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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말
서론 | 무교양의 나라를 둘러본 사적인 여행기 의미 없는 지식 | 진부함에 대한 예찬 | '바보 만들기'의 사회학 | 기준에 대한 타협 |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의 지배로 | 능력의 가치 | 책의 목적 1장 | 지식인의 가치 하락 강력한 주역에서 길 잃은 영혼으로 | 무엇이 지식인을 만드는가? | 현대 사회와 지식인 | 지식인이라는 역할의 가치 하락 | 순응주의적 지식인 2장 | 사소함을 추구하는 시대 계몽주의적 전통과의 결별 | 불확실성에 대한 무력감 | 상대주의에 있어서의 쟁점 | 도구주의적 절충 3장 | 바보 만들기 대중의 불참 | 최소 공통분모를 통한 참여의 재개 | 엘리트주의적 대중주의 4장 | 사회공학의 요구 자율에 대한 공격 | 사회공학과 시장 5장 | 아부의 문화 승인을 통한 포용 | 승인의 제도화 | 평범함에 대한 찬양 6장 | 대중을 어린애처럼 취급하는 시대 유치해진 문화 | 대중을 바보로 만들기 | 전도된 속물근성 | 순응적 대중 | 결론 - 21세기의 무교양주의에 맞서다 옮긴이의 글 참고 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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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기분좋게 만들겠다는 (대중주의의) 목표가 진정한 문화적, 교육적 경험이 사람들에게 만들어내는 참된 요구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사상과 예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좌절스러운 경험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소중한 지적 발견의 행위를 수반한다. (중략)
어린이들에게 항구적인 정서적 외상을 입히지 않으려면 실패의 경험을 맛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학자들은 자주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포용과 승인은 어린이들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을 자극하는 도전적인 교육과정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어린이들에게 항구적인 정서적 외상을 입히지 않으려면 실패의 경험을 맛보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것이 자주 이야기된다. 그러므로 포용과 승인 정책은 어린이들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을 자극하는 도전적인 교육과정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 p.183 5장 아부의 문화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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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양상은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정치는 지루하다’고 주장하는 대학 캠퍼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캠퍼스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대의와 사상에 대한 광범위한 냉소와 함께, 어떤 종류일지라도 분명한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준다. <뉴욕 타임즈>의 기자 미치코 가쿠타니는 미국의 대학생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살펴본 후 이런 무관심의 분위기를 기록했다. ‘그 낯익은 감탄사, “뭐든 상관없어(whatever)”가 오늘날 대학생들의 정신 상태에 대해 많은 것을 암시한다.’고 가쿠타니는 적고 있다.
--- p.113 3장 바보만들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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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영국에서 출간된『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21세기의 무교양주의에 맞서다』는 사회학 교수인 프랭크 퓨레디의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천박해진 지식사회와 정부를 ‘바보 만들기(dumbing down)’의 사령탑쯤으로 노골적으로 비판을 퍼부어댄 이 책에 대해, 영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우둔한 대학생들에게 불만을 쏟아내는 대학교수”니, “까탈스런 엘리트의 황금시대 찬가”라느니, 혹은 반대로 아주 근본적인 뇌관을 건드린 “파괴력 넘치는 주장”(테리 이글턴)이라는 입장까지 찬반논쟁이 뜨거웠다.
영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사회에는 “기업과 관료, 정치인들이 설정한 기준에 따라”(프랭크 퓨레디) 대학의 개혁과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학의 존재 이유는 직업 훈련이나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 양성이 아니라, 직접적 효용성으로부터 물러나 진리와 연구 그 자체의 의의를 드러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정운찬, 서울대 총장)라고 강조하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이 책은 대학부터 초등학교, 갤러리와 박물관, 선거 방식, 정치논쟁, 문화 이벤트까지 종횡무진 비판하며 우리 시대 무교양주의의 사례를 나열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무교양주의에 대한 공격인가? 지금은 바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방향과 내용을 고민하는 시대가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 프랭크 푸레디는 지금이 사회전반적인 도구주의화, 실용주의 노선에 대해 다시금 반성적으로 되돌아볼 때라고 강변한다. ‘형식적 제도’는 풍부해졌으나, ‘철학의 빈곤’, ‘문화의 빈곤’은 여전하다는 의미이다. 인간 정신의 고양 대신, 내용 없는 포퓰리즘에 포위되다 그는 대학에서, 교육제도에서, 정치 논쟁에서,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지식인의 태도에서, 이 시대의 무교양주의와 무지몽매화, 진리와 지식에 대한 무관심은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고등교육이 보편화되면서 오히려 교육에 대한 기준이 하락하고, 문화적 빈곤은 꾸준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대학이 사회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나, 그것이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에서는 결과적으로 대학이 전문대의 역할을 대신 빼앗아 버리고, ‘무엇이든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식의 경험주의적, 대중주의적 교육정책은 고등교육과 성찰이라는 대학 본연의 의미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즉 이는 “건강 문제에 대해 종합하고 분석해야 할 종합병원이 보건소의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나 마찬가지”(퓨레디)라는 것이다. 심지어 학생들이(혹은 대중이) 좌절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공공연한 문화가 대학과 문화 전반을 지배한다면, 그건 패스트푸드 문화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교육한다는 명목으로, 고통스럽지만 도전과 만족감을 수반하는 진지한 지적, 문화적 노력은 도외시된 채 즉자적인 생활 경험, 쉽지만 결국은 개인에게 별 의미 없는 것들로만 교육과 문화가 멈춰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지식과 문화, 교육을 통해 인류 문화가 남긴 최고의 것들, 의미 있는 것들을 배우고 문화에 감동받고 그로 인해 감성적으로 고양되는 경험, 지적 자극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 남은 것은 빈곤한 대중주의에 포위된 지식과 문화의 몰락뿐이다. 이는 강제가 아니라, 무기력이 빚어낸 (대중적) 동의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