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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서론 제1부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공주 들어가며 제1장 동학의 창도와 발전 1. 최제우의 동학 창도 2. 최시형의 동학 전파 제2장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 1. 시천주 사상 2. 보국안민사상 3. 후천개벽사상 4. 민족자주사상 제3장 동학과 공주 1. 공주의 공간적 배경 2. 최시형의 공주 포교와 공주접주 윤상오 3. 교조신원운동의 시작, 공주 4.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 동학교도의 활동 제2부 1894년 동학농민군 봉기와 청일전쟁, 공주전투 전야 제1장 동학농민혁명과 일본군의 조선 왕궁 점령, 청일전쟁 1.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 2. 일본군의 조선 왕궁 점령과 청일전쟁 제2장 농민군 항일 2차 봉기와 조일진압군의 출병 1. 남접, 북접 농민군의 항일 봉기와 연대 2. 일본군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 및 도순무영(경군)의 출병 제3장 공주로 집결하는 농민군과 조일진압군 1. 공주의 주요 전투 지역 및 농민군 거점 지역 2. 공주를 포위한 남접 및 북접 농민군, 지역 농민군 3. 공주를 방어한 조일진압군 제3부 공주전투 22일, 제1차 전투와 2차례 대치 제1장 공주전투 제1차 대치(10월 22일) 제2장 제1차 공주전투(10월 23일~25일) 1. 이인전투(利仁戰鬪, 10월 23일) 2. 효포전투(孝浦戰鬪, 10월 24일~25일) 3. 대교전투(大橋戰鬪, 10월 24일) 4. 옥녀봉전투(玉女峯戰鬪, 10월 25일) 제3장 공주전투 제2차 대치(10월 26일~11월 7일) 1. 농민군의 퇴각과 11일간의 대치 2. 효포 농민군 피습 사건(10월 26일) 3. 공주의 경천을 확보한 농민군 4. 공주 방어에 급급했던 조일진압군 제4부 공주전투 22일, 제2차 전투와 제3차 대치 제1장 이인전투(利仁戰鬪, 11월 8일) 1. 11월 8일, 대규모 북접 농민군 이인 포위 2. 농민군의 이인 점거와 경리청 성하영·백낙완 부대 우금티로 탈출 제2장 제2차 공주전투; 농민군의 공주 포위와 조일진압군 배치 1. 11월 8일 무렵, 공주를 포위한 농민군 세력 및 거점 지역 2. 11월 8일 밤, 농민군의 공주바깥산줄기 포위 3. 11월 9일 아침, 농민군의 공주 삼면(三面) 포위 4. 조일진압군의 배치 제3장 11월 9일 공주전투 1. 우금티전투 2. 송장배미산자락전투 3. 오실산자락전투 4. 효포전투(11월 9일) 제4장 공주전투 제3차 대치(11월 10일~14일) 1. 5일간의 제3차 대치 2. 중대·우와리의 대치와 농민군 피습 사건(11월 11일) 3. 유구 농민군 침탈 사건(11월 11일) 4. 조일진압군의 반격과 논산 진출 제5부 공주전투와 동학농민혁명 제1장 공주전투에 참전한 농민군 인원 1. 선행연구와 사료 검토 2. 공주전투에 참전한 농민군 인원에 대한 가설 제2장 공주전투에서 학살된 농민군 1. 사료에서 보는 공주전투에서 학살된 농민군 인원 2. 구전에서 보는 농민군 공주 대규모 학살지 제3장 동학농민혁명, 정규전과 유격전 1. 진압군 일본군이 본 동학농민군의 유격전 2. 동학농민군의 유격전에 대한 연구자들의 평가 3. 동학농민혁명 시기 농민군이 유격전을 벌인 사례 4. 정규전에 의한 농민군의 참혹한 패배 5. ‘전봉준의 공주 점거와 항일 농성전 견해’ 비판 6. 동학농민혁명 시기 유격전의 의의 제4장 공주전투의 평가와 의의 1.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 계획 파탄 2. 공주전투는 제국주의 일본의 제노사이드 사건 3. 남접과 북접, 토착 동학농민군이 연대한 공주전투 4. 민족연합전선의 실천장 공주전투 5. 장기적, 조직적, 결사적으로 항쟁한 공주전투 6. 우금티전투를 넘어선 ‘공주전투 역사’의 정립 결론 부록 1 『동학농민혁명과 공주 인물』 부록 2 『사료에서 보는 공주전투에 모인 농민군 인원, 40리 포위망』 부록 3 『동학농민혁명 공주전투 관련 일지』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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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은 조선 후기의 여러 갈래 민중운동을 계승하였으며, 그 직접적인 사상적·조직적 배경과 기반은 1860년에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과 최시형에 의한 동학의 계승 및 전국적인 포교 활동, 그로부터 형성된 동학교단과 교도들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그 후 한편으로는 신종교운동으로 계승되어 천도교,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의 탄생을 가져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사회운동으로 계승되어 의병전쟁, 일제하 독립운동과 3·1운동,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으로 전개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 p.38 척왜양·반침략의 민족자주사상은 최제우와 최시형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였고, 동학 창도와 포덕 과정, 교조신원운동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시기에도 일관되게 표명되었다. 이러한 민족자주사상은 민중들에게 실천의 정당성을 부여하였고 또한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지향했던 한국 근대사의 귀중한 유산으로 되었다. 또한 동학 포교의 역사에서 형성된 동학의 포(包)와 접(接) 조직은 1894년 동학농민군의 토대가 되었다. 동학 창도 초기 조직인 접은 인적 관계로 결합한 조직인 반면에, 포 조직은 인적 결합 관계 외에 지역적 결합의 성격이 강한 조직이었다. 동학조직은 대접주의 포가 예하의 접 조직을 이끄는 상위에 위치해서 인맥으로 연결된 수많은 교도들을 통제하였다 --- p.73 그동안 동학농민혁명 시기의 남접과 북접 농민군의 활동 그리고 이와 관련된 공주전투에 대한 학계의 일반적 학설은 다음과 같다. 즉,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중심의 사회개혁파 남접과 최시형의 동학교단을 중심으로 충청·강원·경기·경상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북접이 대립해 왔는데, 최시형의 청산기포령(9월 18일) 이후에 남북접의 대립이 해소되었고, 공주전투는 일본군의 군사적 침략이라는 역사적 사실 앞에 남접과 북접이 연대한 대회전(大會戰)이라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시기의 남북접 대립을 부각시킨 사료로는 황현의 『오하기문』과 오지영의 『동학사』가 있고, 학계에서는 정창렬과 조경달이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남북접 대립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일본군 지휘자 미나미 소좌도 남접과 북접이 대립해 왔다고 보고하고 있다. --- p.166 효포전투(10월 24일)에서 주력 농민군은 10월 23일 저녁에 경천으로 모인 전봉준 농민군과 이유상 농민군, 김기창 농민군이다. 대교에 모인 북접 농민군은 낮 시간에 대교전투를 치르느라 참전하지 못했다. 공주 계룡산 동쪽 신소에 10월 23일 나타난 북접 농민군 1만여 명은 10월 24일 아침을 먹고 계룡산의 고개 구치를 넘어 효포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 신소의 농민군은 10월 24일 점심 무렵 또는 오후에는 효포전투에 참전했을 것이다. 아니면 납교 마을 앞에서 선봉진 이규태 부대와 대치하고 10월 25일 옥녀봉전투를 준비했을 것이다. 효포전투(10월 24일)에서 효포를 방어한 경군은 경리청의 성하영·윤영성·백낙완의 2개 소대 280명이었다. 10월 23일 저녁에 효포에 주둔하고 있던 홍운섭·구상조 경리청 부대는 대교의 농민군 습격을 위해 10월 24일 새벽같이 대교로 출발하여 낮 시간에 대교전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10월 24일 효포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10월 23일 이인전투에 참전했던 스즈키 부대는 미리 계획된 상부의 지시에 따라 10월 24일 묘시(오전 5시~7시)에 공주를 출발하여 10월 29일 일본군 용산수비대로 귀환하였다. 스즈키 부대도 10월 24일 효포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 p.213 공주전투 제2차 대치, 11일간의 대치 기간에 관군은 이인·늘티까지 군대를 보냈으나 경천에는 군대를 파견하지 못했다. 즉 경천은 이 대치 기간에 농민군의 세력 범위에 있었다. 제2차 대치 기간 중에 농민군은 경천·논산뿐만 아니라 계룡산 갑사, 연기 세거리(世巨里), 이인(김의권 농민군), 공주의 반송, 건평, 정산(김기창 휘하 농민군)에서도 세력을 모으고 공주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 p.263 11월 9일 공주에서는 농민군의 공격으로 우금티 등 공주바깥산줄기의 4곳에서 대규모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1월 9일 전투에서 농민군이 패배한 뒤, 주력 농민군 수천 명은 공주의 남쪽 중대·우와리 일대에서 조일진압군과 대치를 계속하였다. 11월 11일 경군의 기습으로 중대·우와리 일대의 농민군은 물러났으나, 11월 14일까지 농민군은 공주의 경천·이인·계룡산 등지와 논산에 포진하면서 청주를 공격하는 김개남 농민군과의 연대를 꾀하며 공주 재공격을 위한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14일 저녁 무렵 조일진압군이 공주 남쪽을 탈환했고, 11월 15일 논산전투가 일어났다. --- p.347 화승총·죽창으로 무장하고 훈련되지 못했던 농민군은 스나이더 소총(또는 무라다 소총. 모두 라이플총)으로 무장하고 징병제 군대이며 근대식 훈련을 받은 일본군, 20만분의 일 지도와 전신선 등을 활용하여 작전을 지휘하는 일본군과의 대결에서 공주전투와 같은 정면 대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격전을 통해 농민군의 활로를 찾고자 했다. 농민군은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사례도 적잖게 확인된다. 동학농민혁명 시기 농민군의 유격전은 한국 근대 반일무장투쟁의 기나긴 역사에서 유효한 전략이었던 유격전의 첫 시작이었다. 한국 근대 반일무장투쟁은 동학농민혁명, 의병전쟁, 만주의 독립군 투쟁을 거치면서 무장투쟁의 방법론으로서 유격전의 이론과 실전 능력을 정립해 나갔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일본군의 개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은 항일 투쟁이 정면 대결이 아니라 유격전으로 전환이 필요한 결정적인 시기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 p.388 지금까지 공주전투는 대체로 우금티전투, 1차 전투와 2차 전투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본 연구의 결과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세부 전투 내용이 밝혀졌다. 그로 말미암아 공주전투 전체를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공주전투는 22일 동안 계속되었고 아홉 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고 3차에 걸친 대치가 있었다. 이인전투는 두 차례 있었는데 10월 23일 이인전투는 남접 농민군이 주도했고, 11월 8일 이인전투는 북접 농민군이 주도한 것을 밝혔다. 10월 25일 북접 농민군이 주도한 옥녀봉전투를 밝혔으며, 11월 9일 송장배미산자락전투도 북접 농민군이 주도하였는데, ‘육박혈전 10여 차례’의 처절한 항쟁은 ‘송장배미’, ‘하 고개의 떼무덤’ 이야기로 전승되고 있는 것을 밝혔다. 효포전투도 10월 24일~25일, 11월 9일에 걸쳐 두 차례 전투가 있었던 것을 밝혔다. --- p.404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많은 농민군이 학살당했다. 30~40만 명이라고도 한다. 공주전투에서는 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희생되었을까? 우금티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쓴 40~50차례 농민군의 연속 공격은 “우금티 산자락에 시체를 가득하게 했다.”(積尸萬山) “우금티전투에서 조일진압군의 반격으로 봉정동 일대는 무덤이 되었고, 봉정동은 삼 년을 두고 시체를 치웠다.”(구전) 우금티전투를 지휘했던 전봉준은 “1만여 농민군이 (최종적으로) 5백 명만 남았다”고 증언했다. 송장배미산자락전투에서는 “육박혈전 10여 차례”에 “피는 내를 이루고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었다.”(血海成川, 尸體積山) “오실 마을에서는 보아티 들과 보아티 고개에 시체가 즐비하였다.”(구전) “농민군의 피로 적셔진 효포의 혈흔천”(血痕川, 구전), “이인에서 길을 따라 약 2킬로미터 줄을 선 무덤떼”(구전)는 농민군의 희생자 수가 만만치 않게 많았음을 전하고 있다. 『오하기문』에서는 공주전투에서 “무릇 세 번의 패배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는데, 이때 날씨가 매우 추워 죽어 넘어진 채 얼어붙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p.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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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전투에 대한 최초의 단일한 종합연구서 / 국지적인 ‘우금티전투’가 아닌 전면적인 ‘공주전투’ / 일본군의 조선침탈을 저지한 전투 / 일본군의 제노사이드 현장 / 명백한 항일전투로 항일의병전쟁의 시발점 / 남북접 연합 동학농민군이 참전한 본격적인 전투 / 각계각층의 민족이 참전한 항일민족연합전선의 전투 / 공주전투의 위상 재조명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전체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게 돼
동학농민혁명은 2023년에 그 관련 기록물이 세계 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인류사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 책은 세계 유수한 혁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대 전투이며, 혁명의 운명을 갈음한 결정적인 전투였던 ‘공주전투’의 역사적 실상을 촘촘히 재구성하면서 그 의의를 재조명하고, 조선의 운명을 갈음하였던 구체적인 흐름, 그리고 동아시아 근대사에 미친 영향을 밝혀낸다. 이 책의 의의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공주전투’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쓰면서, 왜 이것이 1894년 11월-12월 사이에 전개된, 공주 일원에서의 동학농민혁명 최대 전투를 지칭하는 바른 이름인가를 제시한다. 즉 공주전투는 주력군의 진격로인 우금티 일대만이 아니라, 공주부성을 둘러싼 사방의 진격로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는가 하면, 정규전과 유격전을 병행하고, 공주 인근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공주 진격 전투와 연계한 대소규모의 전투가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된 복합적이고, 장기적이며, 다면적인 전투였음을 밝힌다. 둘째, 이 책은 공주전투가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진압 계획과 한반도 장악 계획을 파탄 직전까지 몰아간 ‘성공적인’ 전투였음을 논구하였다. 공주(우금티)전투가 동학농민혁명에서 최대 규모의 전투였으나, 최대의 희생자를 내고, 동학농민혁명의 실질적인 ‘실패’를 결정한 전투로서 이야기되는 일반적인 평가를 전복한다. 즉 당초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 작전에서 공주는 일박하는 경유지에 불과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은 이 전선에서 22일간에 걸쳐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또한 공주전투는 공주를 둘러싼 전투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각 지역별로 전개되고 있던 동학농민군들의 대소 전투와 연계를 맺는 가운데 진행되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셋째, 공주전투는 일본이 제국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저지른 조선 민중에 대한 본격적인 최초의 제노사이드(학살) 사건이었다. 이는 일본군이 경복궁 침탈 사건을 기점으로 하는 ‘조일전쟁(朝日戰爭)’을 도발한 이래 궁극적으로 식민지화를 염두에 두고, 항일의 씨앗이 될 동학농민군과 그 추종세력을 발본색원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주모자 색출과 주력부대의 궤멸과 몰살을 기도한 사건이다. 이것을 “동학교도에 대한 처치는 ... 향후 모조리 죽일 것”이라고 하는 일본군 대본영의 명령서가 증명하고 있다. 공주전투 기간 중에도 일본군의 대량 학살은 곳곳에서 자행되었음을, 증언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다. 넷째, 제2차 동학농민혁명 봉기의 정점에서 치러진 공주전투는 명백한 항일전투이자 조선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독립전쟁이었다. 이는 공주전투에 임한 남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이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에 대한 항의와 일본군의 철병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해월 최시형의 총기포령에 따라 봉기하고, 공주전투를 시작으로 한반도 남쪽 끝까지 밀려나가면서도 항전을 계속했던 데서 드러난다. 다섯째, 공주전투는 남접과 북접 동학농민군 및 공주 지역 토착 동학농민군이 연대하여 치러낸 전투이다. 일반적으로 공주(우금티)전투는 전봉준의 ‘남접’(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을 위주로 한 전투로만 이해되지만, 전봉준 휘하 남접 동학농민군의 2배 가까운 6~7만 명의 북접 지역(충청도와 경기도 등) 동학농민군이 북접통령 손병휘의 지휘하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거두고, 대세가 기운 이후에는 전봉준군과 더불어 임실 지역까지 후퇴한 역사적 사실로써 확인할 수 있다. 공주 지역 출신 동학농민군은 ‘양반’ 출신이 이끄는 유생부대가 참전하고,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한 유격전까지 벌인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동학농민군의 전투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공주 인근 지역의 마을 사람들이 병참 지원(식량 조달)에 나서는 등, 민족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전투를 전개하였다. 여섯째, 공주전투에 임한 동학농민군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으나, 22일간의 전투 기간 동안 조직적이며 결사적으로 항쟁하였다. 전봉준 휘하 농민군은 1차 봉기 이래의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특히 ‘살림의 군대’로서 군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자긍심을 내면화한 혁명군이었다. 또한 손병희 휘하의 농민군은 신앙적으로 더 깊이 단련된 내면적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그러기에 압도적인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0~50차례의 돌격전과 10여 차례의 육박 혈전까지 다양한 전투를 장기간에 걸쳐 치러냈으며, 일시적인 패배 이후에도 급격히 해산하지 않고, 장소를 옮겨가며 전투를 계속하였다. 공주전투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보다 각계각층이 대동단결하여 반일 민족자주 수호 전쟁을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전투에 임한 3대 세력은 남접 농민군, 북접 농민군과 함께 공주 지역의 토착 농민군도 합세하였다. 또한 공주전투가 일방적인 패배로 귀결된 싸움이 아니라, 압도적인 무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조직적으로 응전하였던 본격적인 전투였으며, 참전한 농민군들이 경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한 정도로 무장되었던 혁명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주전투 실상을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이 한편으로는 무장독립운동론의 연원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 비폭력무저항운동이었던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는, 이중적 성격을 종합하고 있는 우리의 자주적 근대민족운동사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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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1월에서 12월 사이 22일 동안, 10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충청도 수부(首府) 공주를 에워싸고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0만 명 가운데 6만여 명이 이른바 ‘북접’(北接) 농민군이었다. 그 결과, 29일간 예정했던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토벌 작전 일정은 90일로 대폭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공주는 본래 하루로 예정했던 작전 일수가 무려 22일로 늘어났다.”
이 내용은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 연구』라는, 기존 동학농민혁명 연구를 완전히 뒤집는 획기적 내용이 담긴 정선원 박사의 연구를 요약한 것이다. 정 박사는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20여 년간 적공(積功)에 적공을 거듭했다. 공주 우금티 일대 사방 백 리 안에 있는 모든 마을을 답사하여 동학농민혁명 이야기를 알고 있는 분들의 구술 증언을 채록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 남아 있는 문헌 자료를 샅샅이 검토하여 22일간 우금티와 공주 외곽 일원에서 전개되었던 전투를 지도(地圖)로 복원해 냈다. 금번 정 박사의 이 책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전체상(全體像)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며, 정 박사의 저서를 읽지 않고서는 앞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제대로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단언컨대 정 박사의 저서는 앞으로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전범(典範), 즉 교과서가 될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동학농민혁명은 결코 실패한 혁명이 아니다. 다만 지난 130년간 그 ‘역사적 진실’이 묻혀 있었을 따름이다. 묻혀 있던 역사적 진실을 20여 년에 걸친 적공을 통해 밝혀낸 정선원 박사의 건강과 앞으로의 정진을 기원한다. 끝으로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산화하신 수십만 동학농민군의 영령을 추모하는 ‘통곡의 벽’이 우금티 고갯마루에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박맹수 (전 원광대학교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