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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손열음 - 쇼팽: 연습곡 [에튀드] (Chopin: Etudes op.10 & op.25)
Frederic Chopin 작곡 손열음 연주
Universal / Universal 200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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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소개

디스크

CD 1

  • 01 Chopin : 12 Etudes, Op.10
  • 13 Chopin : 12 Etudes, Op.25

아티스트 소개2

작곡Frederic Cho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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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쇼팽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폴란드어: Fryderyk Franciszek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이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폴란드어: Fryderyk Franciszek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이다. ch는 폴란드어에서는 'h' 발음이 나지만, Chopin은 프랑스계 성씨이기 때문에 '쇼팽'이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쇼팽의'는 'Chopina'로 격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쇼페나'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Szopen'(쇼펜)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쇼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바르샤바 공국으로부터 서쪽으로 46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인 젤라조바볼라에서 태어났다. 교구의 세례 기록에는 그의 생일을 1810년 2월 22일로, 이름을 라틴어로 프리데리쿠스 프란치스쿠스(라틴어: Fridericus Franciscus)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폴란드어로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가 된다. 그러나 쇼팽과 그의 가족들은 생일을 3월 1일로 기록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날짜를 진짜 생일로 인정한다.

프리데리크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영어:Nicolas Chopin)은 프랑스 로렌 출신으로, 16세가 되던 1787년에 폴란드로 이주해왔다. 니콜라는 폴란드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1806년에는 그가 가르쳤던 가문 중 하나인 스카르벡(Skarbek)의 가난한 친척인 테클라 유스티나 크리자노프스카(폴란드어: Tekla Justyna Krzyzanowska)와 결혼했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부모가 결혼식을 올린 브로후프(Brochow)에 있는 교회에서 181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 때 니콜라 쇼팽의 18살짜리 제자인 프리데리크 스카르벡을 대부로 삼았는데, 프리데리크라는 이름도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둘째이자 외아들로, 누나인 루드비카(Ludwika, 1807~1855), 여동생 이자벨라(Izabela, 1811~1881)와 에밀리아(Emilia, 1812~1827)가 있었다. 니콜라는 폴란드에 헌신했으며, 가정에서도 폴란드어를 주로 사용하게 했다.

프리데리크가 태어나고 6개월이 지난 1810년 10월, 니콜라가 바르샤바 고등학교 (대학 전단계 학교, 1804~1831에 존재했음)(영어:폴란드어: Liceum Warszawskie)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됨에 따라 바르샤바에 있는 작센 궁정(영어:Saxon Palace) 1층으로 이사한다. 니콜라는 거기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어머니는 하숙집 소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프리데리크의 체격은 왜소했으며, 어린 시절에 병에 자주 걸렸다.

그의 누이인 루드비카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종종 자신의 동생 프레데리크에게 놀이처럼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루드비카는 프레데리크의 재능을 눈치채었고, 결국 그들의 부모는 프레데리크가 공식적인 레슨을 받도록 한다. 공식적인 레슨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체코 음악가 보이치에흐 지브니(영어:폴란드어 Wojciech ?ywny)에게 1816년부터 1821년까지 교습을 받으면서 부터다. 누나 루드비카도 지브니에게 레슨을 받으며 프리데리크 등 남동생들과 가끔 듀엣을 하기도 했다. 쇼팽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7살 무렵에는 공개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고, 사단조, 내림나장조의 두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1821년에는 내림가장조 폴로네이즈를 작곡해 지브니에게 헌정하는데, 그 원고는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쇼팽 원고가 된다. 12세 때부터 엘스너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으며 나중에 엘스너가 세운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들어가게 된다.

1817년 작센 궁전은 바르샤바의 러시아 총독에 의해 군사용으로 징발되었고, 바르샤바 강당은 오늘날 바르샤바 대학교의 총장 집무실인 카지미에슈 궁정(영어:Kazimierz Palace)에 다시 세워졌다. 쇼팽가는 카지미에슈 궁정에 인접한 건물로 이사한다다. 이 기간 동안, 프리데리크는 폴란드 입헌왕국의 통치자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초대받아 그 아들과 종종 놀았는데, 거기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파블로비치 대공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 율리안 우르신 니엠체비치(영어:Julian Ursyn Niemcewicz)는 그의 극적 에클로그 《우리들의 담론Nasze Przebiegi"(1818년)》에서 "꼬마 쇼팽"의 인기를 증언하고 있다.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그 후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즉흥 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e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 옝제예비치(Ludwika Jedrzejewicz)가 전달 받아 폴란드로 가져간 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기념비 밑에 안치되었다.

21세기에 들어 보존된 그의 심장이 담긴 병을 열지 않고 관찰한 결과 심낭염으로 사망했다는 소견이 나왔다. 쇼팽이 앓았던 결핵은 심낭염의 일종인 결핵성 심낭염의 원인이다.

쇼팽은 필드가 창시한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가 있다. 《장송 행진곡,전주곡 제 4번》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즉흥환상곡》 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사육제》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e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e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를 연상케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띠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보고있다.

약 200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피아노를 위한 것이였고 오로지 몇몇만이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이였다. 실내악에 관하여서는 바이올린보다 주로 첼로와 피아노에 대해 썼고, 이조차도 모두 네 곡 밖에 되지 않는다.

바르샤바에 살 때 쇼팽은 부흐홀츠의 피아노를 사용했다. 나중에 파리에서 사는 동안에는 플라이에에서 악기를 구입했습니다. 그는 플라이에(Pleyel et Cie)의 피아노를 '그 이상은 없다'는 뜻의 "비 플러스 울트라"로 평가한다. 리스트는 파리에서 쇼팽과 친구가되었고 쇼팽의 플라이에 피아노의 소리를 "수정과 물의 결합"으로 묘사한다. 런던에서 쇼팽은 "나는 3대의 피아노, 플라이에, 브로드우드 및 에라르드가 놓인 대형 응접실이 있다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2018 년 폴 맥널티가 만든 쇼팽의 부흐홀츠 피아노는 폴란드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바르샤바 쇼팽 연구소에서 최초의 시대 악기 국제 쇼팽 콩쿠르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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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라인가우 페스티벌, 바트 키싱엔 페스티벌, 베토벤 부활절 페스티벌, 발틱해 페스티벌, 류블랴나 페스티벌, 포틀랜드 피아노 인터내셔널 등 세계를 무대로 열정적인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현재 하노버 국립 음대에서 아리에 바르디에게 배우고 있으며, 고향인 강원도 원주시와 예술의 전당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 주소는 https://www.facebook.com/pianistyeoleumson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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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전의 한 과정의 결실로 이 음반, 쇼팽 에튀드 전곡집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담긴 연습곡들은 하루 아침에 결정되고 완성된 것이 아니다. 손열음은 열 네 살 때 해외 음악캠프에 참가했다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중국 피아니스트가 쇼팽의 연습곡을 치는 것을 보고 크게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음악들은 당분간 그녀의 목표이자 숙제가 되었다. 평소 그녀는 오케스트라 협연의 앙코르로, 혹은 리사이틀에 짧은 소품으로 쇼팽의 연습곡들을 발췌연주하곤 했다. "치면 칠수록 깊어지고, 깨달아야 할 것이 더 많아지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지금 마련한 이 음반조차 "완성을 향한 과정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정이라고 하기에는 음반에 녹음된 연주들이 너무나 정성스럽다. 자신의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늘 자신보다 앞에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정진하는 그 모습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30년 안에 한국 국적을 가진 또 한 명의 세계적인 거장을 자랑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품목정보

발매일
2004년 10월 12일
시간/무게/크기
크기확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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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리뷰

에튀드: 자아의 독립 선언
글|정준호(Joon-Ho Chung)
영어의 '스터디', 즉 연습곡에 해당하는 '에튀드'라는 장르는 19세기 초 클레멘티, 체르니, 베르티니 등의 작곡가가 초보적인 연습곡을 작곡하며 나타났다. 이어 리스트, 쇼팽과 같은 거장이 고도의 비르투오시티를 요구하는 작품을 씀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에튀드에는 직접적인 두 가지 기원이 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건반을 위한 연습곡들이 그 한가지이다. 그의 인벤션과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건반을 위해 작곡된 체계적이고 창조적인 연작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 에튀드 음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모든 장단조를 사용해 건반 음악의 가능성을 총체적으로 파헤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은 열 두 곡씩 두 권으로 되어 있어, 쇼팽과 드뷔시, 라흐마니노프 등이 전주곡이나 연습곡을 작곡할 때 이를 따르게 된다.

또 하나의 기원 - 아니 이 경우에는 촉매라는 표현이 맞다 - 은 파가니니가 작곡한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이다. 고도의 테크닉과 화려한 표현을 바탕으로 한 파가니니의 곡은 당대의 모든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곡을 다른 악기로 편곡하거나 변주하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리스트, 슈만, 브람스, 라흐마니노프가 모두 파가니니의 주제에 몰두했던 작곡가이다.

에튀드는 이처럼 바흐와 파가니니라는, 언뜻 모순되는 두 사람의 작곡가로부터 시작된 장르이다. 즉 엄격하고 진지한 양식감과 자유롭고 화려한 개성이 함께 들어 있는 곡이 바로 에튀드인 것이다. 그러나 넓게 보아 바흐와 파가니니가 탐험하고 연구한 세계는 공통의 영역이기도 하다. 바흐의 음악은 그 이전의 서양 음악과 같이 신앙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지만, 모든 조성을 하나씩 사용해 그 가능성을 넓힌 〈평균율〉의 시도는 이미 근세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자아 의식"을 반영한다. 낭만주의에 들어 이러한 자아 의식이 더욱 뿌리를 내리게 되고,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과 같은 작품은 바흐가 확립한 주체적인 양식의 틀에 개성을 부여한 결과이다. 피아노 음악에서 자아 실현의 정점에는 말할 것도 없이 쇼팽의 에튀드 〈Op 10〉과 〈Op 25〉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쇼팽의 에튀드를 자신의 첫 음반 프로그램으로 선택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녀는 이미 서울시향, 부천시향과 같은 국내 최고의 악단과 협주곡을 연주했고, 뉴욕 필하모닉과 서울, 대전 그리고 일본 됴코에서 연주를 갖는다. 같은 연배의 동료 연주자들과 실내악 연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앙상블을 이루고, 남의 소리를 듣는 훈련을 훌륭히 소화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낼 때이다.

"열두 살이래 언젠가 꼭 전곡 연주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열여덟 나이에 쇼팽의 자아 실현에 도전한 손열음이 너무 조급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4년을 기다렸고, 전곡을 연주할 역량을 갈고 닦았다. 본인 생각에 부족한 점도 있을지 모르나, 이는 오히려 미래를 위한 자극이 된다. 〈에튀드, Op 10〉은 바로 쇼팽이 열여덟 살에서 스물두 살까지, 〈Op 25〉는 이어 스물 여섯 살까지 작곡한 곡이다. 복잡한 화성과 과감한 전조, 자유로운 반음계의 사용은 음악사상 전례 없이 아름다운 음악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리스트의 선구적인 업적을 존경한 쇼팽은 〈Op 10〉을 리스트 자신에게, 〈Op 25〉는 그의 애인인 마리 다구 백작에게 헌정함으로써, 선배 작곡가에 대한 존경을 표한다.

쇼팽의 에튀드는 전 스물네 곡 중 부제가 붙은 곡들이 특히 유명하다. 〈Op 10〉의 3번 '이별 곡', 5번 '검은건반', 12번 '혁명', 〈Op 25〉의 1번 '에올리안 하프', 9번 '나비', 11번 '서릿바람' 등이 그것이다. 멜랑콜릭한 선율과 폭발하는 듯한 리듬, 다채로운 화성의 특성에 따라 붙은 제목이지만 작곡가 자신의 것은 아니고, 출판업자나 친구들에 의한 것이다.

쇼팽의 음악이 기존의 선배들과 다른 점은 그가 피아노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극대화했다는 데에 있다. 손열음은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Op 10〉의 1번과 10번과 같은 광대하고 폭넓은 아르페지오를 사용한 곡에서 그녀는 음색의 대조가 가져오는 다양성을 면밀히 파헤친다. 5도 음정을 사용한 '검은 건반'과 3도 음정이 사용된 〈Op 25〉의 6번, 연속되는 6도로 진행하는 〈Op 25〉의 8번과 같은 곡에서는 화성의 지속과 다양성을 시험한다. 터치의 미학을 보여주는 '나비'는 전에 없던 깔끔한 표현력이 드러난다. '혁명'이나 〈Op 25〉의 10번과 같은 대규모 곡에서도 힘과 열정이 달리지 않는다.

손열음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과 같은 완벽한 테크닉, 낭만주의의 본질을 꿰뚫는 죄르지 치프라, 어느 순간엔가 귀를 열어준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손열음이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들이다. 이들에 비할 손열음의 장점은 솔직하고, 본능에 충실하며, 놀랄 정도로 서정적이라는 데에 있다. 그것이 바로 쇼팽 음악의 본질이기도 하며, 이 에튀드 녹음은 그 점을 확인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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