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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고요하지 않다 2
이종찬 회고록 양장, 개정판
이종찬
한울 202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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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9. ‘정치 복원’ 시대

2·12 총선에서 ‘민심의 홍수’를 만나다 / 전례 없는 개원 협상: ‘대화’로 ‘돌파구’를 마련하다 / 학원안정법의 희생양들 / 노태우, ‘박종철 사건’으로 경쟁자들 정리 / ‘6월 드라마’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 ‘대한민국’은 언제 ‘건국’되었나 / ‘지는 해’의 착각, ‘뜨는 해’의 술수 / “소선거구제는 망국적 제도!” / 정말 힘들게 오른 ‘3선 고지’ / ‘여소야대’의 뜨거운 맛 / ‘중간평가’로 정국 돌파하라 했건만 / 징검다리 ‘동해 재선거’

10. 망국적 3당 합당

‘허공의 메아리’ 혹은 역린 / 무력하게 지켜본 3당 합당

11. 민주자유당 대선 후보 경선

제14대 총선 참패와 김영삼의 ‘국면 뒤집기’ / 청와대의 ‘박태준 비토’ / 김종필의 밀약 / 민정계 후보 단일화 / 경선 전초전 / “김영삼과 김종필의 시대는 갔다” / 아내가 김옥숙 여사를 만나다 / 최후의 선택을 향해 /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

12. 새로운 모색

‘새정치모임’ 결성과 YS의 ‘백기 투항’ 요구 / ‘독립운동 세력이 왜 퇴조했는지 알겠다!’ / 신당 창당 작업과 김우중의 아리송한 행보 / 새한국당 창당: ‘수평적 정권 교체’를 위해 / 눈물의 합당 / 처절한 파탄 / ‘야당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 민주당 합류: ‘정치 초심’으로 돌아가기 / 1995년 지방선거의 명암

13.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15대 총선 패배를 딛고 대선기획팀을 꾸리다 / DJ 비서실장직을 고사하다 / 야권 단일화 작업에 끼어든 JP의 ‘정치적 음모’ / ‘DJP’를 넘어 ‘DJT’로! / ‘준비된 대통령’론으로 ‘비자금’ 파고를 넘다 / 외래형 책사 vs. 토착형 책사 / 마지막 고빗길 ‘외환 사태’

14. 헌정 사상 최초의 인수위 활동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의 나날들 / 사상 첫 정권인수위원회의 명과 암 / ‘국민의 정부’의 새 지평을 열다

15. 국정원에서 바라본 세상

17년 5개월 만의 귀향 / 북풍과 총풍의 전모 / IMF 사태에 자극받아 국제경제조사연구소 신설: 경제 시스템 붕괴되면 국가 안보도 동반 약화 / 북한 읽기의 어려움 / 국내정보에서 손 떼기는 쉽지 않았다: 방향 전환을 위한 시도와 시행착오 / 국가 정보기관장의 평양행: 그곳에는 무슨 좋은 것이 있을까 / 대우 해체의 막전 막후 /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야기 / ‘통신감청 논란’의 뿌리 /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저자 소개 1

이종찬의 90년 삶은 ‘대한민국 100년’ 궤적과 고스란히 함께했다. 그는 1936년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광복을 맞아 귀국한 뒤 운명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왔다. 독립운동, 해방 정국, 산업화, 민주화 등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의 현장에 참여하며 나라의 발전에 몸을 담았다. 이종찬은 이승만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까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관찰자인 동시에 참여자로 살아온 흔치 않은 경력을 가졌다. 그만이 가진 역사의 눈으로 한국 현대사를 증언한 결실이 바로
이종찬의 90년 삶은 ‘대한민국 100년’ 궤적과 고스란히 함께했다. 그는 1936년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광복을 맞아 귀국한 뒤 운명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왔다. 독립운동, 해방 정국, 산업화, 민주화 등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의 현장에 참여하며 나라의 발전에 몸을 담았다. 이종찬은 이승만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까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서 관찰자인 동시에 참여자로 살아온 흔치 않은 경력을 가졌다. 그만이 가진 역사의 눈으로 한국 현대사를 증언한 결실이 바로 이 회고록이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은 소년이 본 독립운동 현장의 일들과 해방 정국의 상하이, 그리고 귀국 후 혼란 시대에 대한 소년의 증언으로 시작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에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내 정치 세력 간의 동화 과정, 그리고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간의 갈등도 조숙한 소년의 눈으로 그려졌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육군 장교의 길을 선택했지만 조국의 현실은 그에게 충실한 군 지휘관의 경력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군의 이단처럼 된 혁명적 현장과 정보 세계(intelligence community)의 지하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1980년 이종찬은 정치인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광복 이후 구각(舊殼)으로 고착된 낡은 정치 틀의 혁파를 주장하며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고 허우적거렸다. 여기저기에서 받히고 몸부림치며 모색의 마지막 단계까지 가보았다. ‘진보적 보수’로 평가받기를 희망했지만 ‘태생적 보수’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 스스로의 평가다. 또 ‘정치 1번지’로 꼽히는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으로 4선을 했지만 성공한 정치인은 아니라고 냉정하게 자평한다. 2000년 이종찬은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일정 기간을 보내며 왕년의 한국 경제를 설계한 인사들과 함께 21세기 이 나라 발전의 새 그림을 그리고자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그런 그림을 그리기에 그는 너무 늦었던 것일까? ‘디지털 한국’이란 어떤 것일까? 21세기 한국의 먹거리로 ‘물류’가 해결책일까? ‘동북아 시대 한국의 새로운 길’은 무엇일까? 문제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마음에 드는 답은 찾지 못했다. 2010년 이종찬은 이제 자신을 정리하는 일이 급하다고 느꼈다. 그는 조부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기념사업을 본격적으로 다듬으며 조부의 혁명적 삶의 궤적을 찾아 나섰다. 소년 시대에 직접 지켜본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마주쳤던 문제들을 똑같이 느끼며 방황했다. 당초에 대한민국 역사를 정리하지 않고 대충대충 짚으며 갈 길만 재촉해온 것이 오늘의 실패를 낳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너희가 임시정부를 아느냐?” 청춘을 임시정부에 바친 한 여성 혁명가의 외침이었다. 우리는 이 말을 연극의 대사처럼 알아왔지만 그것은 피 울음이었다. 그래서 이종찬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운동에 뛰어들어 작지만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늦었지만 시초였다.

2023년 이종찬은 독립운동가들의 중심체인 광복회장에 도전해 어렵게 당선되었다. 그는 이제 스스로 부여한 마지막 과업, 즉 독립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고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야 진정한 나라가 이룩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 분투하고 있다. 1960년대 이래 역사와 더불어 어렵게 살아온 근면한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나라는 어느덧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몸이 비만해진 대신 뇌는 온통 빌려온 지식으로 꽉 채워졌다. 이를 다시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채우지 않으면 선진국은 아직 멀었다. 이종찬은 이를 위해 앞으로도 조금 더 역사를 정리해가려고 한다. 피로 쓴 역사를 다시 우리 것으로 우뚝 세우는 작업이다. 이게 그의 마지막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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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0월 25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572쪽 | 400g | 153*224*25mm
ISBN13
9788946083417

책 속으로

개헌과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
6·29 선언 이후 새 헌법안 작성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에게는 여러 가지 주문이 전달되었다. 특히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나를 직접 불러 이렇게 강조했다. “이번 기회에 임정의 법통을 잇는다는 내용을 반드시 헌법 전문에 명시해야 합니다. 이 일을 이 의원 말고 누가 하겠소. 현재 민주당안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는데, 민정당안은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어요. ‘정신’과 ‘법통’이라는 두 글자가 대단히 큰 의미의 차이를 낳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서 틀림없이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으로 반영해주시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다음 날 나는 헌개특위 위원인 허청일 의원에게 먼저 헌법 전문에 관한 각종 자료를 전달하면서 이 같은 입장을 반영해줄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허 의원은 그 문제의 심각성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약간 부정적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헌개특위 간사인 현경대 의원을 찾아가 같은 요구를 했다. 그는 이해가 빨랐다. “동감입니다. 저에게 맡겨주시지요.” 그제야 안심했다. 그리하여 1987년 10월 29일 채택된 현행 헌법의 전문은 아주 분명하게 정리되었다.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p.64~66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새로운 부훈, 그리고 ‘국가정보원’의 탄생 배경
개혁의 두 번째 과제는 부훈(部訓) 개정이었다. 안기부는 1961년부터 1998년까지 장기간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부훈을 지켜왔다. 이 부훈은 김종필 초대 부장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음지라는 말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는 나에게 “음지란 정보기관의 음산한 배후를 가리키는 것 같아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라고 했다. (……) 정보이론의 대가인 셔먼 켄트는 “정보란 지식이다”라고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부원들의 여론을 조사하고 켄트의 정의를 원용해 “정보는 곧 국력이다”라고 부훈을 정했다. 최종 결재 단계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곧’을 빼고 “정보는 국력이다”라고 고쳐 재가했다.

나는 지금도 이것이 아주 잘 된 작품이라 생각한다. 올바른 정보를 많이 가진 나라, 다시 말해 지식을 많이 축적한 나라야말로 부강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강한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 세계 인구의 0.2%밖에 되지 않는 유대 민족이 노벨상의 20%를 휩쓰는 것은 그들이 지식을 생산하고 축적하고 활용하는 일에 능하기 때문이다. 활어처럼 생생한 정보를 확보한 나라가 강한 나라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정신에 따라 부의 이름도 국가정보원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원훈부터 바꾸었다. 원훈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김대중 대통령 때 만든 것이라며 무조건 없앴다.
--- p.426~427

3·1 독립선언 100주년이 뜻 없이 지나쳤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전 정부의 ‘대책 없는 무조건 반일’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일본과의 안보 협력이라는 긴급 과제로 전전 일본의 죄악을 흐려버리는 작업을 하면서 대통령실이 거대한 친일 행각을 주동하게 되었다. 세상이 잘못되다 보니, 이제 일본에게 전전 책임을 묻는 건전한 사람들까지 반일종족주의자라고 노골적으로 조롱받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시기에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양심 있는 한국민은 무엇을 말해야 하나? 그뿐인가?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려는 노골적인 음모까지 진행되고 있다. ‘1948년 건국론’이 바로 그것이다. ‘건국절’은 해방 전후 기간에 명예롭지 못한 이력을 가진 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업고 자기들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공로를 지우고 마치 자신들이 건국의 공로자인양 부각시키려는 허욕에서 나온 짓인데, 우리 국민 중에 이를 인정할 사람은 없다. 이런 건국론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이 일본 신민(臣民)이었다고 부끄러움 없이 말하는 등 지금도 일본의 비위를 맞추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
--- p.563~564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이런 시기에 내가 광복회장이 되었다. 광복회는 여(與)도 아니고 야(野)도 아니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오로지 나라의 앞길을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고자 희망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단체다. 내년인 2025년은 을사늑약 체결로부터 120년, 해방과 광복이 된 지 80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년이다. 광복회도 창립 60주년을 맞는다. 광복회를 두고 일본을 적대시하는 단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피 흘려 싸운 선열들의 후손이 모인 단체라고 해서 지금까지도 일본과 적대적 관계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광복회는 진정으로 한국이 동북아의 모든 이웃 나라들과 호혜 평등한 마음으로 상호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특히 일본과는 유럽의 독일과 프랑스처럼 항구적인 화해와 협력, 평화적 관계로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광복회원 대부분은 일본을 향해 용서와 화해를 원하고 있다. 그러자면 일본은 적어도 독일만큼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광복회는 일본 국민에게 진솔한 우리의 희망을 전한다. 광복회관 정문에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라는 글이 새겨지는 날이 오기를 진실로 진실로 희원한다.

--- p.564~565

출판사 리뷰

상하이 독립운동가의 집에서 한국 정치의 중심부까지
좌절과 절망 위에 도전과 희망으로 그려낸 풍경


이종찬의 90년 삶은 대한민국의 시간과 오롯이 함께했다. 그는 1936년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태어났다. 10대 소년 시절 광복과 함께 환국해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가 어려서부터 존경했던 백범의 갑작스러운 죽음, 곧이어 닥친 한국전쟁의 비극, 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몰락 등 정국의 극심한 혼란을 직접 목격하는 가운데 인생의 길을 가다듬게 된다. 이때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그의 조부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길을 따라 참여와 행동으로 나라의 진운과 함께할 방도를 모색하며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군에 봉사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정보’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이종찬은 1965년부터 1980년까지의 격변기에 국가 정보기관에 복무하며 수많은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각종 간첩단 사건과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락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보부의 선거 공작과 7·4 남북공동성명, 10월유신과 윤필용 사건, 10·26 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나라의 살림살이와 위기관리, 사회 각 분야의 운영과 소통, 대립하는 입장의 조율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고 체득했다. 그 과정에서 철저하게 ‘익명의 삶’을 살았다. 그는 세대를 앞서 그렇게 익명으로 살았던 조부 이회영의 정신과 삶이 자신에게서 똑같이 나타나는 것을 깨닫고 ‘역사의 계승’에 무거운 책무감을 가졌다.

이종찬은 1980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자 이를 적극 활용해 시대와 나라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치의 길에 나섰다. 제11대부터 제14대 국회까지 줄곧 서울 종로·중구 또는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민의의 엄중한 요구를 행동의 토대로 삼았다. ‘51% 의회주의자’를 자임한 그는 여당 안의 누구보다 국민 앞에 겸허했으며, 야당과의 대화에서 국회 운영의 가장 중요한 토대를 찾았다. 이 시절 그는 자신이 속한 민주정의당을 ‘민족의 정당’,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정당’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그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1990년 무원칙한 3당 합당과 1992년 변칙적인 대통령 후보 경선을 거치면서 이종찬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 10여 년 동안 몸담았던 당을 떠나 한국 정치의 미래와 자신의 행보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모색기를 보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쓰라린 좌절과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그동안 걸어온 길을 자유롭고 허심탄회하게 돌아보며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값진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모색은 귀중한 결실을 낳았다. 이종찬은 역사의 요청에 따라 1995년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했고, 마침내 1998년에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자신이 주장해 온 ‘수평적 정권 교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돌아와 이 기관의 개혁에 중요한 토대를 놓았다.

이종찬은 20년에 걸친 자신의 정치 인생에 대해 “‘진보적 보수’로 평가받기를 희망했지만 ‘태생적 보수’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4선을 했지만 성공한 정치인은 아니”라고 냉정히 자평한다. 하지만 그의 삶의 스펙트럼을 마주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런 겸손한 자평 너머에 그가 ‘자유인’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로서 걸어온 경이로운 행로와 만나게 된다. 그 행로는 결코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되 우리 사회의 상식과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며, 이종찬 개인의 꿈을 모두 실현한 것은 아니었으되 한 인간이 의지와 성찰과 결단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서 감당해야 했던 분투 과정의 어떤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종찬의 삶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숲을 가로지른다. 그래서 이 책은 이종찬의 삶을 돌아보는 사적인 기록인 동시에, 그가 큰 기대를 안고 때로는 그만큼 큰 좌절을 맞보며 몸소 부딪혀 온 대한민국 정치를 낱낱이 고하는 공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그의 조부 이회영이 그러했듯 이종찬은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삶을 살고자 분투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그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의 삶 역시 동시대의 대한민국 역사만큼이나 부침을 거듭했다.

이 회고록은 총 2권, 15개 장으로 구성되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간다. 1권(1~8장)은 해방 이후 귀국해 육군과 중앙정보부를 거쳐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던 시기까지 다룬다. 이어서 2권(9~15장)은 제12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시작해 직선제 개헌과 노태우 정권의 탄생, 3당 합당 이후의 방황, 그리고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고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국가정보원장에 취임해 이 기관을 개혁하는 시기까지 다룬다. 이번에 새로 출간하는 제2판에서는 ‘에필로그’를 통해 ‘1948년 건국절’ 논란에 대한 그의 통렬한 비판을 담았다. 이제 이종찬이 걸어온 길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가 그가 살아온 시간들의 연장선상에 놓인 우리의 미래를 가꾸는 데 작은 밑거름으로 쓰인다면, 이 책은 역할을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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