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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감사한 일상 수선 꽃 피다 잔인한 계절 인사의 온도 쉼표(,) 속으로 낙樂의 발견 민들레 정신 물의 가르침 비명 소리 바람의 몽니 2부 복덩이 우리 누나 근원에 대하여 유년의 골목 손주야, 할아버지 이런 사람이야 기억의 예절 저물어 가는 풍경 시묘侍墓살이 고향 마을을 짓다 햇살 바라기 3부 친절의 온도 돈의 속마음 공든 탑이 무너지랴 삼봉三封의 계절 슬픈 꿈 산길에서 만난 노인 부도난 약속 카페에서 온 문자 어떤 고백 인연의 끝 4부 눈 오는 날의 수묵화 자운영 꽃밭에 누워 잊혀진 계절 벌초 삼거리의 추억 제례단상祭禮斷想 그리움의 쉼터 취향臭響 - 냄새 교향곡 쥬라이 내 마음 흐르는 곳 5부 손주의 미소 청산도에서 구름 위의 찻집 이렇게 좋을 수가 춤추는 바구니 배 닌호아의 달 다낭 여행 스페인 여행의 추억 할·손 여행기 가을 숲에 들다 [작품론] 뿌리를 찾아가는 애도의 순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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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겨울에 들어서고 나서부터는 산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심정적으로는 계절이 빨리 바뀌어 새로운 봄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면서 수선화 알뿌리가 어린 새싹을 예쁘게 피워내 주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수선화꽃이 피었는지를 확인하러 가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이름 없는 약수터를, 누군가 ‘수선화 약수터’라고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으면 무명의 샘터였을 ‘수선화 약수터’. 현장에 도착했다. 아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럴 수가. 수선화꽃이 피었다. 뾰족한 입술의 노란 꽃잎이 햇살을 받아 하늘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수선화가 꽃을 피우다니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기원의 결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첫아이의 탄생에 버금가는 환희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 「수선 꽃 피다」 중에서 자연의 마음은 넓고 공평하다. 기후와 장소에 상관없이 어느 생물이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추면 다 품에 안아서 키워 준다. 모든 생물은 자기만의 터를 만들고 사랑을 하여 열매를 맺고 씨를 만든다. 일단 자리를 차지하면 그곳이 그들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다만, 환경에 잘 적응하는 생물만이 자기들의 마을을 만들고 자손을 이어갈 수 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도쿠토미 로카는 그의 저서 《자연과 인생》에서 “너 귀를 기울여/ 이 꽃의 말을 들어라/ 장미가 아니니/ 꽃피지 않겠다고 말하는지”라고 했다. 모든 꽃이 한목소리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나만의 꽃을 피운다’라고. 자연의 모든 생물은 나름대로 자기만의 꽃을 피운다. 자연의 일원으로서 자연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 「민들레 정신」 중에서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마을의 골목길을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내 뇌리에 잠재된 안타깝고 슬픈 기억의 편린들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5년을 살았다. 1961년에 서울로 올라온 이후 내 마음에 간직한 고향은 이곳 마을이다.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이별한 후에는 내 생물학적 고향은 사라졌다. 지금 남은 것은 지리학적 고향으로만 남아있다. 우리 마을 이름은 지리산 화엄사 아래에 있는 ‘냉천리’라는 마을이다. 내가 살던 고향 마을에는 지리산 노고단 계곡으로부터 세 개의 개천이 마을 중간과 동서 양쪽으로 흘러들어 골목길이 만들어졌다. --- 「유년의 골목」 중에서 지나온 여울 같던 시간은, 움켜쥐고 살았던 인연과 생의 욕망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새어 나가듯 나도 모르게 빠져나갔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남보다 더 앞서겠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왔던 시간과 욕심, 지금은 두 주먹 잔뜩 움켜쥐었던 금쪽같은 것들이 모래시계처럼 힘없이 빠져나가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계절이다. 상처와 번뇌가 없는 인생은 없다. 기다리던 우편물이 배달되듯 왔던 계절도 이제는 황홀하게 빛나는 석양의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대개의 삶이란 결핍이고 누추함 그 자체인데, 결핍을 채우고 누추함에서 벗어나려는 욕망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마음을 움츠렸던가. --- 「저물어 가는 풍경」 중에서 살았던 장소, 오래 살았던 긴 시간, 잊히지 않는 정은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고향은 구체적으로 어느 고을이나 어떤 지점을 제시할 수 있으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각인각색으로 모습을 달리할 수 있다. 고향은 생각만으로도 왠지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 마치 어머니 품속처럼 그윽한 안식처이며,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마음의 쉼터이다. 풍요로운 고향의 숨결을, 알싸한 고향의 향기를, 그리고 그 속에서 더욱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영혼 한 줌과 포근한 염원을 골목길에 뿌려보고 싶다. 나는 진정한 고향은 없다고 생각하며, 서정적이고 원초적인 정과 색깔이 없는 무늬만의 그리움을 막연하게 가슴속에 담고 살아왔다. --- 「그리움의 쉼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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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저물어 가는 풍경》에는 화제나 주제가 서로 겹치거나 연관성을 지니는 작품이 상당수 있는데, 그 구심점이 되는 작품이 〈복덩이〉다. 〈복덩이〉를 중심으로 여러 작품의 주제가 파장되는 양상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복덩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기까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해방 후 1948년 여순사건 등의 한국 근대사의 격랑을 겪으면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34년 소학교를 마친 복덩이는 미야자키 농업학교를 거쳐 대구 관립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창녕 지역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다. 해방 후 고향인 구례로 전근하여 교장이 된다. 그런데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하고, 복덩이가 교장으로 있던 중동 초등학교가 반군의 물자 보관 장소로 이용된 것이 빌미가 되어 복덩이는 국군 토벌대에 의해 ‘산동면 외산리 한천마을 참새미’에서 사살된다. 복덩이 아버지는 혹한 속에 아들의 시신을 찾아 임시 매장한 후, 봄이 되어 지리산 소나무 숲에 묻는다. 결국 복덩이라는 인물은 삶의 꿈을 제대로 실현해 보지도 못하고 어린 삼 남매를 남겨두고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한다. 이 작품 끝부분에서 작가는 “복덩이는 내 아버지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버지가 희생당할 때 작가는 2살의 아이였다. 아버지 죽음과 함께 곧바로 어머니마저 집을 떠나 할아버지 손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란다. 아버지와 어머니 부재에 대해 말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 내막을 알지 못한 채 유년을 보낸다. 나이 70대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가족사의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작가의 가족사 관련 작품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어머니의 떠남이란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 났을 때 작가에게 밀려온 생각과 감정이 작품 곳곳에 스며 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 자식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 삼 남매를 부모 대신 키워 준 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움, 고향과 뿌리를 찾으면서 되살아난 유년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 등은 수필의 중심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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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호의 가족사, 고향 산천의 모습, 유년의 기억을 담고 있는 수필은 두꺼운 시간을 걷어내고 과거의 진실에 다가서는 엄숙한 의식인 동시에 사실의 냉철한 기록이기도 하다. 고향을 찾아 조상의 묘를 돌보며 과거를 소환하는 그의 수필 쓰기는 오랫동안 쌓였던 상처와 한을 털어내는 씻김굿 같다. 유년의 꿈을 빼앗아 간 슬픈 가족사의 전모를 밝히고, 그 잊힌 세월과 계절을 복원하는 것은 작가 임철호에게 절실하면서도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수필은 문학이란 심미적 영역과는 별도로 한 존재의 정체성을 세우는 간절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 신재기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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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호의 수필이 독자를 강하게 흡인하는 것은 서사의 힘이다. 아픈 가족사, 유년의 추억, 손자와의 여행,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담은 많은 작품이 서사를 중심으로 구현된다. 이러한 서사가 유연하고 흥미있게 전개되는 데에는 무엇보다 담백하고 서정적인 그의 문체가 일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수필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많은 독자에게 위안과 희망의 메시지로 읽힌다. 임철호 수필이 거둔 탁월한 문학적 성취는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다. - 백남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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