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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에게 보낸 옥중편지를 통해 파란만장한 삶을 고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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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글을 엮어내며
제1부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올라라 40년 학문인생 학문의 초야를 일구어 무위의 낙과가 될 수 없다 겨레의 품으로 민족사의 복원을 위해 이방어의 여신에 사로잡히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 너그럽고 검소하게 사형을 구형받고서 마의 2주 연마끝에 이룬 복이 오래 간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학문에서의 허와 실 스승과 제자가 한 포승에 묶여 눈밭에 그려본 인생의 파노라마 46년 만에 올린 감방의 설날차례 판결받은 ‘학문적 열정’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올라라 바른 길을 가르치는 글 인생은 갈아엎기 참된 나 민들레 송 두견주로 생일축배를 나를 뛰어넘을 후학이 되라 옥중 좌우명-수류화개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 바다 같은 너그러움으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애정 배고프면 밥먹고, 곤하면 잠잔다 달에 관한 단상 우리만의 단풍 자유에의 사랑은 감옥의 꽃 유종의 미 지성인의 인생패턴 호랑이의 꾸짖음 인고 속의 ‘씰크로드학’ 구상 중국의 국비유학생 1호 위공 주어진 길을 걸어가리 제2부 새끼줄로 나무를 베다 새끼줄을 톱 삼아 나무를 베다 ‘가죽코 짚신’에 깃든 자애 ‘생의 시계’는 멈춰세울 수 없다 겨레의 꽃, 해당화 새하얀 눈밭에 찍는 발자국 뭇별 속의 보름달 피로 쓴 책만을 좋아한다 삶의 화두 시대의 소명 지성의 양식 겨레의 소중함 겨레에 대한 앎(1) 겨레에 대한 앎(2) 겨레에 헌신 ‘글자전쟁’에 부쳐 언 붓을 입김으로 녹인 보람 겨울밤 무쇠같이 찬 이불 속에서 귀곡천계 늙지 않는 비결 외삼촌이 들려준 천금 같은 이야기 3·1독립가를 되뇌며 제3부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네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다 사제의 영원한 인연 법고창신 분발, 분발, 또 분발 ‘학식있는 바보’ 선과 악은 모두 나의 스승 서늘맞이 ‘제2의 광복’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비명에 간 제자를 그리며 삼궤고를 덜다 단풍인생 참문화 서리 속의 호걸, 국화 인생에 만남은 단 한번 눈덮인 분단의 철책 걷히지 못한 채 달아나지 않고 남아 있는 과거 제구실을 못한 기성세대 얼과 넋이 살아숨쉬는 우리의 민속놀이 할 일에 날짜가 모자라는구나 겨레붙이를 중심에 놓고 나무의 참 테마 얼마간 부족한 것이 행복의 필수조건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네 수의환향 겨레의 다시 하나됨을 위해 내 고향 칠보산 양심을 가진 학문 죽부인 40년 만에 만난 동생 잉크 값어치나 했으면 |
鄭守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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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북경대학에 들어가니 거기는 말 그대로 별천지였소. 볼거리, 읽을거리가 지천에 깔려 있어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소. 게다가 학생신분이지만 격변기의 여러가지 사회운동에도 몸을 담아 세상사도 읽기 시작했소. 특히 겨레 사랑에서 나와 뜻을 같이하는 지인학우들과의 인생담론은 서로의 눈을 크게 뜨게 했소. 기억하건데, 대학 3학년 때의 설날인 것 같소. 나는 그들에게 보내는 연하장에 '위국헌기위지고(爲國獻己爲至高)'라는 칠언구(七言句)를 적어보냈소. 뜻인즉 '나라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일이다'라는 것이오. 조금은 거창한 교설같았지만, 사실 이것은 당시 타향살이에서도 나라와 겨레를 잊지 않고 미래를 설계하던 우리 열혈청년들의 한결같은 지향이자 인생의 좌표였던 것이오. 그들 속에는 이러한 숭고한 이상을 몸으로 실천한 지사들이 적지않았소. 그후 우리는 늘 이 말을 주고받으면서 초지를 다져나갔소.
그때부터 '위국헌기위지고'는 나의 넋과 얼에 무쇠기둥으로 버텨선 인생관의 좌표였소.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으로 겨레를 위해 헌신한다'라는 내 삶의 화두도 결국은 이 좌표를 축으로 삼고 받침대로 하여 구사된 것이고, 지금의 옥살이에 '수류화개(水流花開)'란 좌우명을 붙인 것도 결국은 이 대좌표의 한낱 낱줄에 불과한 것이오. 예수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하늘로 올라갔다면 나는 이 좌표를 움켜잡고 땅속으로 들어갈 것이오. ---p.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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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세상이라고 보이는 것은 뙤창에 비낀 조각하늘과 바둑판만한 뒤뜨락밖에 없소. 그것으로만 자연의 거창한 꿈틀거림을 어림잡아 더듬어야 하니 자못 야속하기만 하오. 그래서인지 절기에 대한 감각은 바깥세상보다 늘 한 템포 늦어지오. 내가 봄이 한창이라고 느끼는 지금, 아마 바깥의 봄은 저만치 무르익어 난숙해진 막바지가 아닐까 하오. 아무튼 아직 봄인 것만은 틀림없겠지. 봄에 살고픈 마음에서 자꾸 그렇게 믿고 싶소.
자고로 '봄은 시름의 계절이고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고 했소. 봄이 오면 한해의 농사일을 걱정해야 하니 시름이 생길 수밖에 없었겠지. 때마침 나도 근 두 해나 끌어오던 법정재판이 끝나서 앞으로의 일을 걱정해야 하니, 이 또한 '춘수'가 아니겠소? 그러나 이러한 시름이나 걱정은 어디까지나 새봄을 맞아 미래를 새로이 꿈꾸기 위함이므로 결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걱정이고 시름인 걱이오. 그런가하면 가을은 또 가을대로의 상념이 있게 마련이오. 봄날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내 땀흘려 가꾼 보람으로 가을철에 넉넉한 결실을 거두어들일 때면 자연히 지내온 일들에 대한 술회의 사색에 잠기게 될 것이오. 또한 농한기인 겨울을 앞두고 보낼 일을 사색하게도 될 테지. 아무튼 봄과 가을은 할 일들을 두고 머리를 써야 하는 계절이오. ---pp. 185~1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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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번 편지에 이어 내가 지금 뜻을 세워 몰두하고 있는 '씰크로드학'의 학문적 정립에 관해 좀 덧붙이려고 하오. 주지하다시피 씰크로드는 자고로 문명을 소통해주는 동맥이고 교량이었소. 그것이 없었다면 인류는 오늘과 같이 서로가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문명의 공유시대를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래서 이 길의 실체를 늦게나마 추인(追認)한 후 지난 한 세기 동안 동서양학계에서는 다양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어왔소. 그동안 적어도 세 번의 연구붐이 일어났소.
이렇게 지난 한세기 동안 씰크로드에 관한 연구가 이어져왔지만, 아직까지 학문적 정립은 미완의 관제로 남아 있소. 그 주된 원인은 연구자들의 자질미흡이오. 외국연구자들과 담론해보면 모두가 이 학문의 중요성과 학문적 정립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공감하지만, 이 학문 자체의 특성에서 오는 난점 앞에서는 저마다가 기죽은 빛을 감추지 못하오. 그 난점이란 우선 동서문헌을 섭렵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수단을 소유해야 하고, 동서양의 역사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오. 그런데 작금 이러한 자질을 겸비한 연구자들은 별로 많지 않소. 특히 동서양의 중간에서 가교역할을 하는 아랍 · 이슬람문명까지 파악해야 연구의 완결성을 기할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 동서양 어디에도 이러한 복합적 자질을 갖춘 연구자는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pp. 223~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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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교류학에 대한 포부와 삶의 화두인 민족주의
그는 자신의 학문인생을 정리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40여년간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한 운명이었음에도 학문적 비전을 세우고 그를 위해 도전했다고 고백한다. ‘문명교류학’이란 학문적 열매를 키워가던 중 검거된 그는 감옥에서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을 위해 몰두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에게 옥방은 또 하나의 연구실이며, 그 연구실에서 그는 목표를 구체화한다. 그 결과, 그는 옥중에서 약 2만 5000매나 되는 연구물을 생산해낸다. 우리 겨레의 대외교류사를 조명함으로써 한민족이 세계에서 어떤 위상을 지녔는지를 역사적으로 구명(究明)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명교류학의 핵심이자 이론적 기초인 ‘씰크로드학’을 구상하고 가다듬은 작업이나 문명교류사에 관한 개설서 집필작업 등은 그 맥락에 서 있다. 물론 그의 이 방대하고 치열한 작업은 ‘시대의 소명에 따라 지성의 양식(良識)으로 겨레에 헌신한다’는 삶의 화두와 연관되어 있다. 편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민족주의자적 풍모는 그가 오랫동안 지녀온 화두의 발현이다. 그에게 민족주의는 삶의 화두 그 자체인 것이다. 그는 감옥 안에서 중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조남기(趙南起)씨의 금의환향 기사를 접하고 여러 회상에 젖는다. 조남기씨는 충북 청원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중국으로 가 그곳에서 성장한 조선족 가운데 최고위급 인사다. 그에 걸맞게 우리는 그를 ‘조선족의 영웅’으로 대접했다.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주었고, 연일 언론은 그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그 배면의 사정을 소개하는 편지는 묘한 울림을 준다. 정수일 역시 연변 출신의 전도유망한 엘리뜨였다. 변방인 연변 출신으로 북경대학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카이로대학에 국비로 유학을 다녀온 후 중국 외교부에서 외교관으로 재직했으니 엘리뜨 중 엘리뜨라 할 만하다. 일제의 억압 때문에 이주한 유민의 후예인 젊은 조선족 엘리뜨들은 1950~1960년대에 ‘잔류파’와 ‘환국파’로 나뉘어 열띤 논쟁을 벌였다. 환국파의 지향은 조국으로 돌아가 조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었고, 잔류파는 이것저것 여건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환국을 거부했다. 결국 그는 환국했고(환국하는 데 가장 큰 동력이 된 것은 물론 민족주의였다), 조남씨는 잔류했다. 그리고 40여년 후 남한에 온 두 사람의 모습은, 수의환향과 금의환향으로 판이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가 편지에서 들려주는 이 비사(秘史)는 두고두고 진지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