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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01. 작대기의 시작점 #02. 작대기의 평행선 #03. 작대기의 충돌 사태 #04. 사랑은 바나나 우유를 타고 #05. 오피스 와이프 #06. 배익헌이 누구야? #07. 허락 없이 뻗어 나가는 작대기 <2권> #08. 불붙은 작대기 #09. 폭탄을 품은 낙하산 #10. 마음의 불협화음 #11. 돼지치기 소녀 #12. 추락하는 시청률에 바닥은 있다 <3권> #13. 물동리의 리얼 수퍼스타 #14. 관계자의 은밀한 민망함 #15. 갈등 따윈 필요 없어 #16. 다른 작대기의 훼방 #17. 사랑은 팬질을 타고 #에필로그 #외전 - 잘못된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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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얼 모니터 앞에 앉은 은유는 평소에 잘 안 쓰던 안경까지 찾아 쓰고 열심히 딸깍딸깍 손을 움직였다.
드디어 마지막 수정 작업이 끝났다. 이제 이걸 인쇄소에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났다는 홀가분한 마음에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은유는 인쇄소 웹하드에 PDF 파일 업로딩을 마쳤다. 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찾아 익숙한 번호를 찾아 눌렀다. “홍차 언니, 저 끝났어요.” - 진짜, 진짜? 보여줘, 보여줘. “언니 이메일로 보내놨으니까 함 보세요.”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면서 컴퓨터 앞에서 대기 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수화기 안에서 홍차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이내 꺄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 꺄아, 너무 멋지다. 은유야, 이번엔 진짜 예술이다. 어떻게 이런 구도가……? 이런 포즈를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서 다 찍을 수가 있지? 역시 넌 천재야! 아니, 위대해! “흐흐흐흐흐.” 늘 듣던 칭찬이기는 하지만 몇 번을 들어도 찬양가는 즐거운 법. 은유는 홍차의 열광 어린 칭찬에 여유롭게 웃었다. “방금 넘겼으니까 늦어도 내일 모레면 나와요.” - 인쇄 감리는 언제 보러 오래? “내일 낮에요. 두 시에 가면 돼요. 언니도 같이 가실 수 있으시죠?” - 당연하지. “근데 언니 애기들은?” - 아, 우리 애들. 다섯 시까지 유아원이랑 학원 가고 해서 괜찮아. 그럼 내일 두 시에 보자. 으흐흐흐흐흐흐. 오지도 않은 내일의 기쁨을 벌써부터 미리 만끽하고 있는 모양이다. 웃음소리와 함께 무릉도원에서 ‘홍차’라고 불리는 홍다연이 전화를 끊었다. [전도하, 5th element - photo by Metaphorism.] 크게 박혀 있는 멋들어진 글자 포즈를 보면서 은유는 계속해서 홀로 씨익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만족스런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책상에 놓인 휴대전화가 불붙은 듯 계속 진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화벨이 끊기는가 하면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신호음이 연속 울리는 통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독립한 지 겨우 반년. 매일같이 살아는 있나, 밥은 잘 먹고 있나, 식구들이 돌아가며 전화해오는 통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독립하는 조건으로 할아버지에게 매일 전화한다는 약속을 했는데, 전화만 하면 언제 집에 올 거냐고 물으시는 통에 거의 이틀에 한 번은 본가에 가서 자기 일쑤였다. ‘마음껏 팬질하게 해주신다더니만……, 왜 이렇게 간섭이시래?’ 마음속으로 투덜투덜 불평을 해보았지만 직접 발설할 수는 없었다. 은유가 진짜로 팬질을 하는 것에 대해선 터치가 별로 없는지라 의리상 이렇게 뒤로 구시렁거리는 게 다였다. 다시 또 또로롱 메시지 도착음이 들렸다. 은유는 마지못해 휴대전화를 끌어당겨 화면을 열었다. “아이고, 맙소사.” 은유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흘렀다. - 할아버지 입원했다. - 너 뭐 하니? 빨리 안 찾아뵙고. - 할아버지 뿔나심. - 이은유, 병원으로 당장 와. 똑같은 내용의 메시지들이 열 개 이상. 아버지, 엄마, 큰오빠, 새언니, 작은오빠, 작은아버지, 숙모들까지. 그 모든 메시지를 받아 안느라고 너무 바쁜 이은유의 불쌍한 휴대전화는 거의 방전 직전이었다. “네, 네 알았습니다. 가요, 가!” 단, 30분 뒤에. 일단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은유는 불이 나는 스마트폰을 자주 들고 다니는 커다란 발렌시아가 모터백 속에 그대로 던져 넣어버렸다. 그러고 난 뒤 여유작작, 이제는 집보다 더 익숙해진 팬사이트에 접속했다. 접속을 하자마자 그녀를 맞이한 것은 역시나 메시지함의 알림 소리. 그녀의 게시판 쪽지함에 쪽지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폭발하고 있었다. “흐흐흐.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로군.” 은유는 가진 자의 거드름을 잔뜩 부리며 게시판을 열었다. 그녀의 메시지 함에 불통이 난 것도, 할아버지가 입원을 하셨다는데 당장 달려가지 못할 정도로 바쁜 이유는 다 이것. 바로 은유가 발간하는 전도하 님의 5번째 사진집 때문이었다. 은유가 찍어 발간하는 전도하 사진집은 딱 100권만 인쇄하는 게 원칙이었다. 사진을 찍은 은유가 3권, 도우미 홍차 언니가 2권, 그리고 5권은 전도하 소속사로 보낸다. 그리고 남은 90권을 판매하는데 40권은 한국, 25권은 일본, 25권은 중화권에 풀었다. 중화권이라 하면 중국, 대만, 홍콩, 동남아시아를 일컫는다. 그 넓은 지역, 수십만의 팬들 몫으로 겨우 25권만 할당되니 메타포리즘의 사진집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면 무릉도원 게시판은 거의 사생결단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가끔 출간된 사진집의 스캔본이 올라와서 돌아다니기도 하지만(심지어 그 스캔본을 누가 스캔했는지도 귀신같이 알아내어 경고하는 일도 있었다.) 한정판 모든 책에 다 붙어 있는 시리얼 넘버 스티커와 도장 때문에 감히 누구도 몰래 인쇄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전도하의 소속사마저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무릎 꿇은 메타포리즘 님이 아니던가. 이은유-아이디 메타포리즘(metaphorism)! 일본에서는 메타 상, 중화권에선 메타 선생으로 불리며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속칭 메타 님이라고 불리는 그녀. 전도하의 대표 팬사이트인 무릉도원 게시판에 이번에 나올 다섯 번째 사진집 표지의 작은 이미지와 샘플 사진 몇 장을 올리면서 은유는 계속해서 히죽히죽 웃었다. 사회에선 루저이고 실패한 도피유학생에 우울증 환자 히키코모리에 불과했지만 무릉도원 안에서나 전도하 팬덤에서만큼은 이은유-메타포리즘은 모든 이들에게 숭배받는 위대한 분이었다. 처음 무릉도원에 등장한 메타 님이 올리는 사진을 보고 다들 파파라치와 다를 게 뭐가 있냐고 무시했다. 하지만 계속 올라오는 사진마다 감도는 파격적인 구도나 미묘한 감성. 절대 아무나 만들어내지 못하는 예술적 감각, 무엇보다 자체보정까지 해서 올리는 그 섬세함에 이내 메타 님은 진정한 ‘찍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하 님 동공에 비치는 그림자까지 찍어낼 정도로 대단한 카메라 기종 때문에 돈지랄이라는 욕도 먹었지만, 그 돈지랄 덕분에 우리 눈이 호강하니 그저 좋은 거 아니냐고 메타 님을 극구 옹호하는 부류도 상당수였다. 빠질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의외로 은유 자신이 할 줄 아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대학도 원래 디자인 전공이라서 예술적 감각도 있고, 사진도 좀 찍어보니 술술 늘었고, 쪼작쪼작 디자인도 해보니 잘 되어서 팬질하는 웹사이트도 만들 수 있었다. 영어도 잘하고 어릴 때 배운 일어나 중국어도 조금 열심히 하니 또 의외로 쓸 만했다. 3년 전 막 스타로 발돋움하던 전도하의 초기 팬덤은 거의 이은유의 성장과 맞물려 있었다. 대표 팬사이트 무릉도원을 다시 만들 때도 적극 참여했지, 뭔가 모금해서 조공 바칠 때도, 심지어 해외에 홍보할 동영상 편집에 은유-메타 님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국어 번역에 있어서도 영어, 일어, 중국어 3개 국어를 기본으로 하다 보니 그녀 이은유, 메타포리즘(metaphorism)의 아이디가 전 세계에 퍼지는 데까지는 금방이었다. 은유는 디자인을 공부했던 사람답게 일단 팬덤이나 전도하에게 자기의 존재를 남기기 위해선 확실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안 그러면 더없이 넓고 광대한 팬덤의 세계에서 묻히기 십상. 부족할 것 없는 집안에서 물심양면 팍팍 밀어주는 은유의 빠순질 파워를 누가 이길 것이냐. 일단 전도하의 스케줄은 방송사 피디인 둘째 오빠 성원이 주로 알아봐줬고, 뭔가 꼭 알아내야 할 게 있다면 은유는 자신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서 심지어 새언니의 사돈의 팔촌의 당숙 같은 사람에게까지 부탁해서라도 반드시 얻어내고 말았다. 물론 가장 큰 힘은 할아버지에게서 얻어낸 한도 무제한 익스프레스 블랙 카드! 팬덤에서 그녀 메타 님은 9센티미터 이상의 스틸레토 힐, 언제나 얼굴 반을 가리는 고글 선글라스를 쓴 채 은색 BMW를 타고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메타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을 때는 사진을 찍을 때밖에 없었다. 그때도 얼굴 반을 덮는 뱅 헤어스타일과 진한 화장 때문에 그녀의 진짜 얼굴을 제대로 본 이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당연히 신상명세 역시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악질 사생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팬이라면 누구나 부러워 마지않는 대포 같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 속사포로 연타를 찍고 유유히 사라지는 메타 님. 화끈한 조공으로 도하 님을 물심양면 서포트 하는 메타 님. 마음도 좋으시지. 그렇게 촬영한 사진들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사진들도 그냥 현상하는 게 아니었다. 어떤 사진들은 슬라이드 필름으로도 현상했다. 당연히 해상도고 뭐고 전도하의 모공이 보일 정도의 퀄리티를 자랑했다. 적당히 안 좋은 건 포토샵으로 가려주는 센스 발휘는 기본이었다. 사진집뿐만 아니라 메타 님이 푸는 영상들 역시 대박이었다. 전도하의 전 세계 모든 콘서트의 사진은 기본이고 심지어, 아니, 어떻게 저 사진을 찍으면서 저런 동영상까지! 싶은 것마저 있었다. 물론 그런 동영상은 실상 프로의 도움을 받아 찍은 것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 팬들은 없었다. 은유는 관중석 제일 맨 앞자리에서 무거운 카메라 들고서 사진을 찍고, 오빠의 지인이자 직업 카메라맨이 2층의 앞자리에서 영상카메라로 촬영한 것이었다. 이러니 당연히 메타 님 영상이 갑 오브 갑이고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퀄리티인 것은 당연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구하기 어려운 고화질의 동영상과 사진을 거침없이 풀 때마다 도하 팬덤 안의 메타 님 팬들은 늘어만 갔다. 그뿐만 아니라 메타 님이 비정기적으로 내는 사진집, 한국에서만 40권 푸는 그 사진집은 로또 복권이나 다름없었다. 팬계의 영웅, 팬계의 전설 메타포리즘, 그 이름을 전 지구상에 날리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메타 님, 메타 님, 우리의 메타 님. 전도하의 팬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메타포리즘. 오오오, 메타 님을 찬양할지어다. 가방 안의 휴대전화가 또 부르르르거리기 시작했다. 은유는 잠시의 자아도취에서 깨어나 툴툴거리면서 일어나 책상 앞을 떠났다.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에이, 할아버지도 참……. 화끈하게 밀어주신다고 하셨으면서도 가끔 앙탈이셔.” 은유가 이번에 도하의 5번째 사진집을 제작하게 된 것은 할아버지 이동관 옹이 또 입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도하 님이 한국 연예인 최초로 카타르 도하 명예시민이 되시고. 또 도하 국제공항 모델도 되시고. 축하를 해주셔야지 되레 분노를 하시다니. 에휴.” 은유의 할아버지 이동관 옹은 1년에 두 번 정도 입원한다. 하나밖에 없는 고명손녀딸 은유의 대책 없는 빠순질에 혈압이 올라서도 아니요, 저것이 언제 사람 되나 걱정에 못 이겨서도 아니다. 나보다 전도하 저 어린놈이 더 좋단 말이지 하는 질투에 못 이겨서였다. 이번의 입원도 역시 그 이유였다. 2주 전에 은유는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통보도 하지 않고 카타르의 도하에서 열렸던 전도하의 쇼케이스에 따라갔다 왔다. 하필이면 왜 카타르 도하인가. 이번 시즌부터 카타르에서는 전도하가 나온 드라마 ‘고기만두 여섯 개’가 방영되었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꽤 인기몰이를 했지만, 특히 카타르에서의 ‘고기만두 여섯 개’의 인기는 상상초월이었다. 시청률이 무려 80퍼센트나 나왔으니까. 드라마로 큰 인기몰이를 하게 된 그즈음에, 운도 좋지, 카타르 도하 국제공항과 한국 인천국제공항이 자매결연을 맺게 되었다는 발표가 났다. 인천공항 전속모델은 전도하였고 심지어 ‘도하’라는 도시 이름과 배우 이름이 같다는 희한한 우연까지 겹쳐 부랴부랴 카타르 방송국이 주연 여배우와 함께 도하를 초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도하는 이름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도하의 명예시민증까지 받았으며 덤으로 도하 국제공항 모델까지 꿰차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이건 약속이 틀리잖아, 약속이! 말도 없이 나가서는 일주일이나 있다 온 거잖아!” 이동관 옹은 일단 애지중지하던 손녀가 말도 없이 허락도 받지 않고 그 험한 외국 땅에 놈을 따라 일주일이나 다녀온 게 원통하고 분했다. 그리고 거기서 전도하인가 뭔가 하는 애와 같은 공기를 마셔야 한다고 그놈이 숙박한 별5성급 호텔에서 묵었다는 계산서까지 날아왔다. 그 고지서로도 이미 뒷목을 잡을 판인데, 전도하를 따라다니며 은유가 써제낀 그 많은 돈들, 도하에서 지르고 온 많은 난행들에 결국 참다못하고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것이다. 물론 도하에 가면서 아무 말도 안 한 그녀 은유가 잘못하긴 했다. ‘하지만 간다고 하면 난리 치시거나 같이 간다거나 아니면 작은오빠를 딸려서 보내실 게 뻔한데 어떻게 말을 하고 갈 수 있단 말이에요?’ 가방 속 휴대전화가 다시 요동을 쳤다. “가요, 가. 은유 가요.” 듣는 사람도 없는데 중얼거리면서 은유는 자신의 덩치보다 더 큰 가방을 챙겼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