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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89년째 고객 하나에 옷도 하나, 종로양복점 도전정신을 담은 등산화, 송림제화 고희 넘긴 추탕의 명가, 용금옥 피부병의 만병퉁치약, 이명래고약 *최고의 가게에서 배우는 경영 노하우1-한 우물 경영 2장 변하더라도 핵심만은 지킨다 전통의 계승과 변화를 통해 세계 속의 한복을 만든다, 보신&준 옛 주막에서 토속 음식점으로 탈바꿈하다, 마방집 외국인의 입맛까지 잡는 56년 전통 불고기, 옥돌집 우리 맛의 세계화에 앞장선다, 우래옥 *최고의 가게에서 배우는 경영 노하우2-진화 경영 3장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라 깐깐함과 치열함으로 빚은, 18번완당집 얼굴에 담긴 꿈을 찍는다, 김스튜디오 곰탕 하나에 달랑 깍두기로 60년 사랑, 하동관 *최고의 가게에서 배우는 경영 노하우3-집중 경영 4장 정신과 원칙을 남겨라 인삼뿌리마다 신용과 양심을 담아 판다, 송도삼업 100년을 이어가는 가업 3대의 전통, 광신한약방 지식무역의 물꼬를 열었다, 동남도서 도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담아 판다, 박인당 손님을 속이는 것은 곧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신일반점 *최고의 가게에서 배우는 경영 노하우4-신뢰 경영 5장 문화상인이라는 자부심과 보람에 산다 90년 된 붓의 명가, 구하산방 70년을 이어온 고서의 전당, 통문관 사실을 담는 자세로 민족의 뿌리까지 찾는 족보전문출판사, 회상사 한국영화의 산 역사를 증명하는 문화결정체, 단성사 *최고의 가게에서 배우는 경영 노하우5-문화 경영 6장 정은 나누고 옛 맛은 지킨다 정갈한 마음으로 긴 생명력을 유지하다, 동래할매파전 변함없는 해장국의 고향, 청진옥 한 가지 메뉴로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문설농탕 음식은 첫째도 정성, 둘째도 정성, 부여집 대구 따로국밥의 원조, 국일따로국밥 궁중의 맛 80년, 원조낙원떡집 *최고의 가게에서 배우는 경영 노하우6-본질 경영 7장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명품을 만든다 5대째 옹고집이 숨 쉬는 옹기, 양협토기 120년 동안 선비들의 정신을 담아온 장인가, 박창영 갓방 아버지의 혼을 이어받아 동생이 깎고 형이 칠하고, 목기 지산공예 가정까지 스며든 문화상품, 안성맞춤 유기공방 *최고의 가게에서 배우는 경영 노하우7-명품 경영 8장 혜안으로 후계를 골라 천년 노포의 꿈을 쏘다 베풂의 사랑으로 천안의 명물이 되다, 학화호두과자 동네지식의 영원한 길잡이, 동양서림 단골의 인연에서 시작해 사장이 된 사연, 미진 고향집 어머니의 정성 그대로 만드는 콩나물국밥, 삼백집 *최고의 가게에서 배우는 경영 노하우8-대물림 경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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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째 고객 하나에 옷도 하나
종로양복점 고객이 만족하지 않는 옷은 가치가 없다 ‘옷은 희망의 날개다.’ <종로양복점>의 3대 주인 이경주李景柱 씨의 철학이다. 그의 그러한 철학은 강산이 바뀔 정도로 오랜 세월 양복을 만들면서 체득한 소박한 믿음이며, 그 믿음을 양복에 담아내려고 노력해왔다. 이것이 그가 고객의 모습을 떠올리며 옷을 찾으러 올 때까지 한번이라도 더 손을 대는 이유다. “아버지는 생전에 ‘아무리 잘 만들었다고 해도 손님이 만족하지 않는 옷은 옷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의 뜻을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이경주 씨는 선친의 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근우빌딩.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 ‘Since 1916’의 글자가 똑똑히 박힌 작은 간판이 하나 붙어 있다. 그 간판을 놓친 사람들에게 <종로양복점>은 그냥 평범한 양복점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세빌로우’로 불리는 소공동의 맞춤양복점 거리에 있는 양복점도 아니니 더욱 그럴 것이다(세빌로우는 고급맞춤양복점이 밀집돼 있는 영국의 거리다). 그 빌딩 2층의 10평 남짓한 공간이 올해로 창업 87년을 맞은 <종로양복점>이다. 한국최고의 역사를 지닌 양복점의 전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이경주 씨는 손님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주는 작업을 한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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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상인과의 경쟁에서 당당히 승리하다
할아버지 이두용(李斗鎔ㆍ1881~1942) 옹이 종로양복점을 창업한 해는 1916년이었다. 일 년 동안 도쿄의 양복기술학교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한 그는 종로 네거리 보신각 옆에 양복점을 차렸다. 이 옹의 집안은 인평대군의 후예로 서울에서 대를 이어 살았지만, 살림은 넉넉지 못했다. 그래서 이 옹은 생계를 위해 열다섯 살 때 일본양복점에 취직했다가 한국양복의 태동기에 양복점 운영에서 미래의 비전을 찾아 일본유학을 결행했다. 이 옹은 일본에서 배운 기술과 신용을 바탕으로 일본양복점과 경쟁을 하면서 사업을 확장해갔다. 그는 마케팅이나 이벤트에도 탁월한 감각을 지녔었는데, 장춘단에서 복장상공인 운동회가 열렸을 때 키가 아홉 자나 되는 마네킹에 모닝코트를 입혀 가장행렬을 한 뒤 양복점 앞에 세워두고 고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 후 1928년에는 사업을 확장해 개성과 함흥에 지점까지 개설했다. 그런데 사업영역이 커지자, 일본상인들은 이 옹을 시기하고 모함해 일경에게 값이 비싸다는 트집을 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 무렵 <종로양복점>의 규모는 양복점과 바느질공장에만 재단사 등 직원 100여명을 둘 만큼 성장해있었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