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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불붙은 작대기
#09. 폭탄을 품은 낙하산 #10. 마음의 불협화음 #11. 돼지치기 소녀 #12. 추락하는 시청률에 바닥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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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눈을 응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존이 손으로 더듬어 바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마지막 남은 위스키를 한꺼번에 마셔버렸다.
“올라가지.” 그가 먼저 벌떡 일어나 계산을 치렀다. 은유도 존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16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단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안은 둘의 숨소리 말고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끝까지 아무 말 없이 존은 은유와 세연이 같이 묵는 방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럼 잘 자.” “네, 실장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막 은유가 돌아서서 객실 문을 열려 하는데, 갑자기 존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자신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그대로 문 쪽으로 은유의 몸을 밀어붙이며 강렬하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처음에는 놀랐다. 등에 와 닿는 차가운 나무문, 양 볼을 감싼 뜨거운 손, 어디선가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까지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두 입술이 부딪친다. 말라서 조금 까끌거리는 존의 입술에 촉촉하고 매끈한 분홍빛 입술이 마주 닿았다. 너무 놀라 동그래진 눈동자에 존 자신의 모습이 조그맣게 박혀 있었다. 존 자신이 그렇듯이 지금 은유의 머릿속에서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지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으리라. 존의 커다란 손이 은유의 양 볼을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침묵으로, 하지만 진지한 응시로. 그것이 허락을 구하는 것임을 은유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남자와 여자 사이, 이토록 뜨겁고 아슬아슬한 키스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경험한 바 없지만 은유는 곧바로 알았다. 그녀는 이 남자와 정말 뜨겁고 감미롭게 첫키스를 하게 될 것임을. 잠시 망설이던 은유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놀라서 깜박거리던 눈이 감기고 긴 속눈썹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는 아름다운 허락처럼 살짝 발끝을 치켜들고 존의 입술 아래 나부시 분홍빛 부드러운 꽃봉오리 같은 입술을 열었다. 몇 초나 계속되었을까? 입 속으로 들어온 남자의 혀가 강렬한 힘과 의지를 담고 분홍빛 입술 속의 자그마한 혀를 유린했다. 그녀의 순진한 영혼을 뿌리째 뒤흔들고 흡입하는 치명적인 키스. 타인, 그것도 남자의 입술이 이토록 부드럽고 감미로우면서도 강하고 슬프도록 유혹적일 줄이야. 하나도 무섭지 않았고 하나도 징그럽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처음부터 이러기로 정해진 것처럼. 그러니까 마치 운명처럼! 그녀의 모든 것이, 그의 모든 것이 부딪친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서로 엉킨 부드러운 혀 사이로 전해지는 감각의 기쁨이 봄날 홍수처럼 젊은 육체에 집중되는 듯했다. 하아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은유가 조금 몸을 뒤로 젖혔다. 호흡 곤란을 느낀 것이다. 얼굴을 든 존의 목울대도 급박하게 울룩거리고 있었다. “들어가.” 수줍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고. 거의 울 듯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기 이를 데 없었다. 속삭이는 존의 목소리가 약간 쉬어 있었다. “문 꼭 잠그고.” “네…….” “내가 아무리 열어달라고 간청해도 절대로 열어주면 안 돼, 알았어? 순진한 아가씨야.” 존이 은유의 손이 아직도 움켜쥐고 있는 카드키를 빼앗아 문을 열었다. 강한 손으로 은유의 몸을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몸과 마음에 치명적인 흔적을 새겨놓은 채, 텅 빈 복도 안에 핑크빛 향기를 가득 남겨놓은 채, 도망치듯이 은유가 방으로 들어갔다. 존은 한동안 그 문에 이마를 대고 서 있었다. ‘아, 위험할 뻔했어…….’ 문 저쪽, 방 안으로 들어간 은유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방 안에 들어오기는 했는데, 이미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이 도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어떡해, 어떡해? 나 엄청난 짓을 저질러버렸어…….’ 은유는 침대에 폴짝 엎어져 베개에 얼굴을 푹 묻어버렸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고, 절대로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버렸다. 키스라니! 오 마이 갓, 키스라니. 그것도 존 실장님과의 키스라니. 다른 누구도 아닌 도하 님의 매니저 명왕 존 실장과 해버리다니.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생각만 해도 화끈화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눈앞이 어찔하다. 메타와의 마음이 뒤섞여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미치겠다! 내가 진짜 미쳤나 봐!” 당장 내일 아침에 존 실장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데굴데굴 180도로 굴러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제 나 회사 그만둬야 하는 건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창 재미있어지려고 하는 중인데. 열심히 보람을 느끼며 인생의 새로운 기쁨을 배워가는 중인데, 같은 방에서 일하는 상사와 키스를 해버렸으니, 사직을 해야 한다고. “으아! 으아아! 내가 미쳤어, 미쳤어.” 메타가 아닌 이은유도 천장을 향해 하이킥을 날렸다. 억울해, 억울해. 내 죄도 아닌데 왜 내가 회사를 그만둬야 해. 난 그냥 키스 한번 한 건데.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횡령을 한 것도 아닌데 왜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데? 은유가 침대에서 발딱 일어나 앉았다. ‘내가 지금 내 상사 존 실장님하고 키스를 한 거야? 아니면 그냥 그 남자 존하고 키스를 한 거야?’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호감을 느낀 남자와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나듯 필이 팍 통해 사고를 친 건지 분석을 해야 했다. ‘적어도 이건 성희롱은 아닌 것 같아, 일단.’ 비록 처음 시작은 그가 했지만, 강제로는 아니었으니까. 분명히 그는 은유의 의사를 살피고 허락할 때까지 기다려주었으니까. 살포시 눈을 감고 영화 주인공처럼 키스하기 편하게 발끝까지 들고 먼저 입술을 열어준 건 은유 자신이 아닌가. 이건 강제로가 아니라 서로의 자발적인 의사로서 이루어진 러브액션이지, 성추행은 분명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히 그 키스의 순간, 은유의 머릿속에서는 종소리가 울리고 눈앞에서는 별이 반짝거렸으니까. 좋았다. 정말 좋아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몸의 힘이 빠지면서 그냥 그 남자 가슴에 녹아들었으니까. 키스하던 그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랄 정도였으니까. 그 키스 한번으로 이은유는 확실히 존 도라는 남자의 여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으아! 미치겠다!” 은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렸다. 존 실장님, 아니, 존 도 그 남자, 회사 업무에만 능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키스에도 본격적인 소질이 있었다. 선수 중의 선수라고나 할까? 확실히 전문가였다. 갑자기 화가 치밀고 억울하기도 하고 짜증이 났다. 은유 자신은 오리지널 첫 키스인데 그 남자는 그렇게 잘한다는 말? 아까의 키스가 그 남자한테는 첫 번째가 아니란 말이지? ‘기분 엄청 푹푹하네.’ 그나저나 이건 분명히 해야 했다. 그 남자는 은유에게 왜 키스를 한 걸까? 오다가다 술 한 잔도 했으니, 갑자기 귀여워진 여직원을 성희롱? 아니면 한 남자로서 갑자기 은유에게 반해서 작업 들어온 거? 은유는 이불을 휙 젖히고는 휴대전화를 찾았다. 잔뜩 복어처럼 볼을 부풀리고 카톡으로 존 실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늘 자신 없고 소심한 예전의 이은유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첫 키스를 순식간에 해버린 여자 이은유라면 그 상대 남자에게 확인할 권리가 있었다. 순진하면 용감하다고, 은유는 존의 얼굴을 보고는 절대로 못할 말을 문자로 거리낌 없이 해버렸다. 그 답을 듣지 못하면 오늘 밤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실장님, 우리가 왜 키스한 거예요?] 일 분 후에 답장이 왔다. [좋아서.] 순간적인 충동으로 성희롱을 한 것은 절대로 아니로구나. 은유는 한숨을 폭 쉬었다. 좋기는 존 실장님도 좋았구나. 뭔가 안도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은유는 좋아서 한 키스인데 그 마음이 은유 혼자만의 것이라면 몹시 슬펐을 것이다. 은유는 잘근 입술을 깨물다가 다시 문자를 찍었다. [실장님, 저한테 반하셨어요?] [응. 그런 거 같아.] 그런 것 ‘같아’라고? 은유는 다시 입을 비죽였다. 순식간에 화가 나려고 했다. 이 남자가 감히 나한테 키스를 해놓고도 확실한 제 마음을 모른다고? 은유의 분노를 느낀 걸까? 삼십 초 후에 다시 다급히 문자가 떴다. [아니, 확실히 그래.] 그럼, 그래야지. 은유는 콧구멍 평수를 넓히고 콧김을 핑핑 내쏘며 진정을 하려 애를 썼다. 반하지도 않은 여자한테 키스하는 남자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려 생각했다. [내일 실장님 얼굴을 어떻게 보죠? 나, 엄청 부끄러울 거 같다고요.] [난들 안 그런 줄 알아? 그런데 은유 씨는 나하고 왜 키스했니?] 어라, 이 남자도 지금 나처럼 고민하고 있나? 내가 그런 것처럼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 같은데? 은유는 삽시간에 긴장했던 마음이 해실해실 녹아드는 것을 느꼈다. 늘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존 실장이 슬쩍 곁눈질을 하며 은유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 같은 두근거림이 그 문자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아까의 키스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아무 여자에게나 한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뭐라고 답하지? 망설이다가 은유는 솔직하게 답변했다. [몰라요.] [모른다니? 어떻게 나랑 키스해놓고 자기 마음을 몰라?] 은근히 발끈한 그 남자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은유는 한 오 분쯤 망설이다가 솔직한 그 마음을 문자로 찍었다. 아까의 키스는 분명히 예기치 못한 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났지만, 조심스럽게 이어졌다가 예쁘게 계속되고 사랑스럽게 달콤하게 마무리된 건 두 사람의 마음이 맞닿았기 때문. 내가 미쳤나 보다고 자책은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좋았다. 아주 좋았다. 첫 키스가 그런 느낌이라는 것이, 그 첫 키스의 상대가 좋아하고 존경하고 반한 남자 존 실장이었다는 것이. [아무래도…… 나도 실장님하고 같은 마음인가 봐요.] [은유 씨도 나한테 반했어?] 삼십 초가 되지도 않아 득달같이 날아온 문자. 야호 하고 만세라도 부르고 있을 그 남자의 얼굴이 절로 떠올랐다. [우리, 사귈래?] 엄마야! 은유는 다시 날아온 존의 문자를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 남자, 지나치게 정직한 직구였다. 게다가 약간 막무가내라 할 정도로 일직선이었다. 너한테 반했다는 고백. 키스를 하고 나서 십 분 만에 당장 우리 사귈래? 라는 제안을 하다니. 그런데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실장님과 비서가 연애를 하는 것은 직업윤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녀에게는 비밀이 있지 않은가. 그녀가 도하 님의 광팬 매타라는 것. 존 실장과 사귀다가 그런 것이 나중에 밝혀지면 난리가 나도 아주 크게 날 소지가 있다. 그래서 석 달만 일하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자고 결정했건만. 은유가 묵묵부답. 답변이 없자 답답했던 것이리라. 존에게서 재차 문자가 날아왔다. [잘해줄게. 최선을 다해서! 우리 연애하자.] [음…….] [나 좀 괜찮은 남자거든. 은유 씨한테 엄청 반했고. 많이 좋아해. 성실하게, 다정하게, 많이 잘해줄게. 사귀자.] 그가 아주 다정하고 무척 성실한 연인이 될 거라는 것. 아주 달콤한 연인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여자의 영혼과 몸을 뒤흔들어버리는 치명적인 키스도 잘하는 남자였다. 은유는 아직 존과의 첫 키스에서 느껴버린 황홀함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손가락이 제멋대로 휴대전화의 키패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한테만 잘해줄 거죠? 다른 여자한테도 나만큼 잘해주면 삐칠 거예요.] [어떻게 다른 여자한테 은유 씨만큼 잘해주겠어? 나 그런 남자 아니야.] 그런 남자 아니기는? 지난번 다큐멘터리 서 감독하고 엄청 친한 척 웃으면서 이야기도 해놓고? 명함도 주고받아놓고? 은유가 입을 비죽였다. [다른 여자들한테도 나한테처럼 멋있게 웃어주면 그날 바로 헤어질 거예요.] [질투쟁이.] [응, 나 엄청 질투 심하고 어리광쟁이니까. 엄청 실장님한테 떼쓰고 귀찮게 하는 여자 될 거예요.] [환영. 나도 은유 씨 못지않게 엄청 질투쟁이 남친 될 거니까.] 에헤라디여! 삼십 분 만에 소심증 히키코모리 우울증 환자였던 이은유에게 키 크고 섹시 보디에다 잘생기고 가방끈 긴 데다가 돈까지 많은 완벽한 남자친구가 생겼다. 마찬가지로 인생사 하나 재미없고 일에 치여 살던 무미건조한 존 도에게도 모든 면에서 그의 스타일인 퍼펙트 러블리 큐티 여자친구가 생겼다. 바야흐로 BD 엔터 존 실장과 이은유의 인생에 봄날이 시작된 것.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이렇게 해서 은유는 모든 오피스 걸들의 로망인 근사한 실장님과의 사내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