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책머리에 5
철학의 기쁨 11 철학자의 아마추어 정신과 프로 정신, 그리고 ‘사회철학’ 39 헤겔 바깥의 헤겔―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63 환대와 환대 너머 87 『전체성과 무한』의 이편과 저편 115 이름의 의미 141 의사소통에 대해 생각하기 165 용서와 선물 195 동일자적 시간과 타자적 시간 239 타자성의 인식과 관계의 새로움―팬데믹 시대의 타자성 267 개방성의 깊이―레비나스의 윤리적 개방성 283 반(反)-이기(利己)로서의 정의―공정성과 타자에 대한 책임 309 동물과 인간 사이―타자로서의 동물과 인간의 책임 337 후주 363 실린 글의 유래 384 |
문성원의 다른 상품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지난 수년 동안 철학이라는 분야에 종사하면서 나름 끙끙거렸던 흔적을 모은 것입니다. 책의 표제가 ‘철학의 기쁨’이지만, 기쁨의 자취만 추려 낸 것이라 하긴 어려워요. 기쁨이란 우리가 항상 좇는 것이긴 하나, 우리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기쁨의 기억이 우리 삶의 이곳저곳에 배어 있듯, 이 책의 갈피갈피에도 그 조각들이 묻어 있긴 할 겁니다. 그러나 이 글들이 애당초 기쁨을 목표로 했다고 할 수는 없어요. 기쁨을 직접적 주제로 다룬다고 할 첫 번째 글조차 그렇죠. 그 글에서 논하듯 기쁨이 워낙 우리에게 보상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면, 보상만을 위해 어떤 일을 한다는 건 좀 줏대 없고 얄팍한 삶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 p.5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사고방식의 큰 전환기를 맞고 있다고 봅니다. 인터넷 통신과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신경계의 외장(外藏) 경향이 심화하고 있을뿐더러, 그에 따라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유로부터의 탈피가 불가피해지고 있어요. 환경을 인간에게 맞게 개조하려다 보니 그 과정에서 인간 자신의 됨됨이가 자연적 질서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진 거죠. 이 같은 아이러니는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됨의 심연이나 비밀에도 적용됩니다. 그것 또한 자연의 심연이나 비밀과 무관할 수 없을 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철학과 과학의 재합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학문의 초창기 때와는 달리 여기서 주도권을 철학이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다고 추론과 발견의 기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굳이 학문의 인위적인 경계와 명칭을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 p.34~35 하지만 저는 아마추어적 자세의 장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전문성의 영역이 갖게 마련인 조건과 형식에 덜 얽매일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싶군요. 또 그렇기에 더 순수하고 근본적인 동기에 따라 움직이기 쉽죠. 아니, 그런 동기가 앞서기 때문에 프로의 견고한 조건과 형식에 덜 속박된다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네요. 요컨대, 기성의 질서와 틀에 갇히지 않고 그 바깥과 지반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이 아마추어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50 그러니까 환대란, 단지 약자 개개인을 내 자리에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구체적 행위들에 그치지 않고, 좀 거창하게 말해 문명의 방향성 전환을 뜻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깥을 경계하며 내부의 질서를 확립하고 확장하려는 공격적인 방향으로부터, 낯섦과 약함을 받아들이고 보호하며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에 열어 놓는 더 유연하고 개방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을 말이죠. 타자를 우선시하는 레비나스 철학도 저는 크게 보아 마찬가지의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데리다에 비해 레비나스가 훨씬 과감하고도 적극적으로 이해관계 너머의 영역을 강조하고 있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 p.105~106 제가 좋아하는 현대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내 밖이 나보다 크다는 평범한 사실을 우리에게 새삼스레 일깨워 줍니다. 그의 용어를 빌리면, 타자(他者)는 나 또는 동일자(同一者)보다 언제나 크고 높습니다. 타자는 나보다 우선하지요. 내가 있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먼저 있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내 밖을 받아들이고 내 밖과 소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끊임없는 자각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를 변화하게 합니다. 레비나스는 근대 이후의 서양 문명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한 채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지요. 이 같은 자기중심주의는 독단주의로, 타자에 대한 억압으로 나아가며, 종래에는 자기 자신마저 파괴하기 쉽습니다. --- p.176~177 이 글에서 용서와 선물을 연결 지은 것은 양자가 공유한다고 여겨질 법한 특성인 비대칭성에 주목한 탓이다. 용서는 저질러진 잘못과 대칭적 관계에 있지 않다. 그것과 대칭적인 것 또는 적어도 대칭이기를 지향하는 것은 복수나 보상, 처벌 따위다. 그러한 한, 그와 같은 것들은 계산과 결부된다. 얼마만큼 되갚아 주어야 제대로 복수할 수 있을지, 적절한 보상은 어느 정도의 것인지, 처벌의 수위가 얼마나 되어야 정당한 것인지 따져 보게 된다. 용서도 그렇지 않느냐고? 글쎄, 그렇지 않다는 게 내가 주목하고자 한 바였다. 용서의 중요한 특징은 계산적 고려를 벗어난다는 점에 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라는 데리다의 주장은 그 극단을 표현해 준다. --- p.233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에서 더욱 중요한 특징은 이 타자가 나의 응답(reponse)을, 곧 책임(responsibilie)을 촉구하는 윤리적 상대라는 점에 있다. 타자는 직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호소하는데, 나는 이 호소를 윤리적으로 회피할 수 없고, 그렇기에 그 요청에 대한 응답은 나의 책임으로, 의무로 다가온다. 하지만 왜 윤리적으로 회피할 수 없을까?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는 약자이며 또한 높은 자이기 때문이다. 낯선 자인 타자는 동일성으로 구축된 나의 소유물, 나의 집, 나의 영토에서 벗어나 있는 자이며, 그래서 벌거벗은 자이고 약한 자이다. 그러나 또한 타자는 동일성의 한정과 경계를 넘어 서 있다는 점에서 무한과 닿아 있으며, 그래서 한없이 높은 자이기도 하다. --- p.279~280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위험이 닥치면 어느 사회나 폐쇄적이고 배타적이 되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개방을 제한하는 조건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벌거벗은 얼굴의 호소에 대한 응답, 곧 책임이 자리해야 한다는 것이 레비나스적 발상이다. (…) 나와 무관해 보이는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타자를 대신한다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부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거창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전으로 고향을 잃은 난민들의 잘못은 어디에 있으며, 전염병의 위협 속에서 실업과 궁핍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잘못은 또 어디에 있는가, 그 기원을 찾을 수 없는 흔적들이, 무한한 흔적들이 담긴 타자의 얼굴이 나를 응시한다. 이 타자의 얼굴 가운데 나와 상관이 없는 것, 내가 응답하지 않아도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 p.307~308 동물들이 우리와 다른 존재라는 것, 타자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동물들을 우리의 기준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횡포를 피하거나 적어도 줄일 수 있다. 동물들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은 그들의 타자성을 파괴하고 박탈하는 조처임이 분명하다. 동물들을 타자로 대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권리를 부여할 수 있으나, 그들이 의무를 행하게 할 수는 없다. 의무와 권리는 우리 영역의 규정이지, 타자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호적이거나 호혜적인 관계인 듯 보이는 것들은 대개―동물원의 우리에 가두고 관람의 대가로 먹이와 보살핌을 제공하는 경우처럼―인간이 규제하는 틀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따름이다. 반려동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서 타자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언어 너머에서 오는 그들의 호소나 요구와 관련되는 것이지, 우리의 예측이나 기대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 p.361~362 |
철학의 슬픔을 넘어 기쁨으로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아마추어 정신의 프로’가 필요하다 슬픔과 기쁨은 대칭적이다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지적 여정 철학자 문성원이 『철학의 슬픔』(2019)에 이어 후속작 『철학의 기쁨』을 펴냈다. 전작인 『철학의 슬픔』이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외도〉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후속작인 『철학의 기쁨』은 에드바르 뭉크의 〈태양〉을 전면에 내세운다. 가장 오래된 학문이지만 또 가장 새로워야 할 학문인 철학이 위기와 위축, 슬픔을 맞던 때를 차분히 곱씹던 것을 넘어 마치 상반된 듯 보이는 ‘철학의 기쁨’을 논한다. 그렇다면 철학이라는 학문에 어떤 새로운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아니면 철학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이 급작스럽게 변화한 것일까? 저자 문성원은 “슬픔이 좌절이나 상실에서 비롯하는 느낌이라면, 기쁨은 유혹이나 보상으로 생겨나는 느낌”이라고 규정하면서, 철학이 위축과 반성, 슬픔의 시간을 맞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나름의 탐구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면, 그 성과를 통해 주어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철학의 기쁨’과 ‘철학의 슬픔’은 상반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아무리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더라도,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따뜻함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뭉크의 〈태양〉에서 햇살이 다양한 색조를 띠며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것처럼,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저자의 글 하나하나가 독자를 그 햇살들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아마추어 정신의 프로가 필요한 시대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철학적 향유 현대 프랑스 철학, 특히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자크 데리다 철학을 전공하여 여러 권의 관련 책을 번역하고 논문을 집필한 저자는 그야말로 프로 철학자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는 부제로도 밝히고 있듯이 ‘아마추어 정신으로 철학하기’를 주장한다. 흔히 비전문가의 서툶이나 가벼움 등을 연상시키는 아마추어 자세 혹은 정신을 ‘전문성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탐구 정신’으로 재해석한 그는 몸소 다양한 분야와 주제, 장르를 넘나드는 철학적 향유를 보여 준다. 물론 저자가 주로 레비나스에 기대어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사실이다. 주제 면에서도 환대, 용서, 타자성, 정의 등 레비나스 철학과 관련된 글들이 많다. 특히 ???전체성과 무한??의 이편과 저편?은 레비나스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 봐야 할 글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논의가 철학 텍스트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각 주제마다 관련된 우리의 현실이 언급되며, 연관된 문제의식하에서 논의가 전개된다. 필요에 따라 레비나스와 데리다 말고도 발터 벤야민, 루이 알튀세르,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의 철학자들이 불려 나온다. 현대 철학의 얼개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는 글들이다. 그런가 하면, 생물학과 심리학 등 현대의 과학 지식에 대한 참조에도 인색하지 않고, 영화와 예술 작품을 끌어들여 논의하는 대목도 많다. ?동일자적 시간과 타자적 시간?에서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와 그 원작인 필립 딕의 소설이 다루어지며, ?헤겔 바깥의 헤겔?에서는 이창동의 〈버닝〉이 무라카미 하루키와 윌리엄 포크너의 원작 소설과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이렇게 장르를 넘나드는 유연성과 함께하는 잘 읽히는 문장과 세심한 표현은 ‘아마추어 정신’을 지닌 ‘프로’에 값한다. 독자에 대한 환대, 일화로 쉽게 풀어 나간 철학 “자네는 무엇 때문에 사나?” “철학자는 창고지기라네.” “이문열 씨, 당신은 프로가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한국 교수들이 나는 괴테를 전공했다, 나는 뭐 헤겔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괴테는 누굴 전공한 거고 헤겔은 누굴 전공한 거야?” “적어도 지금 시대에 철학을 한다고 하면, 뇌과학, 인지과학 정도는 기본적으로 공부하시고 하셔야 그게 현대적 의미의 철학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위 인용구들은 이 책에 담긴 일화들 속에서 뽑은 것이다. 저자는 골치 아픈 ‘따져 생각하는 일’인 철학을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겪은 여러 일화를 통해 쉽게 풀어 나간다. 레비나스 철학 전문가답게 독자를 철학 논의에 친근하게 끌어들이려는 ‘환대’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강연을 듣듯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저자가 어떻게 철학에 입문하게 되었고 어떤 공부를 해 왔으며, 철학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주체의 내부보다는 외부에 비중을 두는 외재성의 철학에 천착해 온 그의 지적 여정을 때로는 웃고 때로는 고민하고 때로는 공감하며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철학의 위기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포착하는 그의 시선 속에서 철학의 쓸모와 반등하는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