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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죄와 벌
양장
피에르 아술린 저 / 이기언 역
두레 200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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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 소개

저자 : 피에르 아술린 (Pieere Assouline)
기자이자 작가로, 도서 전문 월간지 <리르(Lire)>의 편집장을 역임했고, 전기 작가로도 유명하다. 『가스통 갈리마르』(1984), 『알베르 롱드르』(1989),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세기의 눈』(2001) 등의 전기를 썼고, 소설로는 『여자 손님』(2000), 『이중 인생』(2001), 『한계 상태』(2003) 등이 있다.
역자 : 이기언
연세대 불문과를 나와 파리-소르본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는 『말꾼』, 『누더기』 등이 있고, <비평>지에 <20세기 프랑스 지성인사>를 연지한 바 있다. 지금 연세대와 인천대에서 강의하고 있고, <시민의 신문> 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5년 01월 22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254쪽 | 438g | 143*216*20mm
ISBN13
9788974430689

출판사 리뷰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과거사 청산문제가 등장할 때마다(특히 일제 치하에서의 반민족행위 청산문제) 우리가 맨 먼저 떠올리는 나라는 프랑스일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스야말로 자기 조국을 배반하고 나치에 협력하여 부역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처벌한 전형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프랑스는 인류 역사에서 자기의 부끄러운 역사를 단호하게 바로잡은 가장 전형적인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나치 범죄자들을 처벌한 뉘른베르그 전범재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에서 이긴 연합국이 패전한 독일의 반인륜 전범자들을 처단한 것이지 한 나라가 자기 조국을 배신한 부역자들을 처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는 우리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프랑스는 일찍이 자기의 치욕스런 역사를 바로잡았는데 우리는 왜 해방 후 60년이 되도록 그것을 하지 못했는가 자문하게 해주는 반성의 거울이다. 그리고 우리의 과거사 청산 문제를 앞두고 프랑스의 성공은 배우되 그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함께 가져다주는 거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는 1944년 8월 나치에서 해방된 후 곧 과거 청산에 들어가 약 2년간에 걸쳐 약 1만여 명의 부역자들을 처형했다. 일부 우파 언론에서는 그 수가 10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일부 역사학자는 3~4만 명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공안 경찰의 집계나 드골의 회고록에 의하면 약 1만 명으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처형’이란 사형을 집행당한 사람들만을 가리킨다. 재판에 회부된 건수만 약 11만 8천 건에 이른다고 하니 그밖에 처벌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그리고 나치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왜 그토록 준엄하게 모든 공직에서 추방하고 공민권을 제한했던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왜 그렇게 격렬한 논쟁을 벌여야 했던가? 그것은 지난날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여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을 수 없으며 올바른 미래를 건설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과거를 정리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기억에 바탕을 둔 진실과 정의’였다. 알베르 카뮈는 “기억에 근거한 정의”를 열렬히 주장했다. ‘기억’이란 한 개인이든 나라든 그 존재를 존재이게 해주는 정체성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기억을 상실한 인간은 바로 ‘그’가 아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상실에 빠진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레이건’이 아니었던 것과 같다. 그리고 ‘기억’은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해주는 각성제이다. 그래서 다하우 나치수용소 입구에는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 (George Santayana)가 역설한 다음과 같은 말이 걸려 있다고 한다.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기 마련이다(Those who forget the past are doomed to repeat it).”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할 것인가”(카뮈) vs “누구에게나 실수할 권리가 있다”(모리악)
물론 프랑스에서도 과거청산문제를 놓고, 특히 나치에 부역한 지식인들의 숙청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국민 통합과 화해를 위해 부역자들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우익 보수 진영과 처벌을 단호하게 주장한 레지스탕스 측의 논쟁이 그것이다. 나치 점령기에 프랑스 지식인들의 저항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한 지하신문 <프랑스 문예>와 <투쟁>은 부역자들에 대한 관용과 용서를 하나의 죄와 동일시하면서 처벌을 단호하게 주장했다. 과거의 역사적인 범죄가 미래에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과거를 정리하고 교훈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문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의 과거의 모든 불행은 반역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오늘 또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면, 주모자들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다. 어제의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곧 내일의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다.”

숙청을 둘러싼 대립 가운데서도 1944년 9월부터 45년 2월까지 약 반년에 걸쳐 벌어진 프랑수아 모리악과 카뮈가 벌인 치열한 논쟁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전형적인 가톨릭 신자이고 부르주아 작가이며 언론인이었던 모리악은 프랑스의 전통 우익을 대변하는 <르 피가로>지의 논설을 통해 숙청이 부당하다고 지적하면서 국민화합을 위해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가 서로 (죽음의) 쳇바퀴를 돌리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란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제4공화국이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적이 우리에게 한 짓을 우리가 적에게 해서는 안 된다, 적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승자의 진정한 위대함은 패자가 쓴 무기를 패자에게 쓰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모리악은 비록 카뮈, 사르트르, 아라공 등과 함께 저항운동을 펼친 지하신문 <프랑스 문예>에 참여한 작가였지만, 그는 기독교인이었고 회색인이었고 관대한 지식인이었으며, 계급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부르주아 귀족이었다. 더구나 그의 형은 페탱 지지자였고 극우단체인 ‘프랑스 행동’의 열성당원이었으며, 의사협회의 회장으로서 공산당원이었던 동료 의사의 처형에 책임이 있다는 의혹 때문에 당시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카뮈는 <투쟁>지를 통해 모리악의 이러한 자비론을 강력히 비판했다. 1941년 저항적인 지식인들이 창간한 <투쟁>은 1943년 청년작가 카뮈가 편집장을 맡은 이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지하 저항운동을 이끌어온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하신문이었다. 카뮈는 ‘정의와 자비’라는 논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내가 숙청에 대해 말하면서 정의를 외칠 때마다 모리악은 자비를 말한다. 내가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마치 증오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모리악은 우리가 예수의 사랑과 인간의 증오 가운데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다만 치욕 없는 진실을 원할 뿐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비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내가 모리악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조국을 죽음으로 이끄는 두 개의 길이 있는데, 증오와 용서의 길이라는 것이다. 나는 증오에 대해서는 조금의 애착도 없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반역자를 사랑할 줄 아는 모리악을 존경하지만, 시민으로서의 나는 모리악을 불쌍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우리에게 반역자와 졸개들의 나라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회를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나는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의를 좌절시키는 자비를 거절할 것이다.” 카뮈는 또 다른 논설에서도 “온 국민에 관련된 진실이 문제가 될 때 정의가 해야 할 일은 자비를 침묵시키는 것이다. 바로 모리악이 말하는 자비를 말이다.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긴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것은 이 불완전한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진실이 밝혀지고 ‘인간의 정의’가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래야 내일, 증오가 아니라 ‘기억에 근거한 정의’가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가
프랑스의 보수적인 지식인들이 숙청에 반대한 데에는 모리악 같은 기독교인의 자비론이나 국민들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 말고도 같은 지식인들이 특히 가혹하게 처벌당하고 있는 데 대한 동정과 저항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다른 분야의 부역자들보다 문인이나 언론인 출판인 등 지식인들이 더 엄중하게 처벌받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왜 지식인들을 그렇게 가혹하다 할 만큼 중벌로 다스렸던 것일까?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지식인들의 역할과 책임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었고, 둘째, 기소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작가나 언론인들의 부역행위는 인쇄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증거를 확보하기가 쉬웠으며, 따라서 은폐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 대한 증거는 불과 며칠 또는 몇 시간 만에 작성되어 법정에 제출될 수 있었다. 당시 기자나 문인들에 대한 재판이 열리면 사람들은 말했다. “이 사건의 심리는 간단할 것이다. 유일한 증인은 그가 쓴 글들이 될 것이다. 글은 남는다!” 자신이 쓴 글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은 채 글을 쓰고 자기의 이름을 써넣었을 때 그는 그와 동시에 자신에 대한 훗날의 불명예와 사형판결문에 서명한 것이라는 것을 지식인들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이에 비해 경제인들의 행위는 은밀하게 막후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고, 거래처나 은행계좌를 뒤지며 계약서나 회계장부 영수증 등 거래내용을 뒷받침할 증거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이런 자료들이란 소각하여 인멸하기도 쉬웠다. 지식인들은 막강한 금권력의 비호를 받지도 못했고 국가재건에 필요한 경제적 이용가치도 없었으므로 그만큼 더 무거운 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지식인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은 경제적 부역자들에 대한 배려와 오랫동안 비교되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대서양 장벽을 쌓은 비밀조직 ‘토트(Todt)’와의 비교이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대서양 연안의 카프 노르에서 가스콘 만까지 독일이 건설한 요새를 통틀어 대서양 장벽이라고 부른다. 독일군은 연합국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대서양 연안을 따라 벙커를 만들고 지뢰를 묻었으며 행글라이더의 착륙을 막기 위해 위장 기둥을 세웠다. 이 장벽을 만든 자들과 지식인들에 대한 처벌을 비교하면서 언론인 장 갈티에 부아시에르는 이렇게 썼다. “기자들은 기사 한 줄에 1프랑을 받고 대서양 장벽을 찬양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나 이 장벽을 건설하면서 수백만 프랑을 번 사업주들은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인 사회나 일반 국민의 지배적인 여론은 지식인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묻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 “글을 쓰거나 책을 출판하는 것은 적에게 시멘트나 가죽을 파는 장사보다 그 직접적인 결과나 후세에 나타날 결과가 더 크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지식인의 부역은 더 심각한 반역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지식인은 그 재능과 역할이 큰 만큼 책임도 크다는 것이다. 지식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생각과 신념을 퍼뜨리고 심어줄 수 있으며, 그 결과 자기 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비참하게 바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치 점령 하에서 그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했던 <바다의 침묵>의 작가 베르코르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의 반역은 기업가의 반역에 비해 백배나 더 중대하다. 왜냐하면 작가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에 대해서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타인의 사상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기업가와 작가를 비교하는 것은 곧 카인과 악마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카인의 죄는 아벨에 그치지만 악마의 위험은 무한하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작가는 자기가 쓴 글 때문에 목숨을 바쳐야 할 정도로 자기 글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렇다.” 그의 대답은 명확했고 단호했다. 그리고 점령 하에서 저항 작가 그룹에 참여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 또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대서양 장벽을 건설한 자들보다 대서양 장벽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했던 자들에게 훨씬 더 무거운 벌을 내렸다고 비난한다. 나는 경제적 부역자들을 용서하는 것이 너무나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히틀러의 선전자들을 엄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업상,기질상 나는 ‘말’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 가스실만큼이나 살인적인 말들이 있다.”

프랑스의 지식인 숙청은 어떤 점에서 성공했고 어떤 점에서 실패했나? 그것이 남긴 교훈은 무엇인가? 프랑스의 역사 바로잡기가 완전한 의미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관점에 따라서는 적지 않은 문제를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식인의 역사적 범죄에 대한 처벌은 지식인들에게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며 글 쓰는 것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지식인의 무책임한 발언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체험하고 또한 그 죄과가 씻기 어려운 개인적인 불명예는 물론 무거운 형사적 처벌을 동시에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미래에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주는 교훈을 남겼다.
숙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았듯이 낱말들을 정리하여 문장을 만들 때 그 낱말들의 의미와 무게를 곰곰이 따져보았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심판 과정을 통해 본 것처럼 이념을 먹고 사는 인간, 즉 지성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글을 쓰는 바로 그 순간에 자기 글에 대해 깊은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글 쓰는 사람은 앞으로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또한 유행과 체제를 넘어서서 자기 글에 대해 치욕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순간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자기 글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고, 얼굴을 붉히지 않고 자기 글을 다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정의를 주장하지는 못할망정 자기 신념에 반하는 글을 쓰도록 압력을 받았을 때 지식인이 지켜야 할 마지막 양심은 ‘침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말했다. “작가는 그가 무엇을 하든 ‘현장’에 있고, 심지어 첩첩 산중에 들어가 있다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으며,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작가는 누구든지 자기 시대의 ‘장터’에 참여해 있다. 심지어 작가의 침묵조차도 하나의 입장표명이고 정치행위이며 지식인으로서의 참여의 표시이다.”

프랑스의 지식인 숙청이 남긴 교훈
숙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지만 그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뒤 프랑스의 지식인 숙청엔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혁명적 열기 속에서 진행된 재판, 적법성의 애매함, 불공정한 심판, 비슷한 죄과에 대한 법원간의 형량의 차이, 정치적 의도의 작용… 등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 숙청 초기에는 그가 언제 어디에 있었느냐는 시?공간의 문제가 처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초기엔 피신하지 않고 파리나 주요 도시에 남아 있던 지식인들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파리의 유명 작가와 기자들에게 엄중한 심판이 내려졌다. 외국으로 도주한 주요 인물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가혹한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파리에 남아 있던 유명 인사들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어 그들의 처벌이 사람들의 원한과 복수심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드골 세력과 공산당 간의 경쟁, 기성세대 지식인들을 밀어내려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 등도 영향을 주었다. 고의든 아니든 숙청을 이용해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인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숙청은 목표라기보다는 수단이었다.

이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공한 숙청이란 지하활동에서 막 벗어난 저항 투사들이 꿈꾸는 그런 심판이 아니라 점령 하에서 일어난 실제 사실에 입각하여 부역자들을 재판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진짜 죄인들을 정의롭게 처벌했을 것이고, 약식처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며 판?검사들이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을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고 부역자들과 파시스트들을 구별하고 반역죄와 사상범을 구별하여 심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법정마다 서로 달리했던 법률해석을 가능한 한 조율하여 형량의 편차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을 것이고, 레지스탕스 출신자나 숙청주도자들이 아닌 점령 하에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깨끗한 사람들 가운데서 배심원들을 뽑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숙청은 일부 숙청주도자들의 진정한 의도를 감추는데 이용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자기 개인의 권력이나 정당의 권력을 염두에 두고 단죄를 도약대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외적이지 않은 법률의 판단을 통해 진정으로 선한 사람과 악한 자를 가려냈더라면, 저항 투사들과 부역자들만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들과 경제적인 부역자들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더 나아가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이상주의적 파시스트들과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전문적으로 밀고를 일삼던 자들을 구분했더라면, 유럽의 국가사회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했던 자들과 유태인들을 쫓는 직업 사냥꾼들을 구분하여 벌을 주었다면 숙청은 제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적인 시각은 격동기를 한참이나 지나 그 모든 것이 냉정한 역사가 되어버린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본 관점이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이런 법정이 다시 열린다면 프랑스는 지난날의 이러한 과오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예에서 교훈과 지혜를 얻으려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리뷰 총점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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