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가격
21,900
19 17,800
YES포인트?
180원 (1%) 마니아추가적립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최대 1,000원 적립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The Greatest Memory

음반소개

디스크

CD 1

  • 01 ~03. Brahms :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77
  • 04 ~06. Mendelssohn :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64

CD 2

  • 01 ~04. Bach : Sonata for Violin Solo No.1 in G minor BWV1001
  • 05 ~09. Bach : Partita for Violin Solo No.2 in D minor BWV1004
  • 10 ~13. Bach : Sonata for Violin Solo No.3 in C major BWV1005

아티스트 소개 1

연주Nathan Milstein

관심작가 알림신청
 

나탄 밀스타인

바이올린 연주자

Nathan Milstein의 다른 상품

violin : Nathan Milstein

품목정보

발매일
2004년 04월 24일
시간/무게/크기
134g | 크기확인중

전문가 리뷰

실버 톤의 귀공자
박진용
흔히, 밀스타인을 일컬어 바이올린의 귀공자라고들 한다. 그가 이런 자랑스러운 별명을 획득하게 된 것은 '실버 톤'으로 표현되고 있는 고상하고 윤택한 울림의 색채, 또, 연주의 기술적인 측면과 음악의 감성적인 측면 사이에서 정확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훌륭한 균형 감각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은 청중들의 표피적인 만족감을 건드리는 과도한 비브라토를 빈번하게 사용하기 일쑤였는데 반해 밀스타인은 작품 깊숙이 파고 들어가 그 아래에 깔려있는 정서들을 낱낱이 펼쳐 보이는 연주를 고수함으로서 청중들에게 인기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보다는 같은 연주자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연주자가 되었다.
밀스타인이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는 그의 연주가 지니고 있는 품위와 고고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할만한데, 당시 그 어떤 바이올린 연주자도 바흐의 이 작품을 밀스타인만큼 적나라하게 연주하지는 못했다.
기술적인 것은 물론이고, 동시대 연주자들로부터 몇 걸음 앞서 나아가는 독특한 해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하게 만들어 나아갔던 밀스타인의 긴 연주 인생은 1987년 갑자기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에리히 라인스도르프의 지휘로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을 마친 직후 사고로 인해 그의 오른 팔이 부러져 버렸고, 그 오른 손으로 다시는 활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평범한 유태인 가족의 천재
.
1903년의 마지막 날, 러시아 오데사의 한 평범한 유태계 가정에서는 나탄 미로노비치 밀스타인이라는 아들을 보았다. 다른 신동들과는 달리 그의 부모들은 음악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인물들이었으나, 밀스타인이 타고난 음악적 재능은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것이었다. 이 오데사라는 도시는 후일,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그리고, 에밀 길렐스 등의 걸출한 연주자들을 계속 배출해내기도 했는데, 이 곳의 환경이 풍수지리학적으로 음악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한 번 조사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듯하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시기 또한 여타 천재 연주자들보다 훨씬 늦은 때였다. 밀스타인은 후일 그의 자서전에서 '어머니가 내게 바이올린을 배우게 한 것은 동네 아이들과 싸우고 다니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우스갯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정작 그의 어머니에게 자극을 가한 것은 1911년에 보았던 하이페츠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보다 고작 한 살 위인 꼬마가 바이올린을 그토록 잘 연주하는 것을 본 어머니라면 누구라도 그러했을만하다.
표트르 스톨야르스키로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배우기 시작한 밀스타인의 성취는 실로 눈부실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무대에 설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밀스타인이 보여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신감은 남다른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915년, 유명한 러시아 출신 작곡가인 글라주노프의 50세 생일 기념 음악회에서의 일화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작곡가 자신이 직접 반주를 맡았던 이 공연에서 글라주노프는 너무나도 거침없이 바이올린 독주 파트를 밀고 나가는 어린 독주자에게 '너는 내 연주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니?'라고 물어 보는 등 여러 가지로 달래보았지만, 밀스타인의 대답은 놀랍게도 '저는 원래 악보에 있는 대로만 연주한 것인데요'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글라주노프는 결국 어린 독주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반주를 맞추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직접 작품을 만든 이조차도 굴복시킬 정도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 방식을 끝까지 고수하는 밀스타인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후일 모든 지휘자들과의 관계에서도 계속되었다. 밀스타인의 해석이 비록 독창적인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아예 작품의 진정한 모습과 동떨어진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그는 절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16년 그의 첫 스승이었던 스톨야르스키는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큰그릇이라는 판단 하에 밀스타인을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소개한다. 아우어가 누구인가. 러시안 바이올린 스쿨의 지주로 야샤 하이페츠, 미샤 엘만, 에핌 짐발리스트 모두를 키워 낸 명 조련사가 아니던가. 그러나, 밀스타인의 회고에 의하면, 아우어에 대한 그의 기억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밀스타인에 의하면 아우어는 이미 더 이상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성된 연주자들만을 제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페쩨르부르크 음악원 시절, 스승에게서보다는 함께 연주하던 기라성 같은 동료들로부터 얻은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아우어에게 받은 좋지 않은 인상은 그가 직접 찾아가 한 수 지도를 부탁했던 위르젠 이자이와의 만남 이후 더욱 확고해져 갔다. 밀스타인의 부탁을 받은 이자이는 '내가 보는 견지에서 자네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네. 바흐마저도 잘 연주하지 않는가' 라도 대답했다고 한다.
평생을 동료로서 함께 활약했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의 만남 또한 이 즈음의 일이다. 1921년 처음으로 만났던 두 사람은 첫 대면에서부터 상대방의 음악에 크게 감명을 받았고, 두 사람은 '소비에트 혁명 청년들'이라는 기치 아래 러시아 전국을 누볐고, 이들의 활동에 크게 고무되었던 트로츠키는 서방 세계에 이들의 존재를 알림으로서 소비에트 연방의 문화적 성취를 자랑하고자 했는데, 스탈린의 정권 쟁취와 함께 사태가 급변하자 이들 두 사람은 조국으로의 귀환을 포기하고, 유럽에서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한다. 호로비츠는 후일 조국 땅을 다시 밟을 기회가 있었지만, 밀스타인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인 템포'와 악보 그대로의 해석을 평생 실천해왔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1936년에 있었던 뉴욕 필하모닉과의 마지막 공연을 위해 직접 밀스타인에게 독주를 부탁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를 하는 단원을 그 자리에서 바로 해고시키는 등 괴팍하기로 유명한 토스카니니가 밀스타인을 선택했다는 것은 밀스타인의 해석이 또 다른 독창적인 길을 제시하는 것일 뿐 틀린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보증서이기도 하다.
토스카니니와의 만남 이후, 밀스타인은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세계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서 초청장이 날아들었고, 음반 녹음 또한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멩겔베르크, 푸르트벵글러, 크나퍼츠부쉬 등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으며, 쇤베르크, 알반베르크, 하르트만 등 빈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20세기 현대 작곡가들 또한 밀스타인의 열렬한 팬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거장 시대의 마지막 귀공자
.
1992년 12월 21일, 뉴욕 타임즈는 20세기 바이올린 연주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나탄 밀스타인의 부고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야샤 하이페츠는 보다 정열적인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지만, 너무나 차가와 인간의 섬세함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음악가 정신에 보다 투철하고, 레퍼토리의 폭 또한 훨씬 넓었던 요제프 시게티가 있었지만, 울림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밀스타인을 따라가지 못했다. 밀스타인이야말로 기술과 음악적인 면 모두를 조화롭게 융합시킨 완전한 음악인이었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 1979년 11월 6일의 뉴욕 타임즈를 또 인용해보자. 저명한 음악평론가 아놀드 숀버그는 전날 밤 카네기 홀에서 있었던 밀스타인의 리사이틀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마지막 남은 진정한 러시안 스쿨 바이올린 거장의 모습을 보기 위해 음악가들이 모두 집합한 것 같았다. 이자크 펄만과 같은 독주자들, 그리고 그날 밤 연주가 없는 모든 오케스트라 주자로부터 줄리아드, 커티스 음악학교의 예비 연주자들까지 이날은 마치 바이올린 연주자 컨벤션과 같은 밤이었다.'
1979년은 야샤 하이페츠, 미샤 엘만, 에핌 짐발리스트 등 20세기를 밝혀 왔던 바이올린의 거장들이 이미 타계하거나 더 이상 연주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밀스타인, 그리고 메뉴힌 정도가 거장 시대를 추억하게 하는 마지막 주자들이었던 것이다. 사실, 당시에 벌써 일흔을 훨씬 넘기고 있던 밀스타인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전성기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던 그런 시기였다. 그러나, 이날 모여들었던 대부분의 청중들은 밀스타인 특유의 매끄럽게 반짝이는 톤과 주름지지 않은 에너지 넘치는 연주를 듣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거장의 보잉은 아직 녹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리뷰/한줄평0

리뷰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