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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 도시와 시골
2. 주민 : 시민, 거류외국인, 노예 3. 여성, 결혼, 가정 4. 아이와 교육 5. 이로가 직업 6. 몸치장과 의복 7. 식사, 놀이, 여가생활 8. 종교생활과 연극 9. 법과 정의 10.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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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 대한 환상을 깨는 책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고 말했다. 소극적으로는 모든 역사는 현대의 시각에서 조명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지만, 적극적으로는 역사가 현대의 시각에 맞게 ‘창조’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서구가 근대 선진문명의 종주가 되면서 서구문명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의 역사도 새롭게 창조되었고, 고대 그리스는 모든 인류가 돌아가야 할 ‘이상향’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선진성은 현대 서양 문명의 선진성과 궤를 같이 하는 합리적 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고대 그리스와 같은 선진적인 문명에서 서양문명과 같은 선진적인 문명이 탄생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고대 그리스 문명에 대한 환상이 탄생했다. 고대 그리스는 그 어느 대상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완벽한 민주주의의 전형을 제시했다든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들’과 스토이학파의 현인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고대 그리스의 도덕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위에 있다든지, 그리스인들은 인간 이성의 독립적인 힘을 전적으로 믿는 이성주의자인 동시에 낙천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에 대한 이러한 환상이 과장된 사실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이상향이 아닌 삶의 비극과 고통이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고대 그리스를 복원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모든 것 2천년을 뛰어넘는 시간적 거리가 있는 ‘고대 그리스의 생활상’을 상세하게 복원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을 그리스문학과 역사를 연구하는 데 바친 저자는 방대한 자료를 통해 세세하게 당시의 생활상을 밝혀낸다. 이 책에는 결혼, 가정, 교육, 주거, 종교, 전쟁, 장례, 성(性), 일, 직업, 위생, 의복, 무역, 의료행위, 스포츠, 축제, 연극, 정치, 법, 식생활 등 고대 그리스에 관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 책은 한마디로 고대 그리스에 대한 백과전서이다. 이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의 생활상 뿐 아니라 그들의 정신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시공간적 배경 이 책의 시공간적 배경은 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한 큰 위기가 지나간 기원전 450년경에서부터 캐로니아 전투(기원전 338년)가 시작되기 전인 기원전 350년까지의 아테네이다. 그 중에서도 ‘페리클레스가 통치하던 시대’를 중심으로 한다. 이 시기는 고대 그리스의 특징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최고 전성기였다. 또한 아테네는 고대인들도 ‘그리스 중의 그리스’로 여길 정도로 그리스라고 불릴만한 특징을 가장 잘 갖추고 있었다. 독자들은 이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를 이해함으로써 고대 그리스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페리 클레스는 외교상으로는 페르시아, 스파르타 두 강국과 평화조약을 맺는 한편, 델로스동맹의 지배를 강화해 동맹을 맺은 여러 도시는 거의 모두 아테네의 속국이 되었다. 그때부터 아테네는 제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정이나 사실은 1인 지배라 할 만큼 페리클레스는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며, ‘지상의 제우스’라 불렸다. 아테네는 민주적인 도시였는가? 우리는 흔히 스파르타는 전체주의적인 도시이고 아테네는 민주적인 도시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아테네에 비해 스파르타가 상대적으로 더욱 전체주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테네가 전체주의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고대 도시는 기본적으로 전체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아테네 역시 시민의 자유를 제한했고 외국인들은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여 더욱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 외국인들은 주로 전쟁포로인 노예들이었다. 정치적 권리를 갖고 도시 행정에 참여한 남자들의 수는 전체 주민 중 2/5에 불과했다. 수공업자와 상인에 대한 편견은 심했으며, 극소수에게만 참정권을 인정한 민주주의는 오히려 귀족주의와 비슷했다. 고대 도시의 권력자들은 어느 구성원에게도 큰 자유를 주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활동을 독점하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시민들은 정치적,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종교적 관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아테네에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있었는가? 고대 그리스에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거의 없었으며 특히 신에 관한 부분에서는 전무했다. 세속 권력과 교권의 구분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무신론을 표방하는 자들은 도시의 법과 질서를 위반하는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의 여러 철학자들이 불신앙을 이유로 소송당한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소송이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도시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을 들여오려고 했으며,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한마디로 신성모독이 그의 죄목이었다. 그보다 앞서 페리클레스의 스승인 클라조메나이의 아낙사고라스, 아브데라의 프로타고라스, 밀로스의 디아고라스 등 아테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세 명의 외국인들도 불신앙을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같은 비극작가들 역시 그러한 기소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아테네인들은 평화를 선호했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독재보다 더 평화로운 체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민주주의가 과연 독재보다 평화로운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생각과는 달리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 민주주의는 아주 호전적이었고 영토 팽창욕구와 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아테네의 수없이 많은 노예사냥과 정복욕에 불타는 페리클레스의 제국주의, 잔인한 폭동진압을 읽을 수 있다. 아테네는 모든 그리스 도시 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도시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몰인정한 도시, 간단히 말해 ‘전체주의적인’ 도시이기도 했다. 흔히 우리는 종교가 평화의 정신적 이데올로기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리아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대인들이 적군을 포로로 잡은 것은 나중에 이들을 죽여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포로를 이용해서 적당한 몸값을 얻어내기를 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신들은 사람들이 약속한 인간 제물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심지어는 적군이 완전히 항복했는데도 학살을 자행하는 잔인한 일도 벌어졌다. 도시 전체를 점령하면 노인, 부녀자, 아이들 역시 가차 없이 살해했다. 목숨을 건진 사람은 노예로 팔려갔다. 이것은 종교가 인정하는, 아니 종교가 요구하는 전쟁의 오랜 규칙이었다. 아테네인들은 도덕적이었는가? 아테네에 대한 환상 중 하나는 아테네인들이 매우 도덕적이고 점잖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사실과 다르다. 종교축제 기간에는 디오니소스를 기리기 위한 연극이 상연되었는데, 여자들은 정숙함을 존중하지 않는『리시스트라타』같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의 아주 상스러운 내용에 재미있어하며 파안대소하곤 했다. 30년 동안 계속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은 풍습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국민의 도덕성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부자들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돈이 없던 사람들이 거액의 돈을 상속받는 것과 같은 갑작스런 인생의 부침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전이라면 숨겼을 쾌락을 드러내놓고 즐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 재산과 목숨이 모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즉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했으며 오직 쾌락에만 관심을 쏟았다.” 많은 아테네 여성들은, 집에 틀어 박혀 있는 시간이 훨씬 적고 남자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스파르타 여성들을 본 따 좀더 자유롭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한 무질서를 막기 위해 문란한 성행위를 감독하는 특별 행정관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 유명한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당시 탄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세태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계급과 출신을 구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태도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일반적인 도덕규범이 아니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따르는 의사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시대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고대 그리스의 도덕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들’이 보여주었던 도덕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고상하고 선량한’(칼로스 카가토스) 아테네사람, 훌륭한 가문 출신의 신사는 아름다움과 미덕, 추함과 악덕을 구별할 줄 알았고, 당연히 모든 거짓된 행동과 비열한 행동을 멀리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인 도덕은 주위 사람들의 평판을 의식한 도덕이었던 만큼 양심적 기반이 허약했다. 아테네인들은 삶을 사랑했는가? 이제까지 많은 작가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인의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해 말해왔다. 삶에 대한 사랑과 긍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을 삶에 대해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참모습을 상당히 왜곡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과 정반대이다. 그들은 삶이 힘든 것이며, 냉혹하고 질투심이 많은 신들이 우리에게 기쁨보다는 고통을 더 많이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또한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자신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침해할 수 없는 인간의 유일한 선인 관대함 밖에 없으며 이 관대함 덕분에 불운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시각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이후 계속되었다. 테오그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행복 중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태어났던 적이 없고, 강렬한 태양 광선을 본 적이 결단코 한 번도 없는 것이다. 혹은 일단 태어났다면 가능한 한 빨리 하데스의 문을 건너 땅이라는 두꺼운 수의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헤로도토스 역시 ‘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요절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비극의 합창에 다음과 같은 충고가 여러 차례 나온다. “죽기 전에는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신이 그에게 무엇을 예정해 놓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에우리피데스는 테오그니스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우리는 그토록 많은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 태어난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하며, 반대로 세상을 떠나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는 기쁨의 노래를 불러줘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비참한 노예의 생활 당시 노예를 얻을 수 있는 주된 방법은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패하고 목숨을 부지한 전사는 승리자의 노예가 되었으며 친지들이 적당한 몸값을 지불할 수 없는 경우 계속 노예로 남아야 했다. 한 도시가 점령당한 경우에는 죽임을 당하지 않은 모든 거주자들이 노예로 전락했다. 투키디데스는 이렇게 증언한다. “아테네사람들은 무기를 들 수 있는 나이의 밀로스 섬 주민을 모두 죽였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 밀로스 섬 주민들이 그리스인이라는 점이다. 아테네인들은 같은 그리스인들 조차 노예사냥을 했던 것이다. 평화로운 시기에도 노예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많았다. 심지어 가장이 자기 아이들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가장에게는 아이들을 팔 권리가 있었다. 일자리가 없어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노동자 계층 역시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주인에게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되곤 했다. 의사인 메네크라테스는 만약 회복되면 의사의 노예가 되겠다는 계약을 맺는 경우에만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철학자 플라톤도 하마터면 노예가 될 뻔 했다. 기원전 388년 플라톤은 당시 시라쿠사를 통치하던 디오니시오스의 손님 자격으로 시칠리아에 갔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디오니시오스와의 의견 대립으로 사이가 틀어지자 그는 강제로 스파르타 선박에 올라야 했는데 그 배의 선장은 아이기나에서 플라톤을 노예로 팔 작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떤 키레네 사람이 플라톤을 사서 그를 친구들과 철학에 되돌려주었다. 이런 일화는 당시 얼마나 납치가 빈번했는지를 알려준다. 심지어 노예들은 성생활도 통제받았다. 아이가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랄 때까지 오랜 기간 동안 아이를 부양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노예들끼리 가족을 이루는 것을 허락하는 경우는 새로운 노동력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충직한 노예들이 계속 자기 곁에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테네의 사형제도 아테네에서 제일 빈번하게 행해진 사형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아테네에는 구멍이 다섯 개 뚫린 나무로 만든 기구’가 있었다. 다섯 개의 구멍은 목과 사지를 죄는 조임쇠를 연결하기 위해 뚫어놓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을 완전히 벌거벗긴 후 다섯 개의 조임쇠를 이용하여 땅 위에 세워 놓은 말뚝에 매달아 두었다. 그 상태로 죄인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는 십자가형과 유사한 방법이었다. 차이점은 십자가형에서는 조임쇠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손과 발에 못을 박았으며 이로 인한 출혈로 인해 고통의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 형벌에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장치 중 하나는 아래턱을 꽉 죄는 쇠고리였다. 쇠고리를 달고 있으면 신체의 하중으로 인해 고통이 아주 심했다. 이 사형 집행 방식은 고전시대 내내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4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사형수를 돌로 때려죽이는 투석 형벌은 입증된 예가 드물긴 하지만 반종교적인 사람과 반역자에게 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형벌은 국가에서 직접 집행하는 경우보다는 격분한 국민들이 직접 실시하는 일종의 약식 처형과 같았다. 몸을 사슬로 묶어 말뚝에 고정시켜 놓는 형벌은 주로 해적과 도둑질 따위의 저속한 범죄를 저지르다 현장에서 붙잡힌 범죄자에게 집행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그리스의 동성애가 군대에서 시작되었다. 동성애는 처음에 ‘군인들 간의 동지애’ 형태였다. 이런 형태의 동성애는 적어도 헬레니즘 시대 중반까지 계속되었고 아테네보다는 옛것을 고집하는 도리아 국가에서 이런 형태가 더욱 잘 지켜졌다. 그리스 도시국가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처럼 아주 발전한 도시조차도 여전히 ‘남성들의 클럽’, 여성에게는 금지된 ‘남성들만의 닫힌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는 남자(에라스테스)와 12세부터 18세까지의 청소년(에로메노스) 사이의 열정적인 애착이 용기와 영예라는 고귀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 있었던 그 유명한 테베의 ‘신성부대’는 ‘특별한 우정’을 통해 유지되고 더욱 단단해진 집단적 용맹의 전형적인 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체육학교에서 남자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운동을 했다. 이것 또한 남색을 조장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어린이와 에페보스를 묘사한 그림 단지 중 상당수에는 ‘아름다운 소년’에게 바치는 칼로스 타입의 헌사가 쓰여 있다. 그리스 세계의 일부 지역과 특정 시대에서는 ‘남자들만의 클럽’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여자들만의 클럽’이 탄생했고 남성들의 동성애에 대응하는 사피즘, 즉 여성들의 동성애가 생겨났다. 사포는 기원전 5세기에 레스보스 섬에서 활약하던 위대한 시인이자 교육자로 고대 비평가들은 그녀를 거의 호메로스와 같은 수준으로 평가했다. 사포는 일종의 ‘젊은 여성을 위한 교양 학교’를 운영했는데 이 학교에서 여교사와 여학생들이 매우 특별한 우정 관계를 형성했다. 고대 그리스의 일반적 동성애 성향은 인간이 본능의 문제에까지도 얼마나 문화적인 영향을 강력하게 받는가를 말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