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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불편한 진실
7가지 테마로 본 인류 사회의 기만과 위선
태지향
구텐베르크 202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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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장 우리가 믿고 사랑했던 것의 진실

철학의 고상함이란 난해함
예술의 찬란함과 슬픈 허영
종교의 무지와 열정

제2장 국가와 나를 위한 거짓

아름다움 폭력과 인간 존엄성이 없는 인구 문제
죽음과 사랑에 대한 오해와 실체
차별이란 권력 - 동성애, 여성, 흑인
자유의지의 허구와 가치

제3장 정치와 문화의 목적은 권력과 착취

주의의 진실 -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우리의 중세를 만들었던 유교
독재 과도기의 이해
문화라는 오해와 편견 - 선악, 도덕, 관습, 신념

제4장 인간의 계보와 오류

인간의 계보 - 강자와 약자, 노예와 머슴
인간의 오류
인간을 상징하는 것들에 대한 오해

제5장 세상은 기만으로 돌아간다

국가와 나를 위한 기만
삶의 기만과 본질
일상 속의 기만

제6장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자유정신을 위해
올바른 진보를 기다리며

제7장 역사의 기원 그리고 나의 이야기

호메로스의 단편과 새로운 역사
창조와 진화라는 양면을 위해
나의 이야기

저자 소개 1

사회의 기대를 벗어나 아웃사이더로 살면서 인간과 세상을 낯설게 본다.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기획팀에서 10년 정도 근무했지만, 조직사회의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자연인이 되었다. 학교, 군대, 직장에서 겪었던 부조리와 답답함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지독한 진보라고 여겼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책을 사랑한다.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 이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 지독히 절망적이지만 그래서 희망을 구가할 수 있는 세상사에 대한 문제적 글쓰기로 신선한 지적 자극을 주고자 한다. 세상의 가
사회의 기대를 벗어나 아웃사이더로 살면서 인간과 세상을 낯설게 본다.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기획팀에서 10년 정도 근무했지만, 조직사회의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자연인이 되었다. 학교, 군대, 직장에서 겪었던 부조리와 답답함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지독한 진보라고 여겼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책을 사랑한다.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 이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 지독히 절망적이지만 그래서 희망을 구가할 수 있는 세상사에 대한 문제적 글쓰기로 신선한 지적 자극을 주고자 한다.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바라본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2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472쪽 | 148*210*30mm
ISBN13
9791199061712

책 속으로

철학의 비극은 소크라테스 때 이미 예언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자연철학의 난해함에 철학을 포기했던 사람이다. 그때부터 자연철학은 난해성을 이유로 거부되었고, 철학은 사회현실에 수다를 적절하게 섞어넣은 쉬운 인간 학문으로 바뀌었다. 그 후 우리는 철학을 그렇게 좁은 테두리에 가둬놓고 철학의 정의를 내렸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학문’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시야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도 좁디좁은 학문으로 철학의 지혜를 포장할 수 있었을까? 그때부터 철학은 수다나 떠는 사소한 학문으로 규정되었고, 윤리나 사회에 대한 비판, 확실하게 정의되지 않은 양심이나 사명 등이 철학이 되었다. 급기야 그의 죽음은 철학적인 명예로움으로 바뀌었고,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의 수다와 사유 방식은 철학의 고전이 되었다.

이제 작가라면 누구나 위대한 예언의 애매함이나 그것의 효과적인 사용법을 잘 알고 있다. 위대한 예언의 애매함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작품과 관객 사이에 항상 어느 정도의 공간이 필요하며, 그 공간은 분명 천민의 어리석은 위대함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작가들은 잘 알고 있다. 바로 그 공간에서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으며, 작가의 감정은 이미 대중의 감정에 의해 새로운 것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처음에는 우연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필연이 되어갔다. 사실 예술은 이때부터 부패하고 몰락하기 시작했다. 아마 추상화의 계기가 이때쯤 생겨났을 것이다. 추상화의 전성기를 지나 고장 난 TV나 변기, 바나나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일련의 예술의 몰락과 대중의 경멸을 말한다.

광신이란 그 대상이 진리이든 오류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상처를 위로받기 위함이고, 이단은 새로운 종교적 통찰이 아니라, 기존 종교로 인해 생겨난 상처와 모순에 대한 위로라고 변명한다. 모든 공동체는 외적 자극에 비례하여 내적 결속력이 강해진다. 특히 사회적으로 서러운 종교 집단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내적 끈끈함과 사랑이란 외적 잔인함을 전제한다. 자신의 운명이 무언가를 위해 유보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희생을 통해 신앙의 운명이 성취되는 것처럼 믿으면서 서로를 위로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대부분 우연이지만, 하나의 필연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 「제1장 우리가 믿고 사랑했던 것의 진실」 중에서

폭력이란 정상적인 세상에서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부리는 횡포일 수도 있겠지만,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정상적인 사람들이 하는 숙고일 수도 있다. 의외로 폭력은 도덕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인간의 진보에 있어서는 이상적이고 진취적일 수 있다.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것은 혁명이라는 폭력으로 인해 존재할 수 있었고,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흥미진진하고 위대한 것들도 폭력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역사가 그러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문화와 윤리, 그리고 도덕이라는 것도 사실 폭력과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강자의 점잖은 폭력을 위한 통치라는 관념 속에서 약자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아름답다고 한다. 단지 그것들이 유지되고 상속되는 것은 폭력이 아닌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되어 우리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상한(Queer)’ 축제라 하지 말자. 다양성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무지개’ 축제라 하자. 그들은 지금까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저항해야만 했다.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동성애는 그저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 권리를 막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 몇 가지 편견이다. 그 편견들로 동성애자를 억압해 왔지만, 이제는 편견을 버리고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과 윤리, 도덕을 말하려 한다면, 그 첫걸음은 우리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할 권리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자유의지는 선택도 아니고, 참다운 저항도 아니다. 아주 약한 유혹에도 흔들리는 아주 약한 저항이다. 이렇게 빈약한 자유의지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위대함을 얻고자 했다. 사실 진정한 유혹 앞에서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는 거의 미미하다. 또한 사람은 선을 원하면서 악을 행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욕망을 따를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하는 아주 작은 갈등도 결국 이브의 의지였다. 대부분 질 수밖에 없는 본성과 견딜 수 없는 약하고 작은 갈등으로 인해 자유의지는 너무 미약해졌다. 우리가 자유를 가장 큰 가치로 여김은 그것의 결핍으로 인해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 「제2장 국가와 나를 위한 거짓」 중에서

얼마 전까지 인문학자들은 개인과 세계의 모든 문제를 자본주의에서 찾았다. 그들 덕분에 불평등의 기원은 자본주의가 되었고, 자본주의가 있기 전까지는 우리의 모든 인류는 어느 정도 완벽했고 평등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았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최초의 불평등의 기원은 권력이었고, 최초의 자유와 평등의 기원은 자본이었다. 권력은 귀했고, 자본은 권력보다 흔했다. 권력은 유전되는 천성이었지만, 자본은 개인인 자기 자신이 일한 것의 대가였다.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인에게 자신의 독립과 바뀔 수 있는 운명에 관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자본은 암울했던 운명과 천성에서 벗어나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새롭게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예(禮)라는 개념의 배후에 얼마나 많은 허식이나 약탈이 숨어서 우리를 떳떳하게 지배해 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예는 때로는 도덕으로, 때로는 문화로, 때로는 진리로, 때로는 질서로, 때로는 고유의 풍습이나 관습으로 통용되었고, 각 시대마다 지식인들이 그 과정에 다양한 편견들을 보태어 더 적절하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공자의 예에는 예의 핵심인 배려가 없고, 배려가 없으므로 그 예는 우리에게 늘 엄하면서 폭력적이었고, 절차를 중시하면서 복종을 원했다. 통치의 질서는 그러한 천박한 예를 원했고, 그러므로 세련되고 우아하며 존엄한 표현인 무엄, 불경, 무례 같은 말로 잘못의 여부와 상관없이 무엇이든 죄를 물을 수가 있었다. 상호 간의 평등한 예가 아니고 다양하고 많은 아름다운 감각들을 용인할 수 없었던 강력한 구속의 수단이었다.

나는 이제 나의 관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관습을 뒤집어 보면 그 아래에 자유와 평등이 짓눌려 있고, 그것을 파헤쳐 보면 착취라는 악덕과 기득권의 작은 이익이 숨어 있다. 이러한 관습의 보편적 성격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종속의 문제였고, 그 종속은 관습에 익숙해짐으로써 편안하게 완성되는 것이었다. 관습이란 그렇게 성취되고 유지되며 지속된다. 교육은 이상을 창조하고, 관습은 전통을 추구하며, 종교는 그 가운데 어디쯤에서 눈치껏 존재한다. 과거의 관습에 의해 규정된 교육은 결코 이상을 창조할 수 없으며, 종교는 관습을 도와주거나 타협하려 한다.
--- 「제3장 정치와 문화의 목적은 권력과 착취」 중에서

인간은 모순으로 삶을 유지하고, 기만으로 삶을 변명한다. 사람은 친구를 그리워하면서 자신은 타인의 친구가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타인에게 투영되는 자신의 이기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친구의 속내가 자신의 감춰진 속내와 같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타인에게서 덜 익은 감정을 많이 봐왔고, 자신의 성숙하지 못한 인간성을 스스로 알고 있기에 결국 서로가 친구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 존재하지 않는 우정을 찾으려 한다.
--- 「제4장 인간의 계보와 오류」 중에서

분명 우리는 타의로 태어난다. 이것이 모순의 시작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 이상이나 그 이하로 살려 한다. 이것이 모순의 중간이다. 그러면 모순의 끝은 무엇인가. 인간은 그 모든 찰나를 영원으로 생각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고 원하지도 않는 심판을 맞이한다. 즉 원하지 않게 태어나서 원하지 않는 삶을 살다가 원하지 않게 죽고, 원하지 않게 심판받는다. 인생 전체가 모순이다. 모든 기만의 시작이다. 즉 기만이 필요했다.

삶이 행복해지려면 때로는 문화적인 것(도덕, 윤리, 합리, 고상함, 가식, 예의)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 임신과 섹스. 기품 있는 식사와 유쾌한 배설. 낮의 고상함과 밤의 변태스러움. 점잖은 언어와 상스러운 욕. 그 우아함과 천박함. 연기도 필요하고, 적절한 거짓과 엄살, 소박한 허영도 필요하다. 인간은 우아함에서 벗어나 천박해질 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은 천박함 속에 수많은 질 좋은 덕과 건강한 것들, 그리고 진지한 쾌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문화의 아래로 밀쳐낼 때, 우리는 문화의 빈곤한 감정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겸손해질 수 있다.
--- 「제5장 세상은 기만으로 돌아간다」 중에서

정치나 진영의 올바른 미래와 궁극적 평화 및 가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 긍정적인 동기와 조화로운 내적 가치를 확장해 볼 필요가 있다. 다양한 정치적 감정이나 진영의 감수성을 허용하거나 용인해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중도의 입장에서 진영의 자유나 감정의 여유, 마음의 균형을 소유해 보는 것이다. 정치나 진영에 매몰된 내가 아니라 독립된 나라는 것을 인식하여, 타인의 취향이나 권리를 인정하고 비판의 질과 경계를 지키는 것이다. 보수가 됐든 진보가 됐든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그들의 권력 취향이거나 나의 취향일 뿐이다.
--- 「제6장 더 나은 세상을 기다리며」 중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잃었을 때 모든 것을 부당하게 대해왔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도 자신을 잃어버리면서 시작된 것이다. 악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망각할 때 그저 일상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평범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잃어버린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그 결과 역사는 폭력과 지배의 연속이 된다. 지금까지 모든 역사는 오히려 나를 너무 잊게 했다. 우리는 이제 과거 영웅들의 서사에 기대는 역사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사란 정복과 전쟁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담아야 한다. 단지 과거를 기록하는 작업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인간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발전을 위한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 「제7장 역사의 기원 그이고 나의 이야기」 중에서

출판사 리뷰

위대함, 올바름, 신성함, 아름다움, 숭고함…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참된 가치들
그런데 꼭 그렇게만 봐야 하는 걸까?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도전

학문ㆍ예술ㆍ정치ㆍ종교ㆍ문화에 숨은
권력의 가식적인 얼굴을 폭로한다!


인류 사회는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이분법의 지배를 받고 있다. 옳고 그름, 맞고 틀림, 미와 추, 신성함과 불경함, 고결함과 천박함 등 참된 가치와 그른 가치 사이에서 대상을 평가하고 분류하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만약 이런 이분법이 누군가의 주관적 잣대에 불과하다면 어떤가? 사실 우열로 나뉘는 대상의 가치가 그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에 있는 것이라 한다면 어떻겠는가? 분명 이분법적 사고가 필요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며, 이는 우리에게 편안함과 편리함을 제공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 하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자체를 대상화해 보면, 이런 익숙함과 편안함은 곧 낯섦과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사회의 기대를 벗어나 자발적인 자연인으로 사는 저자 태지향은 이 책에서 인류 사회를 지배해 온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도전을 한다. 학문, 예술, 정치, 종교, 문화에 이르기까지 7가지 테마를 넘나들며 우리의 고정관념과 사회의 통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꼭 그렇게만 봐야 하는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가? 정말 그게 사실인가?’ 하는 저자의 도발적인 물음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옳다고 믿고 사랑했던 것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진실의 가면을 쓴 ‘누군가의, 누군가에 의한, 누군가를 위한 이데올로기’ 말이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 진실의 속살을 파헤치는 일은 결코 즐거울 수만은 없다. 우리가 이전에 얼마나 많은 거짓과 편견을 고수했는가를 깨닫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우리 앞에 놓인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그를 통해 더 나은 미래의 토대를 다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진통과 충격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을 배신할 때, 불편한 진실은 비로소 고개를 든다.

철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사변적인 학문이다?
예술 작품의 가치는 아는 사람만 안다?
종교와 도덕은 늘 선을 지향한다?
자본주의가 모든 불평등의 원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주인이다?


열거된 질문에 대한 대다수 사람들의 답변은 무엇일까? 아마 “예스”일 것이다. 인류 지성사를 살펴봐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테제나 이론에 대한 반박은 몇몇 지성들에 의해서만 간헐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코페르니쿠스, 다윈,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 당대 학계와 사회에서 소외되고 핍박받은 몇몇 인물들만이 “노”를 외치며 고독한 길을 걸었다. 위에 열거된 통념들 역시 일정한 사상과 학문, 이념을 그 배경으로 하기에 반박이 쉽지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통념들에는 기득권의 이데올로기가 붙인 ‘진리’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어 그 진의를 따져보고 회의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가 속해 있는 다양한 조직들, 가령 가정, 학교, 직장, 사회 등에서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흡사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저자는 철학이 왜 인간을 탐구하는 사변적인 학문으로 머무르게 되었는지를 철학사를 통해 고찰하고, 예술 작품의 가치가 대중의 무지와 허영을 이용하면서 어떻게 왜곡되어 갔는지 그 과정을 살핀다. 또한 종교의 선악 구분과 도덕?윤리 규범을 도마 위에 올려 그것들이 지향하는 선의 거짓과 위선을 폭로하고, 사회 불평등이나 민주주의 위기를 어느 하나의 원인을 통해서만 설명하려는 이들을 맹렬히 비판한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이런 주장들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어쩌면 지극히 회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와 같은 통념들에 과감하게 “노”를 외치는 그의 대담성을 보면서 우리도 한 번쯤은 자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가.

일상을 지배하는 차별과 편견
이타적인 듯 보이지만 지독히도 이기적인 사람들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따끔한 일침


저자는 일상을 파고든 다양한 편견과 그로 인한 차별에 대해서도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오래전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여성, 흑인, 빈자, 동성애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통렬히 비판하는 것도 통쾌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 가령 부동산, 반려견, 노 키즈 존, 비정상적인 법원 판결, 변질된 노동운동, 촛불혁명의 명암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뼈 있는 통찰을 이어간다.

“이 책의 내용은 기존의 보편적인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고, 문체나 구성 역시 독자를 당혹스럽게 할 수 있다. 이 책을 비난해도 좋지만, 그런 비난조차 자신의 편견이 깨지는 과정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나는 내가 책을 쓰며 느꼈던 그러한 다양한 감정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자신과 주위의 모순에 대해 고민하면서 성숙하고 진보한 시민의식을 갖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 프롤로그 중에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제기되는 저자의 문제의식과 주장이 거북하고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또한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그의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바람처럼 이 책은 당연하고 익숙하고 마땅하고 그래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꼭 그렇게만 생각해야 하는가?’ 굳어진 사유의 틀을 변화시키기 위한 저자의 과감하고도 도발적인 시도가 독자들에게 신선한 지적 자극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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