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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1. 1941년 11월 옌안, 1차 심문2. 1933년 5월 목포3. 1933년 9월 난징4. 1935년 3월 상하이5. 1942년 9월 옌안, 2차 심문6. 1936년 8월 조선7. 1945년 8월, 조국을 향해8. 1948년 평양9. 1957년 3월 베이징, 3차 심문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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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독립을 위해 끝까지 투쟁한 항일지사 정율성은 중국인들이 열광하는 위대한 음악가로도 기억되고 있다. 그는 어쩌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사회주의자가 되어야만 했을까. 1945년 광복 이후로 그는 왜 고향인 광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과 중국을 전전해야 했을까. 중국에서도, 북과 남에서도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던 영원한 이방인 정율성의 일대기를 이 책에서 만난다.1914년 광주에서 출생한 정율성은 1933년 형을 따라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했고, 음악을 공부하는 한편 의열단으로서 활동했다. 1930년대 중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자와 대치한 군대는 마오쩌둥의 공산당 군대가 유일했는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본거지였던 타이항산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과 한국 민중의 해방이 실천에 옮겨질 수 있도록 해주는 장소였다. 조선의 해방을 위한 투쟁 과정 중 그는 옌안에서 본격적인 공산당원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이 되자 정율성이 속한 조선의용군은 북한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으로 각 정부가 세워진 한반도에서는 무정이 지도하고 있는 조선의용군과 김구가 주도하고 있는 임시정부 모두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해방된 조국에 입국하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옌안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가」를, 평양에서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며 북한 인민군의 사기를 북돋았던 정율성의 행적에 대해서 일부의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냉전주의적 유물이다. 그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억압에 맞서 투쟁했던 항일운동가들이 불가피하게 공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조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염원했고 자신의 음악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자랑스러운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배척되었던 정율성의 삶과 정신을 이 책에서 다시금 조명한다.‘작가의 말’ 중에서나는 이 소설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억압에 맞서 투쟁했던 항일운동가들이 그 시절 불가피하게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그들과 손잡았다는 이유로 배척되고 있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썼다. 정율성은 뛰어난 음악가였고 불굴의 항일 전사였다. 그는 중국에서 공산당에 입당했고 해방 이후 북한으로 들어가 당의 방침에 따라 북한 공산당원이 되었다. 옌안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가〉를, 평양에서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했다. 까닭은 그가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교조주의, 개인 숭배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그가 친일 행위를 했던가? 일본제국의 특무(간첩)였던가? 만주국 혹은 관동군의 장교가 되어 독립지사들을 잡아넣고 고문하고 살해했던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강점하고 아시아를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넣을 때, 어떤 사람들이 가족을 돌보지 못한 채 헐벗고 굶주리고 고문을 받으며 혹은 겨울 골짜기에서 죽어갔는가를 냉정하게 돌아보기를. 이 소설의 의도는 오직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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