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살처럼, 덜어지는 돌처럼, 포개지는 기름처럼. (박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