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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틀란티스
2. 그녀 3. 소년이 자라 청년이 되다 4. 중국여관에서의 하룻밤 5. 괴로운 두 남자, 수상한 한 남자 6. 추억이 두려운 남자 7. 눈물의 재회 8. 카페의 여왕 9. 불륜의 여왕 10. 여자는 변명을 하지 않는다 11.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건 12. 박가 SONG 13. 경성 감옥 14. 우린 모두 외로운 싸움을 하지 15. 전기의 영혼 16. 댄스홀을 찾아라! 17. 문화구락부 |
필명:이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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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를 사랑해서 조선어로 식민통치 서시를 쓰고 조선 여인을 사랑해서 일본 부인을 버리려는 시마 국장의 모순, 이 거대한 모순 앞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부정행위인 맞바람으로 맞서고 있는 유키코. 신스케고 시마국장이고 모두 자신들의 떳떳한 양심의 만족을 위해서만 애쓰고 있었다. 예민한 감성의 착한 두 남자에게는 첫째도 양심, 둘째도 양심, 셋째부터 열째까지 모두 양심이었던 것이다. 그 고귀하고 고매하신 양심에 맞설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바로, 부도덕과 비양심과 뻔뻔함. 유키코는 무수한 오해와 비난 속에서 그 부실한 무기들을 가지고 혼자 고독하게, 온몸으로, 온 발가락들을 비틀며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유키코를 돕고 싶었다. 우리는 그날 본정 뒷골목의 허름한 여관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 p.167-1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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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실 넌, 진짜 '테러 박'이 될 수는 없어. 다른 사람들은 다 속일 수 있어도, 네가 만든 거짓말에 네 자신이 속을 수는 없으니까. 조난실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모두 조난실을 바라보았다. 모두 조난실의 대답을 기다렸다. 조난실이 드디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환영해요...... 여보.......'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그럼으로써, 그녀 생애 최고의 거짓말인 '테러 박'이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테러 박'은 그녀가 그다지도 구박하던 남자친구 바로 나 이해명이었다. 기뻤다. 너무나 기뻤다. 날아갈듯 기뻤다. 위기에 처한 조난실을 돕게 되었다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테러 박'이란 놈이 원래 세상에 없었다는 게 마음에 쏙 들었다. 어째 나보다 멋진 놈이 세상에 있다는 게 안 그래도 미심쩍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기뻤던 건, 내가 드디어, 그녀가 그렇게도 원하고 바라던 그녀의 '그 남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 p.199-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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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코와 난 무조건 뛰었다. 뛰면서 몰래 훔쳐본 유키코의 옆모습은 그 진지하고, 변명은 절대 안 할 것 같은 당당한 표정 때문에 진짜 도둑처럼 보였다. 우리는 큰길까지 뛰었다. 한참을 달려 안전 거리에 왔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멈춰 섰다. 제법 시끄러운 것이 용산 유곽 근처인 것 같았다. 나는 헐떡이며 오키코를 바라보았다.
"모자를 잃어버렸어요." 그녀는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녀의 구두코에 책꽃이 위의 먼지처럼 왠지 좋은 향기가 날 것 같은 흙먼지가 얌전히 묻어 있었다. 유키코는 나를 보며 소년처럼 웃었다. "결국 우린 해냈어요. 공범이 됐어요." 부끄럽게도, 나의 모험은 이렇듯 엉뚱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원찮은 모험이라도 모험이란 대개 교훈을 남기는 법. 난 조난실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상당히 경솔하고 위험한 결론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바이지만 난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과거 남자들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난 용서하기로 했다. 즉, 과거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럼으로써, 현재를, 추억을, 조난실을 다시 손에 넣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왜냐, 만약 내가 조난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녀는 영원히 나에게 죄인으로 남을 것이고, 내 인생 처음으로 사랑한 여인을 끝내 죄인으로 못박은 나 역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는, 팔자에도 없는 무기수 신세가 될 것이다. 즉, 우리는 거짓된 사랑의 역사에 대한 공범이 된다. 유키코의 말대로 서로의 불행에 무감각한, 그저 한 시절 스쳐간 가없은 옛날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어찌 됐든 간에. --- p.108-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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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하는 것과 용서를 하지 않는 것, 둘다 소중한 한 가지씩을 포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포기해야만 하고 용서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재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순간 티스푼이 고분고분히 눕는 모습을 보는 순간 갑자기 잠시 놓고 있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조난실 앞에서 티스푼과 나는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달콤한 혀 안에서 잠시 황홀해하다, 뜨거운 차안에서 잠시 허덕이다 이제 테이블 위세 녹슨 삽자루처럼 누워있다. 사람들은 그런 재수없는 여자는 그만 잊고 좋은 여자 만나 잘살면 그게 최고의 복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게 무슨 복수입니까. 예? 복수란 적어도 칼로 한번 찌르고 열걸음은 도망가야 복수 아닙니까? 어떻게 지금 잘 사는 것이 앞으로 잘 사는 것이 복수가 될 수 있습니까. 내가 받은 상처는 과거의 것인데 과거는 그만 잊어버리라니 정말 답답해서 미치겠습니다. ---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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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마리의 회색 나비 떼가 나를 향해 날아 왔다. 작고 투명하고 세모난 날개를 세차게 파닥거리며, 나는 얼른 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고 날개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조심스럽게 다시 눈을 떴을 때. 난 그것들이 나비 떼가 아니라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입에 물고 있는 갖가지 종류의 담배에서 피어오른, 어디로 흘러가지도 못하고 녹아버리지도 못한 채 스스로 사라질 때까지 전등 주위를 돌며 퍼덕거리고 있는 희부연 담배연기란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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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런 재수없는 여자는 그만 잊고 좋은 여자 만나 잘살면 그게 최고의 복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게 무슨 복수입니까, 예? 복수란 적어도 칼로 한 번 찌르고 열 걸음은 도망가야 복수 아닙니까? 어떻게 지금 잘사는 것이, 앞으로 잘사는 것이, 복수가 될 수 있습니까? 내가 받은 상처는 과거의 것인데 과거는 그만 잊어버리라니, 정말 답답해서 미치겠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백상허는 대답했다. '복수해.' '네?' '과거에 복수해. 과거에 대한 복수라도 그 기쁨은 현재의 것이니까.' 백상허는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복수하고 싶어 죽겠어요. 조난실을 짓밟고 또 짓밟아서, 아주 아프고, 괴롭게, 내가 느낀만큼 똑같이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그러면,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하지만,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그리고, 제가 그렇게 해봤자 그 여자가, 그 대단한 여자가, 저와 같은 아픔을 느낄까요? 아무 소용 없어요. 제가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그녀 앞에서 미친놈처럼 나뒹굴어봤자, 최선을 다해서 쫓아다니며 괴롭혀봤자, 그게 다 제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백상허는 여전히 숨도 쉬지 않고서 대답했따. '기쁨. 기쁨을 느낄 수 있지.' --- p.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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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봄 햇살이 쏟아지는 총독부 이층 사무실 내 책상 위에서 나는 '나의 둥그런 푸른 무덤'이 깨져라 대성통곡하고 싶었다. 서러움이 복받쳤다. 아무리 그녀가 나를 배반했다 하여도 내 이 슬픔을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그런데 왜, 왜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하고, 아무 소용 없는 세상 사람들만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인가.
--- p.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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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를 예전만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 할 수 없지만, 아니, 그런 사랑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어차피 나에게 중요한 건 '사랑' 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나에게 중요한 건 영원히 미워할 수 없는 원수덩어리, 멋있는 나를 구박하는 나쁜 여자, 항상 돈이랑 시간이 모자란다고 투덜거리는,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상냥하고 가식적인 웃음만은 잃지 않는, 그냥 그런 여자, 나의 첫 여자 친구, 그 유명한 '조난실' 이라는 이름의 그 자체뿐.
나에겐 사랑보다 그녀가 더 중요한 것이였다. 사랑이란 어차피 변덕스러운 것이라 언젠가는 없어지게 마련이지만.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조난실'은 남을 것이므로. 난 사랑이라는 고매한 이념과 관념을 쫓느니 차라리 엉망진창 난장판인 사람을 추격하기로 했다. 이념이 아무리 좋다 해도 같이 빙수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p.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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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둥그런 푸른 무덤', 이름 잘 지었지?'
'지붕한테 왜 이름이 필요한가요?' 정말로 화가 났다. 남들한테는 창피해서 말도 못하는 나만의 비밀을 기껏 얘기해줬는데 이다지도 이해하지 못하다니. '왜라니? 강아지한테 왜 이름을 붙여주겠어? 기억하려고 지어주는 거잖아! 총독부가 없어지고 나면 저걸 뭐라고 불러야겠어? 멋대가리 없게 총독부라고 불러야겠어?! '나의 둥그런 푸른 무덤'! 이 정도로는 불러줘야 할 거 아냐? 나의 소년 시절이 묻혀있고, 나의 젊음을 보낸 곳인데, 안 그래?!' 그녀는 몽고어를 듣고있는 북경 사람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만 포기하고 한마디만 더 덧붙였다. '이래 봬도 난 꽤 낭만적인 남자라고. 낭만의 화신이지. 가끔 그렇게 불러주면 고맙겠어.' --- p.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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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차에 올라탔다. 땡땡땡 종소리와 함께 나를 태운 청량리행 전차는 경쾌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전기의 영혼을 타고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하는 경성을 가로질렀다. 나는 점점 '나의 둥그런 푸른 무덤'과 멀어지고 있었다. 어쭐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조난실과 한패가 될 수는 없었다.
--- p.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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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추억만 가진 외로운 소년, 비굴한 식민지 청년, 나같은 놈 때문에 독립이 안 된다. 난실이의 말은 옳을지 몰랐다. 난 쓰레기이다. 이상도, 신념도, 희망도 없는 존재는 쓰레기이다. 더 나아가 난 미래가 없는 쓰레기이다. 난실이가 나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을 줄이야. 어쩐지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했다. 난 그녀의 명백한 과거도 용서해줬는데 그녀는 나의 불확실한 미래도 용서해주지 않다니. 어쨌거나, 난 쓰레기이고 쓰레기의 미래는 쓰레기통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쓰레기통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내가 들어갈 만한 쓰레기통은 이 경성 바닥에 없다. 그렇다면, 난 어쩜 쓰레기가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나는 뭘까. (p.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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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한 사랑 따위라뇨? 작년 한 해 감옥에서 죽은 사람들보다 실연의 아픔으로 한강 인도교에서 투신 자살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물론 1918년 한강 투신자살 1호 역시 남자한테 버림받은 용산철도 병원 간호부였죠.
--- p.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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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발상, 개성적인 감수성이 잡아내는 한여름밤의 꿈 같은 매혹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는 심사위원들로부터 근년의 신예들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매우 놀라운 수준의 산문 생산력, 신선하고 개성적인, 재기발랄한 서술-묘사, 통념을 깨뜨리는 기발한 발상으로 신인다운 패기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출장 기생을 태운 인력거, 회색 비크택시, 종로를 지나가는 전차들, 갖가지 모자로 무장한 모던걸과 모던보이, 댄스홀, 카페……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는 어느새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근대의 여명기로 독자를 데려간다. 이른바, 일제강점기. 우리의 가장 어두운 부분인 이 시대를 배경으로, 이 작품은 소위 ‘역사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는 ‘뻔뻔함’으로 두 남녀의 유치찬란한 이야기를 종횡무진 펼쳐보인다. 일종의 경성판 오딧세이, 혹은 신판 「이수일과 심순애」라 불러도 좋을 이 기발하고도 코믹한 연애소설은, 무엇보다도, 도처에 간단없이 출몰하는 냉소와 야유, 패러독스를 그 핵심으로 가지고 있다. 빈번하게 나타나는, 기괴하게 비틀린 신화적 모티프들, 하나같이 백치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이 자아내는 황당한 장면들을 시치미 뚝 떼고 끌고 나가는 솜씨 등은 이 작가만의 독특한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총독부에서 줄 긋는 일을 하는” 식민지 관료 이해명. 그는 ‘양심있는 친일파’인 아버지에 의해 총독부에 취직된, 그리하여 역사의식 자체가 없는, 자칭 낭만의 화신이다. 그는 사랑하던 여인 조난실로부터 갑작스레 버림을 받고는 그녀를 찾기 위해 경성을 이잡듯이 뒤진다. 돈키호테 같은 이해명의 경성판 오딧세이는 이렇게 시작되며, 이 기나긴 여행에서 그는 조난실에게 이미 특급 테러리스트인 남편이 있다는 사실, 그녀가 가진 이름만 열 개가 넘는다는 사실, 그녀가 지하독립운동단체인 ‘이십세기모던이미지댄스구락부’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임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 자신을 버린 여인을 찾기 위한 ‘눈물겨운’ 추격전이 교차 서술되는 이 작품은 총독 취임식 하루 전날 밤, 모든 것이 뒤바뀌는 막판 대반전으로 그 꿈같은 결말을 맺는다. 기실, 이 작품이 다루는 것은 식민시대의 ‘거룩한’ 투쟁이 아니라 그 시대를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독특한 두 남녀, 이해명과 조난실의 이야기이다. 조난실은 거짓말이 진실인 여자이다. 그녀는 거짓말하기 위해 ‘독립운동’ 비슷한 것을 벌이고 다닌다. 남자 주인물 이해명은 그 자신의 진실(사랑)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말하자면 식민시대에 대학까지 나온 조선 젊은이치고는 제1급의 ‘또라이’이다. 거짓말이 진실인 여자와 그 여자를 잊지 못해 쫓아다니는 ‘또라이’ 낭만파 청년이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가? 그것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테러 박이라는 신비스런 인물도 아주 흥미롭다. 상해 독립운동조직의 거물로 알려진 테러 박은 사실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조난실이 지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임을 이해명이 알게 되는 소설 결미 부분은 일견 황당한 듯하지만 이 소설의 핵심 전언이 담겨 있다. 이들말고도 이 작품에는 일본인 미남 청년 신스케와 바람둥이 미녀 유키코가 등장하는데, 이들 역시 독특한 행동으로 독자를 웃기는 인물들이다. 기이하게도, 독자는 조난실과 이해명을 미워할 수가 없다. 작가, 혹은 작품의 내부 저자는 주인물이자 화자인 이해명과는 분명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작가는 이해명이란 인물을 통해 식민지의 왜곡된 근대의 아이들이 결국은 지금궭痢 문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내비치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식민시대의 진실에 대한 냉소적 조롱이나 허무주의라는 문제보다는 진실의 비진실한 근거라는 문제에 초점을 둔다. 식민시대는 민족 수난기이지만, 바로 그 엄숙한 사실 때문에 마치 없는 듯이 덮어지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의 하나가 진실의 비진실스런 바탕이라는 문제일 것이다. 테러 박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해명이 ‘기뻐하는’ 대목은 바로 이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독자는 조난실의 거짓말과 이해명의 ‘또라이’ 짓들, 그리고 그의 발견과 변신을 보면서 그들이 어느 틈에 우리 내부로 이주해 있다는 것을, 아니, 우리 내부의 어떤 것이 그 두 인물의 형태로 외화되어 간단치 않은 문제를 우리에게 되돌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제 막 걸음을 뗀 이 작가가 우리 문학의 소중한 재목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 특유의 발칙함, 뻔뻔스러움, 수선스러운 유희 정신, 시치미 뚝 떼고 단도직입적으로 찌르고 들어가는 활달한 문체, 너무 노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일찍 발산되고 있는 삶에 대한 균형감각 등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의 작가 이지형의 앞날에 그의 문학적 장기들이 중요한 몫을 해주기를 바란다. 그 가능성의 절반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기도 하다.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주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