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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스 슈타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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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자로서 홀로 서기
박진용
슈타커는 지휘자 라이너를 존경했고, 라이너 또한 슈타커를 친자식처럼 끔찍하게 아꼈지만, 마침내 이별의 시간이 닥치고 말았다. 라이너와의 마지막 연주가 되어버렸던 한 리허설에서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슈타커는 잠시 딴 생각을 품었다가 자신의 솔로 패시지를 놓치고 말았다. 라이너는 무시무시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고, 이것으로 그들의 동거는 끝이 났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지휘자들은 단원 위에 군림하는 신적인 존재였고, 연주자들은 지휘자의 한 마디에 일자리를 잃었던 시절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라이너의 독재는 더욱 악명이 높은 것이었다.
비록 갑작스럽게 찾아온 결별이기는 했지만, 슈타커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40년대 후반, 파리에 잠시 머물렀던 때부터 언젠가는 독주자로서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다져왔던 그가 아니었던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야노스 슈타커의 생애는 이 이후부터가 대부분이고, 그의 음악이 비로소 그 화려한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강한 보잉과 액센트를 앞세운 슈타커의 연주는 상당히 공격적인 모습이고, 첼로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부드럽고 구수한 음향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96년 그가 네 번째로 녹음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서는 완전히 변모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이전까지 이러한 해석 스타일을 오래도록 지속한 것은 슈타커에게 자신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확신은 대중 또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확고한 신념은 근대 첼로 연주사에 있어서 가장 큰 거목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파블로 카잘스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카잘스는 어린 시절의 슈타커에게 있어서 하늘과 같은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지만, 슈타커는 카잘스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한 때 카잘스가 연주했던 방식 그대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첼로의 연주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온 것이 사실이고, 연주 기술에 대한 한 분명히 나는 카잘스보다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학생들조차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첼로라는 악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 즉,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익혀야 합니다.' 물론, 슈타커가 카잘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이 세상의 것으로 다시 부활시키고, 또, 독주 악기로서의 첼로의 위상을 더할 수 없이 드높인 카잘스의 공적은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연주와 해석에 있어서만은 오직 카잘스만이 옳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산천의 모습이 바뀌듯 사람들의 생각도 변하기 마련이고, 오늘의 연주는 오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슈타커의 신념은 몇 백년간을 이어온 고전 음악이 옛 것에만 파묻혀 있는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동시에 음악의 미래 또한 예시해주고 있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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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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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부다페스트 출생으로 9살때부터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던 슈타커는 12살에 이미 첫 리사이틀을 준비할 수 있었을 정도로 빠른 성취를 보여주었다. 1945년, 음악원을 마친지 얼마 안된 20대의 슈타커는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연주자로 영입되었는데, 그의 연주 실력을 처음으로 공인 받는 순간이었다. 슈타커는 이 때부터 오케스트라에서의 연주와 더불어 실내악 활동도 병행했는데, 당시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인물들 또한 죄르지 세복 등과 같은 굵직한 인물들이었다. 1948년 그가 파리에서 들려주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실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국제적인 연주자로서 우뚝 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같은 해 슈타커는 미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게 되었고, 그가 처음 몸담은 곳은 댈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 물론 첼로의 수석 자리였다. 같은 헝가리 출신 지휘자로 시카고 심포니를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재 탄생시켰던 프리츠 라이너는 슈타커의 재능을 일찌감치 감지한 인물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이 라이너의 소개로 1949년에는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수석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1953년부터 1958년까지는 라이너의 시카고 심포니에 합류하여 그 인연을 이어갔다. 슈타커는 시카고 심포니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라이너와 함께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매 번의 연주와 리허설은 그 때마다 무언가 한 두 가지씩 배울 것이 있었던 수업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각종 콩쿨을 통해 각자의 경력을 쌓고, 독주자로서의 이름을 얻는다. 그 후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입증하면, 음반 회사와의 녹음 계약이 뒤따르고, 이것으로서 그의 명성은 어느 정도 유지된다. 이런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독주자는 오로지 혼자서 열심히 기량을 다진 독주자일뿐, 다른 분야에서의 연주 경험은 전무하다시피 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슈타커의 경우는 아주 달랐다. 독주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오케스트라에서 함께 연주하는 법을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슈타커의 연주는 예리하게 각이 진 곳이 많고, 강렬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자신만의 독선보다는 모두를 아우르는 포용력을 지닌 따뜻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분명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 오케스트라 경력 덕분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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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코스모폴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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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으로 동유럽의 진한 피를 이어받기는 했지만,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할 무렵인 24살 때부터 미국으로 이주하였기에 음악 인생의 대부분은 미국을 근거로 이루어졌다. 미국으로 거처를 옮겼던 많은 동유럽 출신 연주자들이 언어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슈타커는 미국 이주 이듬해인 1949년에 벌써 매우 유창한 영어 실력을 보임으로서 오케스트라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다고 한다. 부리부리한 눈과 짙은 눈썹이 연출하는 강렬한 인상과 시원시원한 그의 성격은 배우 율 브린너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동료들은 전하고 있다.
이런 국제적인 감각은 학창 시절 무렵부터 유명했던 것이다. 외국의 문물들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끊임없는 호기심과 관심을 보였던 것이 슈타커의 코스모폴리탄적 기질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가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재학할 당시, 우리 '애국가'를 작곡했던 안익태 선생 또한 이곳에서 유학 중이었으며, 공교롭게도 같은 스승의 문하에 있었는데, 한국이라는 동양의 조그만 나라에 대해 계속 관심을 보이는 그에게 안익태 선생은 '한국 여자와 결혼해서 한국에서 살아보아라'고 권할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대한 슈타커의 관심은 그 후에도 식지 않았고, 안익태 선생, 또, 임원식 선생들과의 친분 등으로 인해 무려 여덟 번이라는 내한 공연 기록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표현을 인용하자면 야노스 슈타커야말로 대표적인 '지한파' 연주자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