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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장 리틀칼리지의 학생 정원과 공원 작은 평화 한 조각: 졸업 전시 자연을 배우는 사람: 베스 샤토 가든 런던 비밀정원의 봉사자: 첼시 피직 가든 첫 번째 인터뷰: 구직 2장 런던의 정원 디자이너 마음을 나누는 협업: 나무 농원 클로이의 정원: 정원 설계의 재료 디자이너의 역할: 설계와 현장 1 감리자의 역할: 설계와 현장 2 영국가든디자이너협회 컨퍼런스 즐거움을 위한 정원: 장식과 양식 에밀리 되기: 조율하는 디자이너 3장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네모난 나무: 트렌텀 가든 내 뱃속 어딘가의 강낭콩: 플라워쇼 평화의 충전: 피크닉과 딸기와 사람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 스코그스키르코가르덴 너무 작은 정원은 없다 모두를 위한 정원: 위즐리 정원 두 번째: 인터뷰 이직 런던의 크리스마스 에필로그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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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하고 흐릿한 겨울을 보내고 나니 왜 영국이 이토록 정원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는지 자연스레 깨닫게 됐다. 그들에게 정원이란 여유와 유락 遊樂 이기 이전에 위안과 희망의 공간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 봄에 피어날 구근을 심어주고, 겨울 동안 죽은 듯 보이지만 작게 숨을 고르고 있는 식물들을 곁에 두며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러다 보면 봄을 기다리는 희망과 함께 겨울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대학 때 사진학 강의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다.” 아침에는 저녁을 기다리고 밤에 잘 땐 다음 날 아침을 기다리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기다림이며 결국은 삶도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과 같다는 이야기였다. 불교에서는 현재에 충실하라 하고 명상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고 하지만, 우리 같은 중생의 삶을 이끄는 건 기다림과 기대, 즉 미래에 있다. 정원은 그렇게 우리를 현재에 집중하게 하면서 또 내일을 기다리게 한다. --- p.24 뿌리분이 예쁘게 포장된 나무들이 하늘 높이 매달려 도로에서 뒷마당으로 옮겨졌다. 화단에 영양분 가득한 보슬보슬한 흙이 채워지고 나면, 이제 우리가 나설 타이밍이다. 현장 직원들이 모종판의 식물을 꺼내 도면에 있는 대로 배치해놓고, 도면에 없거나 긴가민가한 식물은 따로 빼놓는다. 그러면 우리는 꽃꽂이를 하는 것처럼 모종의 배치를 조금씩 바꾸고 정리하면서 우리가 상상했던 모습과 비슷하게 연출한다. 같은 꽃을 갖고도 플로리스트마다 다른 느낌의 꽃다발을 만드는 것처럼, 정원 식물의 현장도 비슷하다. 현장에 직접 가야만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현장을 많이 접할수록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식물을 다루는 일이다. --- p.117 내면에서 답을 찾아가는 글쓰기와 달리 디자인은 얼핏 보기에 외부의 자극이 더 필요한 작업 같아 보인다. 하지만 한 시간의 작업을 위해 아홉 시간의 여백이 필요하다는 맥락에서는 디자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외부의 자극 없이도 반짝이는 알맹이를 창조해내는 천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듣고 본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러고 나서 얻어진 그 알맹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하나의 실체로서의 디자인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건 또 다시 많은 시간을 갈구한다. --- p.124 어쩌면 정원이라는 게 부유한 이들만 집 앞 마당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라, 내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어느 곳도 정원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을 추억해보면 가족 여행에서 길가에 핀 ‘사루비아’ 꽃을 따서 꿀을 빨아 먹거나, 분꽃의 까만 열매를 반으로 잘라 그 안의 뽀얀 분을 손등에 비벼보고, 또 꽃이 핀 토끼풀을 잘라 손가락지를 만들던 기억이 그 어떤 일보다 진하고 향기롭게 남아 있다. 바이오필리아(biophilla)라는 단어가 설명해주듯, 우리에게는 어느 형태로든 자연과 연결되고 싶은 본능이 숨어 있다. 도시마다 그 갈증을 채워주는 보석 같은 공간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본다. --- p.211 흙에서 중력을 이기고 올라오는 풀과 꽃은 강인하다. 그 강인함에 이끌려 쪼그려 앉아 그들과 가까워지고, 정원 일을 하기 위해 무릎 꿇는 행위는 우리를 땅과 가까워지게 한다. 그렇게 몸을 낮춤으로써 배우는 게 있다. 지금과 같은 자기표현의 시대에 나를 낮추라는 말이 시대착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를 낮춰야 나와 타인을 진정으로 볼 수 있고 또 끝없는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준다. --- p.254 |
누구나 정원을 가질 권리가 있다
영국의 크고 작은 정원, 개개인의 집에 달린 뜰을 두루 살피면서 작가는 한국의 정원 문화를 돌아본다. 주위에서 정원을 찾기 어렵고 마당 있는 집을 누리는 것은 언감생심인 한국에서 정원은 어쩌면 소수만 누리는 배타적인 공간으로 여겨지는지도 모른다. 이에 작가는 정원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연과 어떻게 교감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정원 일이라는 가장 능동적인 활동 외에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가만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의 소리를 듣는 것 모두 자연과의 교감이다. 모종삽이 아닌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가까이 사진을 찍는 것조차 말이다.”(27면) 런던의 폭등하는 집값 탓에 작은 집을 빌려 지내면서 작가는 해가 드는 창에 아보카도를 비롯한 작은 식물들을 심는다. 언젠가는 나만의 정원을 갖겠다는 희망을 품고 마을의 가든센터를 들러 다양한 식물을 보고 그 향을 맡으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꾸미는 커뮤니티 정원을 둘러보며 작가는 어느 도시에서나 그 도시의 사람들이 각자 품고 있는 정원의 풍경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불모지를 토대로 아름다운 공간을 창조해낸 베스 샤토의 정원에서 작가는 ‘자연에게서 배우는 자세’를 발견한다. 일상의 공간을 정원으로 만드는 것은 그저 그곳을 여러 가짓수의 식물로 채운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자연의 요소 하나하나에 맞는 환경과 방식을 찾아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가 어느새 그 공간을 다채로운 꽃과 풀, 흙과 나무의 공간으로 만든다. 정원을 조성하는 현장에서 작가가 맞닥뜨리는 뜻밖의 사건과 사고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정원가 실전 지침’이기도 하다. 정원 현장에서 만난 인연들이 ‘좋은 정원’이라는 일념하에 다 같이 애쓰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작가는 영국 정원 문화의 저력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깨닫는다. 영국 정원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첫 직장을 구하고 또 다른 곳으로 이직하는 이야기는 정원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쏠쏠한 조언이다. 글 곳곳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섬세하고 차분한 손길을 따라 여러 식물들을 공부하는 것 또한 이 책의 묘미다. 우리는 작가의 조곤조곤한 말투를 들으며 내가 지금 빗속 우비를 입고 자갈을 고르는 상상에 빠지게 된다. 이 땅에 더 어울리는 식물을 고르기 위한 작가의 분투, 식물의 자연스러운 습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작가의 겸양이 밴 글을 읽으며 우리는 어느새 그와 똑같은 명찰을 달고 런던 어느 정원에서 호미로 땅을 고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