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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제1부 교차하는 시선들 1 인물 모자이크 2 동료들의 시선 3 일그러진 초상화 4 사후 부검 5 오늘의 쟁점 제2부 역사를 푸는 열쇠 6 징후 혹은 독창성 7 마르크 블로크의 얼굴 8 무엇을 할 것인가 마치며 마르크 블로크 연보 주 참고 문헌 인명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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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기의 가장 큰 장점: 마르크 블로크와 그의 저작물들에 대한 다양한 검증의 시선들
이 책은 다양한 검증을 시도하고 있다. 우선 마르크 블로크가 동시대의 같은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의 검증을 거친다. 그것은 다른 분야들처럼 역사학도 동업자들이 공포한 학문적 규칙과 조항을 따라야 한다는 ‘담론적 공안(police du discours)'이 있다고 저자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르크 블로크에 대한 평가는 그가 생산해낸 저작물들을 중심으로 그가 역사 연구를 위해 사용했던 도구, 방법론, 관점 등에 대한 동의와 비판을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그의 주저인 세 권―『기적을 행하는 왕들』 『프랑스 농촌사의 독특한 성격들』 『봉건사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중에서도 『기적을 행하는 왕들』에 대한 인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 책은 물론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의 신성성을 연구하고 있는데, 역사가들·지리학자들·사회학자들에게서 나온 사적이고 공적인 모든 증언들은 블로크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석학으로 가져야 할 ‘직업성’의 수준을 훨씬 높이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집요한 원전 사냥, 증언들과의 대면, 비평의 정확함에 대해서는 모든 이들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 주제는 그때까지 아무도 다루지 못했던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방법론으로는 사회학적 혹은 비교신학적 연구를 차용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 책은 아날 3세대 학자들에게는 ‘역사인류학’의 본격 연구서로 간주된다. 그에 대한 절대적인 인정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로 그것은 마르크 블로크의 『프랑스 농촌사의 독특한 성격들』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었다. 그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늘 ‘현재성’에 관심이 있었다. 『이상한 패배』에서 번득이는 명철함으로 현대사의 역사가로서 그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처럼(1978년 국립과학 연구센터에서 ‘현대사연구소’를 만들 때 그 전면에 마르크 블로크를 내세웠다), 그의 관심은 중세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그의 저작물 대부분의 제목에 중세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직접 나서서 농촌 연구가 잘 수용되지 않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1934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 ‘사회구조 역사가’로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이어 제목에서 왜 중세라는 말을 뺐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이유를 밝힌다. 만일 ‘중세사가’로서 기적 치료 행위의 탄생을 포착하려 했다면 당시 ‘업계’가 정한 한계선인 루이 11세(1423~1483) 이후는 다루면 안 되었다. 이어 그는 당대의 토지대장과 농지 구획도에서 시작해,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프랑스 풍경을 연구하기로 한 최초의 역사적 기획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계속해서 중세를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제국 안의 제국으로 중세를 국한하는 것은 그만두자. 잘못 동결된 그 얼굴에서 벗어나 이제 그토록 젊은 영혼을 중세에 되돌려줘야 하지 않나?”라고 결론지었다. 있는 그대로 인정되기를 원하는 순수한 갈망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 책의 수용 과정은 당시 인문사회과학계의 상식에 마르크 블로크가 어떻게 진입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의 불후의 명작 『봉건사회』의 연구 과정과 수용이 역사학계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물론 『봉건사회』가 당시에는 만장일치가 아니었지만 현재 ‘봉건제’ 연구의 기본서로 인정되는 것을 보면 1930년대에 이러한 저서를 집필했다는 것과 1936년에 블로크가 소로본 대학에서 사회경제사 과목을 가르치게 된 사실은 그의 위치가 최정상에 올랐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대학 내부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상당히 호의적이었으며 그것을 알 수 있는 자료들과 증언들도 많았지만, 대학 밖에서는 자료의 상태도 그렇고 블로크의 공공 활동에 대한 메아리도 너무 약해 ‘학자 영웅’에 대한 동시대적 표상들을 보여줄 만한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의 사라짐과 재등장 게슈타포의 총성으로 사라진 뒤 그는 역사학계에서나 대중 속에서 오랫동안 잊힌 인물이 된다. 그것은 반유대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배척과 그의 역사 연구의 폭(즉 중세에만 국한시키지 않는 그의 현재적 관심)이나 자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계의 풍토도 한몫했다. 저자인 뒤물랭이 “블로크의 심성사 연구는 페브르의 그것과는 다른 궤도를 취했다. 페브르는 실존주의가 제기한 주제 접근 방식에, 블로크는 역사인류학을 통해 역사서술 분야에도 상륙한 구조주의적인 사고에 상응했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는 이미 1920년대에 아날학파가 1960년대 이후 연구 분야의 확장과 연구 대상의 다양화를 꾀했던 그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회경제사 연보」라는 잡지가 ‘아날학파’로 성장하면서 그 대부가 되었던 브로델(페르낭 블로델 이후의 아날학파의 역사 저작물들을 ’구조주의 역사‘라고 부르곤 한다) 저작들의 근원 바탕은 모두 그의 스승이었던 페브르보다는 마르크 블로크 속에 내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마르크 블로크는 특히 1980년 이후 역사학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이러한 그의 복귀는 대중적으로도 화려하게 이루어진다. 그것은 현대 역사학의 비약적인 발전에서 힘입은 바 크다. 그것은 또한 역사학이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사회학적인 외연에 힘입어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마르크 블로크가 고심한 문제로 회귀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프랑스에서 역사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실용적인 전망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이상한 패배』의 저자는 마침내 대중들의 열광을 받게 된다. 그 이후 그의 모든 책이 재간행되고 서점의 진열대를 풍부하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 어린이 역사교과서에도 그의 이름이 애국적 가치들(잔 다르크, 베르킹게토릭스), 정치가와 군들(콜베르, 퉤렌), 예술가(클로드 로랭, 라신, 라 퐁텐) 등과 나란히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딴 중학교와 고등학교, 거리 이름도 생긴다. 이처럼 마르크 블로크는 학문적 유산으로만 평가받던 ‘블로크 전성기’에서 이제 시민적 가치의 메시지로, 도덕적?사회적 상징성으로 변모해갔으며, 프랑스 엘리트 사이에서도 최정상에 올랐던 것이다. 그에게 역사의 유용성 혹은 효용성이란 마르크 블로크가 죽을 때까지 고민했던 문제는 학자적·시민적?애국적이라는 문제였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위해 저자는 ‘징후’라는 매우 사회학적인 방법론을 채택한다. 그것을 통해 저자는 마르크 블로크의 총체적 삶의 의미를 파악하려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접근 방식은 매우 타당하다. 마르크 블로크가 역사가의 첫 번째 임무로 ‘현재적 관심’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도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어서 동시대적 증언자이다. 따라서 그것은 상당히 사회학적이다. 여기에서 마침내 역사가의 사회적 역할이 제기된다. 여기에 『이상한 패배』가 놓여 있다. 군인, 프랑스인, 역사가라는 그림 아래 블로크는 우리에게 소개된다. 이 세 단어는 모두 양면성을 드러낸다. 군인은 배우로서, 증언자로서 가치가 있다. 프랑스인은 시민이자 자기 성찰을 하는 분석가로서 가치가 있다. 또 학자의 역할로 환언될 역사가는 그가 배우(역사를 서술하는)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 가지는 현재와 과거를 성찰하는 한 인간을 조건화하고 있다. 군인이며 프랑스인이란 사실은 현재의 조건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역사가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독특한 삶을 살다간 마르크 블로크가 생각했던 역사가의 사회적 역할은 더욱 빛난다. 역사가는 어쨌든 원하든 원치 않든 지난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한 다음, 분류하고 집합화하는 데서는 현재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현재-과거 관계의 항구적 재구성, 즉 현재 때문에 과거를 조작하는 것이다. 역사학의 사회적 기능이라 할 만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 활동의 이런 측면은, 아무도 공부하지 않았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역사학의 학(學)이다. 역사학의 사회학이 아니라”(259페이지) 하고 이 책의 저자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역사가의 사회적 역할이 여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료들을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사료들은 증언이다. 반면에 역사가는 설명한다. 다시 말해 역사가는 증인이 본 것을 합리성과 이해 명료성의 범주로 가져온다. 반면 증인은 설명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자기 혼자서 그것을 말할 수 있다고 항변한다. 따라서 역사학은 꼭 필요한 정신훈련장이 될 수 있다. 블로크는 비평정신을 연마하며 역사학을 찾는다. 이 비평정신은 정의의 보증인이다. 이처럼 정의의 문제에서 역사학이 그 진정한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역사가의 사회적 역할의 한계는? 그리고 어떤 방법을 통하여? 첫 번째 문제에 대하여 마르크 블로크 앞에는 재판관의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물론 이 재판관의 의무감이 블로크를 참여하는 역사가가 되도록 추동했을 거라는 가설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다. 재판관은 어떤 순간에 결정해야 하는데, 블로크는 결코 역사가가 과거에 대한 가치판단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없다. “판결할 것이냐, 이해할 것이냐에 대한 논지 전개 초반에서 두 작업은 놀랍도록 흡사하게 묘사된다. 진실을 탐색한다는 측면에서는 둘 다 비슷하다. 그러나 선고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에 갈라진다. 학자는 설명하고 관측함으로써 자기 업무를 마친다. 반면 판사에게는 결단을 내리는 일이 늳아 있다. 그러나 블로크 판사는 사건을 심리하는 선에서 만족한다”(266페이지). 이런 재판의 비유가 《역사를 위한 변명》을 관통하고 있다. 이제 어떤 방법으로 과거를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비교를 통해서이다. 여기에 블로크가 강조했던 ‘현재적 관심’이 다시 나타난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징후’란 것이 다시 등장한다. 블로크는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수많은 지표들의 ‘독특한 특징들’을 통하여 ‘독특한 성격'을 파악해냈다. 즉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그가 시도했던 것은 차이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거리가 늘 고민이었던 블로크는 이 약간 우스운 매력(독창성/독특한 성격들)을 그리면서, 그 징후들을 차고 넘치게 한 다음 이 반사에서 우러나는 본질적인 정신 및 인간과 작품의 지성을 보여주려 했다. 이를 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들의 작품을 재검토하기도 하고, 언어학적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며, 지리학적·사회학적 방법을 차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각 비교 단위의 독창성, 개별성, 대조성, 추출하다, 구분짓다 등 많은 단어를 사용하며, 이 비교방법을 통하여 각 사회의 내재된 차이를 명확하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