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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아이들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을 열어야―영등포역 노숙인들의 2003년 봄 여든일곱 살 할머니의 집 한 인간은 곧 자신에게는 진실이며―중국에서 온 한 사람의 이야기 이 여자의 사진첩―여성 농민 윤금순을 만나서 다시 꿈꾸기 위해―노동조합이 사라진 자리,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로 홀로 선 사람들 두 사회를 사는 사람―탈북자라는 이름, 장철봉 씨를 찾아서 43년 세월 속에 묶인 이야기들―비전향 장기수 안학섭 선생 이야기 기나긴 싸움, 희망을 모은 천막― 대우자동차판매노동조합 전병덕 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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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들은 우리 곁에 있으나 우리가 그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는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다 쓰러져가는 집의 차가운 방 안에 앉아 복지센터에서 1주일에 두 번씩 나누어주는 도시락에 묻어오는 사람의 온기를 기다리는 독거노인이 되어 있고, 우리가 낳은 아이들은 악순환되는 빈곤의 사슬 속에서 제대로 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그리고 주변의 무관심과 폭력에 노출된 채 오늘도 미로처럼 얽혀 있는 골목을 빠져나가는 꿈을 꾼다. 또한 나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거리의 노숙자로 전락하여 왕년의 좋았던 시절을 한잔 술에 녹여 하루를 살아가는 양식으로 삼으며, 자신에게도 아직 미래가 남아 있기를, 한 사람의 자식이자 부모로서 다시 일어설 기회가 주어지기를 꿈꾼다. 새 인생을 찾아 중국에서 한국으로 온 한 여인은 ‘조선족’이라는 이름 앞에 40여 년간 땀과 노력으로 일구어놓은 인생을 모두 부정당하기도 하고, 또 삶과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희망의 한쪽 끝을 단단히 그러잡고 있다. 이 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밖에 설 자리를 갖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잠시도 쉴 여유가 없어도, 내 가족과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나눌 수 있는 작은 공간에 대한 꿈을 꾸며 고된 하루를 이겨나간다.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 중에는 부모 한쪽이 가출하거나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많다. (……) 부모가 다 있어도 싸움이 잦거나 알코올에 중독된 경우가 많다. 한쪽 부모가 없는 아이를 보면 싸우는 엄마 아빠라도 다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부모 싸움에 우는 아이들을 보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른이 만들어놓은 아이들 삶이 생각처럼 단순하지는 않다. (……) 분노에 에워싸인 이혼 과정을 지켜보며 아이들은 힘들기만 하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항상 풀 죽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저희들끼리 웃고 장난하고 뛰고 싸우고, 하여튼 조금이라도 지루해지기 전에 움직인다. 세상이 지루해진 어른들에 비하면 아이들은 건강하다. 가슴 한쪽에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버림받은 외로움과 서러움, 분노가 자리 잡고 있어도.(“변방의 아이들” 중에서) 할머니는 생활보조금을 받아 산다. 액수는 점점 줄어 지금은 매월 19만 6000원을 받는다.(……) 웬만한 사람들한테는 한 달 용돈도 안 될 돈이 할머니한테는 큰 생활비다. (……) 누군가한테는 하루 유흥비도 안 될 돈. 그런데 할머니는 근 몇 달간 그 돈에 쪼들렸다. “지난 10월에 몇 달치 교통비까지 합해서 35만 원 탔는디 10원도 안 남기고 없어졌어. 아침도 안 먹고 은행 가서 돈 찾아와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 밥 한술 뜨고보니 아무것도 없어. 가슴서 뭐가 우쭉 올라오더라고. 앞으로 살 일 생각하니 막막하지. 혼자 살아도 크나 작으나 살림은 살림이잖여. 그 돈, 세어나 봤간디. 다 잃어버렸으니 어떻게 해. 내가 그 돈 쓸 목표도 두었지. (……) 더운 기가 확확 나고 얼굴이 벌개지고, 숨통이 막히더라고.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네. 까짓것 사람도 죽고 사는데 내가 큰돈이지 뭐, 딴 사람 같으면 술 한 잔 값도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근데 그 마음은 금방이야. 그 마음은 1초도 못 가. 그래서 내가 더 속병 들었나 봐. 교회에 가서 이런 기도를 했어. 아버지 하나님,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가져갔지 더 나은 사람이 가져가진 않았을 테니 수해로 집도 절도 없는 사람한테 다만 천분지 일이라도 현금으로 나가게 해주라고 기도했다니까. 옆에서 교인이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지금 할머니가 옳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유, 그른 마음을 가지고 있어유 그렇게 묻더라니께. 비단조각보다 더 깨깟하고 옳은 마음이지 무슨 소리래유 그랬지. 웃대.”(“여든일곱 살 할머니의 집” 중에서). 탈북자라는 신분으로 이 땅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지만, 비전향 장기수라는 꼬리표를 달고 인생의 3분의 2를 감옥에서 보내야 했지만,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에 맞서 몇 년을 천막에서 농성하며 고달프게 투쟁해야 했지만, 이들이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와 우리’, 그리고 ‘세상’에 대한 ‘희망’이 삶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 ‘희망’이란 삶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세상이 계속해서 나를 외면하더라도 ‘나’와 함께 가는 ‘우리’가 있는 한 외롭지 않은 길이다. 장철봉 씨는 이 땅에서 산다. 그리고 이 땅을 사랑한다. 그가 사랑하는 땅은 온전한 한반도일 것이다. 노래도 있듯이 백두에서 한라까지. 어떤 이들은 이 좁은 땅, 지긋지긋한 삶을 버리고 어디 다른 나라로 훌쩍 날아가고 싶어 하기도 할 것이다. 장철봉 씨는 땅이 넓은 나라는 바다 한 번 보려면 몇 날 며칠을 가야 하지 않느냐며, 나무를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땅도 있지 않느냐며 우리는 봄에 새싹이 피어나고 꽃이 피는 예쁜 모습을 볼 수 있고, 바다를 보고 싶으면 몇 시간 달려가면 볼 수 있고, 단풍 드는 산에 가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 이 좁은 땅에서 다 할 수 있는데 얼마나 좋은 땅이냐고 한다. (……)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그이 얘기를 듣고보니 나는 참 좋은 땅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좋은 땅에서 돈이 있으면 좋은 땅이지만 돈이 없으면 좋은 땅이 아니게 되는 일이 많다. 그리고 좋은 땅에서 안 좋은 일은 또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가. 차별은 얼마나 많은가. 이 좋은 땅에서 사람도 모두 귀히 여기고, 사람대접 제대로 하고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두 사회를 사는 사람” 중에서) 지은이 박수정은 서울 구로구 구로 3동, 일명 구주택 지역에서 10년째 살고 있다. 노동운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던 젊은 날의 열정과 이상은 이제 우리의 아이들이 보다 넓고 환한 세상에서 뛰어놀 수 있기를, 우리의 부모님들이 전깃세나 월세를 걱정하지 않고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기를,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동포들이 하나되어 같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일상의 작은 소망으로 바뀌었다. 지은이는 자신의 삶을 내보여준 이들의 인생이 100%라고 한다면 1%도 채 되지 못할 자신의 글이 사람들의 가슴에 온기를 되살리기를 바라며 구로동 재개발 지역의 좁은 골목길, 경북의 한 산골짜기 마을의 시골길, 수많은 차들과 물건들이 차지하고 있어 인간이 다닐 길은 비좁은 영등포 골목 등, 사람들의 숨결이 밴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우리 이웃의 한숨과 눈물과 꿈을 끄집어내었고 한 편의 삶의 모자이크를 완성시켰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이 시대에 ‘희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푸짐한 저녁식사 후의 디저트가 되어버렸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삶을 지탱해나가는 유일한 자양분이었고 이들은 슬픔과 그리움, 상처와 고통까지도 ‘희망’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건강하다. ‘희망’이 있는 한 이 땅에서 숨쉴 수 있기에 누구를 탓하거나 비난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의 희망’이 ‘우리의 희망’으로 확장되고, 그럼으로써 나와 내 이웃이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세상이 시작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모두는 희망한다. 나와 조금 다를지라도 같이 가야 할 내 이웃과 함께 호흡하는 세상이 오기를! 동정심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애정이 세상을 바꾸는 날이 오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