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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甲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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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기다림을 위하여」「더 큰 비밀」을 제외하면 11편 모두 90년대에 발표한 것들이다. 지나간 시간과 빗나간 사랑, 그리고 중산층의 불안한 공허감을 주제로 지난 8년간 작품을 발표해 온 작가는 일상에 내재된 어두운 기억들을 집요하게 파고듦으로써 <상처핥기>라는 비애의 서정성을 일구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최근 『한국소설』(1997) 겨울호에 실린 표제작 「길에서 형님을 잃다」는, 이제는 제사나 성묘가 공동체의 절대적인 의식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작가의 현실읽기가 눈에 띈다. 사업에 실패하고 7,8년을 숨어다니던 문중 종가 큰형님의 소재가 밝혀진 것을 기회로 사촌동생들이 찾아뵈러 나선 과정이 이 작품의 줄거리이다. 큰형님을 방문하여 옛날 종가집 <형님>의 면모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형님이 형수가 아닌 딴 여자를 데리고 살고 있으며, 카톨릭 신자가 된 데다가 그나마 유교가풍을 유지시켜온 종가와 종답을 팔려는 그에게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촌들은 길에서 <형님>을 잃어버렸다고 자탄하며 씁쓸하게 돌아온다는 내용인데,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전통부재현상을 시의적절하게 들춰 보이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법예된 사랑」「불안한 조깅」「나는 이유를 알고 싶다」「악셀을 밟는 법」은 빗나간 사랑을 주제로 다뤘다. 제2회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한 「불안한 조깅」은 낯모르는 남자의 차에 탔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뒤 그때부터 시작된 불안 때문에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 남자의 뒤틀린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아침조깅으로도 가시지 않는 자신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폰팅을 하게 되는데 호텔에서 만나기로 한 여자가 아침 조깅 때마다 나란히 뛰고 싶어하던 그 여자라는 것을 알고는 더 참담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남자의 초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익숙한 순례자」「보스니아에 대한 꿈」 「중국산행」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어」「지나간 시간은 없다」「기다림을 위하여」는 지나간 시간, 즉 어두운 기억 혹은 빛바랜 과거가 검은 딱지처럼 앉아 있음을 보여주는데, 「익숙한 순례자」나 「보스니아에 대한 꿈」은 그러한 주제가 좀더 옹숭깊게 형상화되어 있다. 전자는 서자출신이며 정보분석파트에서 일하는, 어두움으로 대표되는 <나>가 밝음으로 대표되는 양품점 여점원과의 극명한 명암을 통해 어두움의 편안함에 익숙해 있는 <나>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준다. 후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보도기자가 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지를 모르는 <나>가 어떤 계기로 20년이 넘도록 소식을 모르고 지내온 친구를 찾게 되는데, 그 친구의 죽음을 확인하면서 거기에 따른 자책과 더불어 그의 처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리는 자신에 대한 굴욕감과 무의식의 올가미에 휩싸인 나머지 보스니아 보도기자를 신문에 줄기차게 싣는다는 자아심리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작품이다. 그외에도 「'그린 파파야 향기'를 보는 부부」에서는 중산층의 불안한 공허감이 잘 나타나 있으며, 「더 큰 비밀」에서는 이 작품집에서는 보기드문 성장소설로 읽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