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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고요하지 않다 1
이종찬 회고록 양장, 개정판
이종찬
한울 202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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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해방, 그리고 귀국

상하이에서 맞은 광복 / 상하이 교민 사회의 혼돈 / 임시정부의 씁쓸한 환국 / 처음 본 조국 / 오줌싸개의 첫사랑

2. 청소년 시절

백범 암살 1: “우리 선생을 쏜 게 저놈들이다!” / 백범 암살 2: “형님은 복도 많으시오” / 성재의 길, 백범의 길 / 한국전쟁 이야기 / 피난 중학교 시절: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배우다 / 고교 악동 시절: 낭만, 정의, 사랑 / 육군사관학교 면접에서 겪은 모욕: “소위 독립운동한 집안인가?”

3. 군문에 첫발을 딛다

육사 생도 시절: 좌절과 회의를 넘어 / ‘정치적 희생양’ 조봉암 / 얼마나 오래 기다리던 결혼이었나: 1960년 육군 소위로 결혼 / 4·19 혁명: 민심 폭발의 현장을 목격하다 / ‘장군 사모님’ 이야기 / 내가 본 5·16 군사정변 1: ‘쿠데타를 주동한 세력은 도대체 누구인가’ / 내가 본 5·16 군사정변 2: 배반당한 혁명

4. 역사의 현장들

유원식 장군과의 인연: ‘다혈질 행동가’와의 만남 / 통화개혁을 주도한 유원식: “우리의 제삿날은 같다”고 하더니 / 유원식 장군의 몰락: 권력 무상의 세월 / 육사 교육장교 시절 / 초짜 정보맨의 좌충우돌 모색기 / 동백림 간첩단 사건: 중앙정보부의 존재 이유를 거스르다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야, 이 새끼야! 왜 수가 이렇게 많아?”

5. 정치의 격랑 속에서

정치공작에 발을 담그다 / 휴머니스트 김지하 /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이후락: “우리는 모두 박정희교의 신도” / 이후락의 선거 공작: 김대중을 막기 위한 필사의 노력 / 이후락 실종: 홍콩에서 그와 함께 보낸 사흘 / 극비리에 진행된 7·4 공동성명: 이후락이 어느 날 영웅으로 출현하다 / 10월유신 선포: 호랑이 등에 올라탄 남과 북 / 박정희를 진노케 한 윤필용 사건: ‘유신 기수’들의 몰락

6. 운명의 날

김재규와 박 대통령의 인연: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기까지 / 고조되는 반발, 들끓는 민심: ‘박정희 제거’의 예견 / 박정희 최후의 날: 그것은 우발적 사고였다

7. 민주정의당 창당 막전 막후

이대용이 맺어준 전두환과의 인연 / 중앙정보부 숙정 / 국보위 설치, 그리고 ‘신당 창당’ 착수 / 뜻하지 않던 입법의원 진출: 청춘 바친 중앙정보부를 퇴직하다 / 조영래가 변호사가 되어 기뻤다

8. ‘민의의 전당’과 ‘51% 주의’

대표선수로 ‘정치 1번지’ 종로에 출마: “비겁하게 구시대 인물 내세우지 말고” /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선, 총선의 숨 가쁜 일정 / ‘초짜 원내총무’의 ‘51% 주의’ / 이철희·장영자 사건: “정의사회 좋아하네” 민심 폭발 / 아웅산 테러: 그 나라에는 도대체 왜 갔을까 / 종묘 앞 정비: ‘성매매 문제는 법으로 다스릴 수 없더라’ / 김영삼 단식과 민정당사 점거: 전환기의 풍경들 / 2인자 노태우, ‘호의’와 ‘악의’ 사이

저자 소개 1

이종찬의 90년 삶은 ‘대한민국 100년’ 궤적과 고스란히 함께했다. 그는 1936년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광복을 맞아 귀국한 뒤 운명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왔다. 독립운동, 해방 정국, 산업화, 민주화 등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의 현장에 참여하며 나라의 발전에 몸을 담았다. 이종찬은 이승만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까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관찰자인 동시에 참여자로 살아온 흔치 않은 경력을 가졌다. 그만이 가진 역사의 눈으로 한국 현대사를 증언한 결실이 바로
이종찬의 90년 삶은 ‘대한민국 100년’ 궤적과 고스란히 함께했다. 그는 1936년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광복을 맞아 귀국한 뒤 운명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왔다. 독립운동, 해방 정국, 산업화, 민주화 등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의 현장에 참여하며 나라의 발전에 몸을 담았다. 이종찬은 이승만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까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관찰자인 동시에 참여자로 살아온 흔치 않은 경력을 가졌다. 그만이 가진 역사의 눈으로 한국 현대사를 증언한 결실이 바로 이 회고록이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은 소년이 본 독립운동 현장의 일들과 해방 정국의 상하이, 그리고 귀국 후 혼란 시대에 대한 소년의 증언으로 시작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에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내 정치 세력 간의 동화 과정, 그리고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간의 갈등도 조숙한 소년의 눈으로 그려졌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육군 장교의 길을 선택했지만 조국의 현실은 그에게 충실한 군 지휘관의 경력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군의 이단처럼 된 혁명적 현장과 정보 세계(intelligence community)의 지하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1980년 이종찬은 정치인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광복 이후 구각(舊殼)으로 고착된 낡은 정치 틀의 혁파를 주장하며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고 허우적거렸다. 여기저기에서 받히고 몸부림치며 모색의 마지막 단계까지 가보았다. ‘진보적 보수’로 평가받기를 희망했지만 ‘태생적 보수’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 스스로의 평가다. 또 ‘정치 1번지’로 꼽히는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으로 4선을 했지만 성공한 정치인은 아니라고 냉정하게 자평한다. 2000년 이종찬은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일정 기간을 보내며 왕년의 한국 경제를 설계한 인사들과 함께 21세기 이 나라 발전의 새 그림을 그리고자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그런 그림을 그리기에 그는 너무 늦었던 것일까? ‘디지털 한국’이란 어떤 것일까? 21세기 한국의 먹거리로 ‘물류’가 해결책일까? ‘동북아 시대 한국의 새로운 길’은 무엇일까? 문제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마음에 드는 답은 찾지 못했다. 2010년 이종찬은 이제 자신을 정리하는 일이 급하다고 느꼈다. 그는 조부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기념사업을 본격적으로 다듬으며 조부의 혁명적 삶의 궤적을 찾아 나섰다. 소년 시대에 직접 지켜본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마주쳤던 문제들을 똑같이 느끼며 방황했다. 당초에 대한민국 역사를 정리하지 않고 대충대충 짚으며 갈 길만 재촉해온 것이 오늘의 실패를 낳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너희가 임시정부를 아느냐?” 청춘을 임시정부에 바친 한 여성 혁명가의 외침이었다. 우리는 이 말을 연극의 대사처럼 알아왔지만 그것은 피 울음이었다. 그래서 이종찬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운동에 뛰어들어 작지만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늦었지만 시초였다.

2023년 이종찬은 독립운동가들의 중심체인 광복회장에 도전해 어렵게 당선되었다. 그는 이제 스스로 부여한 마지막 과업, 즉 독립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고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야 진정한 나라가 이룩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 분투하고 있다. 1960년대 이래 역사와 더불어 어렵게 살아온 근면한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나라는 어느덧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몸이 비만해진 대신 뇌는 온통 빌려온 지식으로 꽉 채워졌다. 이를 다시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채우지 않으면 선진국은 아직 멀었다. 이종찬은 이를 위해 앞으로도 조금 더 역사를 정리해가려고 한다. 피로 쓴 역사를 다시 우리 것으로 우뚝 세우는 작업이다. 이게 그의 마지막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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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0월 25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484쪽 | 400g | 153*224*30mm
ISBN13
9788946083400

책 속으로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버지 이규학은 1910년 12월에 나의 할아버지 우당(友堂) 이회영을 따라 식솔 40여 명과 함께 지금의 지린 성 류허 현(吉林省 柳河縣)으로 망명하셨다. 엄동설한에 부녀자와 어린아이는 마차에 태우고 압록강을 건널 때 열다섯 살이던 아버지는 그 나이에 이미 직접 가족을 보살피셔야 했다. 할아버지는 누대로 내려온 재산을 정리한 돈으로 그 이듬해 논밭을 사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셨다. 독립운동에 무력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신 것이다. 당연히 아버지도 그 학교를 2기생으로 졸업하셨다. 그 이후 만주와 상하이를 비롯해 중국 대륙 곳곳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간 우리 집안의 이야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인네들을 비롯해 가족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필설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 p.21

백범 암살의 내막
나는 1949년 여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세 가지 사건, 즉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강제 해체’, 그리고 ‘백범 암살’ 음모가 모두 새로 등장한 공안 세력이 벌인 일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에 이승만의 사전 승인이 있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이승만 권력의 비호 아래 특수 조직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를 세칭 ‘88구락부’라고 했다. 이는 신성모와 같이 이승만의 직계에 해당하는 새로운 아첨 세력과 송진우·장덕수의 암살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한민당 세력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중간층으로는 일제하의 경찰과 군 출신들이 있었다. 즉, 반민특위 강제 해산 이후 반격을 받지 않기 위해 독립운동 세력을 뿌리째 제거하려 기회를 노리던 김태선, 김운하, 노덕술, 전봉덕 등의 경찰 세력과 일제에 충성을 바치다가 이제는 신생 대한민국의 군부를 장악하려 했던 채병덕, 원용덕, 김창룡, 장은산 등의 군 세력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상층의 정치 세력과 중간층의 군경 세력이 모두 이승만을 정점으로 신권력층을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그 하부선으로 김지웅, 홍종만 등이 외곽에 있고, 다시 그들의 하수인으로 안두희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음모의 개략적인 그림이었다.
--- p.66

육사 면접에서 겪은 모욕
나는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러고 나서 직접 육사에 가서 구술시험을 봐야 했다. 이때 필요한 서류가 추천서였다. 정부의 국장급 이상 공무원이나 군 장성의 추천이 필요했다. 나는 아버지의 동지이자 광복군 출신인 민영구 제독과 김관오 장군의 추천서를 받았다. 구술시험 당일 내 차례가 왔다. 면접관은 생도대장 이용 장군과 참모장이었다. 그들은 일본 지원군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민영구 제독과 김관오 장군을 어떻게 아는가?”
“그 어른들은 저희 집안과는 중국에 살던 시절부터 세교가 있던 분들입니다.”
나의 대답에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귀관의 집안도 소위 독립운동한 집안인가?”
상당히 경멸조의 반문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대답했다. 내심 뜨거운 분노가 치밀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에게 적의를 갖고 있는 듯했다. 면접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만약 불합격한다면 그것은 성적이 아니라 우리 집안이 독립운동 가문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몹시 실망했다. 동시에 나는 이 말을 부모님께 해야 할지, 나 혼자 되삼켜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모욕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에 들어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던 자들이 득세해 장군이 되고, 낯선 땅에서 목숨 바쳐 싸우던 독립운동가는 오히려 멸시를 당하는 이런 모순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 p.107~108

동베를린 사건 처리의 오류
동베를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지식인이 정신적으로 황폐해졌다. 많은 관련자가 그 후유증으로 일생을 불행하게 산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그들 중 상당수는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경계에 서서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경계인’이 아니라, 경계에 치어 매몰된 ‘반(反)경계인’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을 보면서 지식인들을 더욱 이성적으로, 나라의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다루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당시의 남한에 비판적이었던 만큼 그 이후의 북한에 대해서도 자기 할 말을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기 이전에 인권이 유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 자기 목소리를 잃었다.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졌던 것이다. 사전에 전혀 모르다가 임석진의 자수로 전모가 드러나는 바람에 체면을 구긴 김형욱의 광적인 분풀이 때문에 나라의 중요한 일꾼이 될 만한 분들이 일생을 망쳤던 것이다. 이는 개인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손실이기도 했다. 지금도 국정원이 이런 식의 우를 범하지 않기를 간곡히 원하는 것은 나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 p.217

민주정의당 창당
나는 과거 공화당을 사전 조직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새 정당을 사전 조직하는 일에 내가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나로서는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기회에 우리 정당사에 남을 만한 작품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역발상이었던 셈이다. 당시 나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 정당사는 여야가 해방 이후 일란성 쌍생아로 태어나 한 뿌리였다. 정강과 정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보수양당제는 시대 변화와 더불어 한계를 노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동안 기존 정당에서 소외되었던 제3세력들을 모아 개혁 정치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국민에게 신선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제3의 길, 이것이 신당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 불가피하게 사전 조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사후에라도 국민에게 납득시키고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발상이 당시 창당 멤버 전체의 생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허화평과 나는 이런 생각을 같이했다.
--- p.365

이종찬의 ‘51% 주의’
제11대 국회는 긴장되고 삼엄한 분위기에서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말깨나 하던 의원들은 모두 ‘정치풍토쇄신법’으로 묶이거나 정계를 은퇴했고 신인이 많은 국회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된 국회에서 여당 총무마저 경화된 태도를 취했다면 아마 의회민주주의는 작동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의 모토는 ‘51% 주의’였다. 여당은 51%에 만족하고, 야당에게도 49%의 역할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방침이었다. 이런 접근 방식 덕분에 국회의 토론의 장 기능이 다시 살아났고, 정부에 대해서도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여야가 51% 주의를 존중한다면 ‘국회선진화법’이 왜 필요할까.

--- p.428

출판사 리뷰

상하이 독립운동가의 집에서 한국 정치의 중심부까지
좌절과 절망 위에 도전과 희망으로 그려낸 풍경


이종찬의 90년 삶은 대한민국의 시간과 오롯이 함께했다. 그는 1936년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태어났다. 10대 소년 시절 광복과 함께 환국해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가 어려서부터 존경했던 백범의 갑작스러운 죽음, 곧이어 닥친 한국전쟁의 비극, 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몰락 등 정국의 극심한 혼란을 직접 목격하는 가운데 인생의 길을 가다듬게 된다. 이때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그의 조부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길을 따라 참여와 행동으로 나라의 진운과 함께할 방도를 모색하며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군에 봉사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정보’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이종찬은 1965년부터 1980년까지의 격변기에 국가 정보기관에 복무하며 수많은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각종 간첩단 사건과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락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보부의 선거 공작과 7·4 남북공동성명, 10월유신과 윤필용 사건, 10·26 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나라의 살림살이와 위기관리, 사회 각 분야의 운영과 소통, 대립하는 입장의 조율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고 체득했다. 그 과정에서 철저하게 ‘익명의 삶’을 살았다. 그는 세대를 앞서 그렇게 익명으로 살았던 조부 이회영의 정신과 삶이 자신에게서 똑같이 나타나는 것을 깨닫고 ‘역사의 계승’에 무거운 책무감을 가졌다.

이종찬은 1980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자 이를 적극 활용해 시대와 나라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치의 길에 나섰다. 제11대부터 제14대 국회까지 줄곧 서울 종로·중구 또는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민의의 엄중한 요구를 행동의 토대로 삼았다. ‘51% 의회주의자’를 자임한 그는 여당 안의 누구보다 국민 앞에 겸허했으며, 야당과의 대화에서 국회 운영의 가장 중요한 토대를 찾았다. 이 시절 그는 자신이 속한 민주정의당을 ‘민족의 정당’,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정당’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그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1990년 무원칙한 3당 합당과 1992년 변칙적인 대통령 후보 경선을 거치면서 이종찬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 10여 년 동안 몸담았던 당을 떠나 한국 정치의 미래와 자신의 행보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모색기를 보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쓰라린 좌절과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그동안 걸어온 길을 자유롭고 허심탄회하게 돌아보며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값진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모색은 귀중한 결실을 낳았다. 이종찬은 역사의 요청에 따라 1995년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했고, 마침내 1998년에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자신이 주장해 온 ‘수평적 정권 교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돌아와 이 기관의 개혁에 중요한 토대를 놓았다.

이종찬은 20년에 걸친 자신의 정치 인생에 대해 “‘진보적 보수’로 평가받기를 희망했지만 ‘태생적 보수’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4선을 했지만 성공한 정치인은 아니”라고 냉정히 자평한다. 하지만 그의 삶의 스펙트럼을 마주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런 겸손한 자평 너머에 그가 ‘자유인’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로서 걸어온 경이로운 행로와 만나게 된다. 그 행로는 결코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되 우리 사회의 상식과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며, 이종찬 개인의 꿈을 모두 실현한 것은 아니었으되 한 인간이 의지와 성찰과 결단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서 감당해야 했던 분투 과정의 어떤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종찬의 삶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숲을 가로지른다. 그래서 이 책은 이종찬의 삶을 돌아보는 사적인 기록인 동시에, 그가 큰 기대를 안고 때로는 그만큼 큰 좌절을 맞보며 몸소 부딪혀 온 대한민국 정치를 낱낱이 고하는 공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그의 조부 이회영이 그러했듯 이종찬은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삶을 살고자 분투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그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의 삶 역시 동시대의 대한민국 역사만큼이나 부침을 거듭했다.

이 회고록은 총 2권, 15개 장으로 구성되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간다. 1권(1~8장)은 해방 이후 귀국해 육군과 중앙정보부를 거쳐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던 시기까지 다룬다. 이어서 2권(9~15장)은 제12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시작해 직선제 개헌과 노태우 정권의 탄생, 3당 합당 이후의 방황, 그리고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고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국가정보원장에 취임해 이 기관을 개혁하는 시기까지 다룬다. 이번에 새로 출간하는 제2판에서는 ‘에필로그’를 통해 ‘1948년 건국절’ 논란에 대한 그의 통렬한 비판을 담았다.

이제 이종찬이 걸어온 길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가 그가 살아온 시간들의 연장선상에 놓인 우리의 미래를 가꾸는 데 작은 밑거름으로 쓰인다면, 이 책은 역할을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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