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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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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밝은 달빛이 수면에 흩뿌려 내린 순간, 마휴는 동작을 멈추었다. 은빛의 물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은머리에 놀라 본증적으로 검자루를 움켜잡았다가, 뒤이어 드러나는 여체에 허겁 숨마저 움켜잡았다. 물은 여인의 가슴을 가려주지 못했다. 눈부신 달빛에 드러난 가슴은 흰 도라지꽃처럼 피어올라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미처 몸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여인이 그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여인은 몸을 가리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마휴는 여인의 가슴에서 시선을 올려 가는 목선을 타고 얼굴을 살펴 시선을 붙잡았다. 여인의 눈동자에 드러난 것은 두려움도 아니요, 부끄러움도 아니었다. 검은 눈동자는 뿌연 안개에 가려진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움으로 아득하기만 했다. 검은 장막 같은 어둠속에서 흐르는 달빛에 반사된 물빛을 머금은 흑수정 눈동자! 마휴는 문득 어디선가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은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 pp.4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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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잠시 눈을 떴었소"
침묵을 깨고 마휴가 입을 열었다. 대아한은 거의 사흘 만에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에 반갑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더욱 바짝 다가가 앉았다. 서우여의 음성은 마치 울퉁불퉁한 돌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처럼 꺼칠하고 건조했다. "정말이오? 그럼, 정신이 들었단 말이오?" "잠깐이었지만, 정신이 들었던 것 같소. 내 손을 잡고 대아한과 노아 공주를 부탁한다 했소. 그리고, 다시 잠들었소. 유언을 한 거요. 더이상 버텨낼 자신이 없었던 거지. 이제 모두 놓아버리고 훨훨 날아가버리고 싶은 거요" 마휴는 고통스러운 어조로 간신히 말을 맺고는 대아한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아화는 그이 눈동자에 어린 처절함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소.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 한시라도 빨리 편안하도록 고이 놓아주는 것이 옳겠지만..." 마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갸름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보내지 않겠소. 무슨 말인지 알겠소? 절대로 안 돼!" --- p. 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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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잠시 눈을 떴었소"
침묵을 깨고 마휴가 입을 열었다. 대아한은 거의 사흘 만에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에 반갑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더욱 바짝 다가가 앉았다. 서우여의 음성은 마치 울퉁불퉁한 돌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처럼 꺼칠하고 건조했다. "정말이오? 그럼, 정신이 들었단 말이오?" "잠깐이었지만, 정신이 들었던 것 같소. 내 손을 잡고 대아한과 노아 공주를 부탁한다 했소. 그리고, 다시 잠들었소. 유언을 한 거요. 더이상 버텨낼 자신이 없었던 거지. 이제 모두 놓아버리고 훨훨 날아가버리고 싶은 거요" 마휴는 고통스러운 어조로 간신히 말을 맺고는 대아한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아화는 그이 눈동자에 어린 처절함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소.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 한시라도 빨리 편안하도록 고이 놓아주는 것이 옳겠지만..." 마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갸름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보내지 않겠소. 무슨 말인지 알겠소? 절대로 안 돼!" --- p. 2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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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과 함께 막사 안으로 스며든 검은 그림자, 나라 잃은 번한의 서우여 마휴는 섬뜩한 기운을 느낌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그 그림자의 흑수정 눈동자에 빨려든다. 우연히 동맹국 마한의 은신처 태행산의 연못에서, 검은 장막 같은 어둠을 가르는 달빛에 반사된 물기 머금은 흑수정 눈동자를 다시 맞닥뜨린 그는 그 신비로움에 속절없이 이끌리게 된다. 하지만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기자족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부모님과 백성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하는 그 자신의 처지와 그녀의 초연한 눈빛에 번번이 좌절의 쓴맛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아라사 또한 나라 잃은 마한의 수비대장으로서 결코 사사로운 감정을 가슴에 담을 수 없는 처지의 여인이다. 이미 여인이기를 포기했듯이 거침없이 다가서는 마휴 역시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잠시의 혼란스러움일 뿐이라고, 여느 때처럼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닫아걸고 그의 마음을 거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거부할수록 오히려 그는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 서서히 자리를 넓혀가고,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전사로서의 다짐이 그녀를 더욱 안타깝게 몰아댄다. 힘겹게 받아안은 사랑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휩쓰는 동안 그들을 더욱 애틋하게 서로에게로 향하게 하는데…….
비장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애잔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절박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따뜻하면서도 감동적인 떨림을 경험하게 한다. 힘겹게 서로를 받아들인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며, 그래서 더욱 소중히 가꾸어가는 모습을 통해 새삼 사랑의 귀함을 깨닫게 한다. 이 작품의 매력은 생생하게 되살려놓은 역사적 배경과 섬세한 묘사,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도록 잘 짜인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인물들에 있다. 지혜와 용맹을 갖췄지만 고단한 삶의 무게로 승리의 기쁨에도, 권력의 달콤함에도 마냥 취하지만은 못하는 마휴, 여인이길 포기하고 전사로서의 삶을 살겠다 다짐한 가슴속에 한 남자를 들이고 번민하는 아라사,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온몸을 불태우는 마한의 공주 노아와 기자의 태자 설현……. 그 외에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적절히 배치되어 이야기의 흐름을 매끄럽게 하거나, 혹은 작지만 또다른 이야기를 담아내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독특하면서도 살아 있는 듯 매력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