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서문
기억의 집/ 밤 1부 금욕/ 음식/ 자동차/ 퍼트니/ 그린라인 버스/ 모방 욕망/ 로드 워든 2부 조/ 키부츠/ 베더/ 파리는 빛을 바래고/ 혁명가들/ 일/ 능력주의/ 언어 3부 미국으로!/ 중년의 위기/ 사로잡힌 마음/ 여자, 여자, 여자/ 뉴욕, 뉴욕/ 언저리 사람들/ 토니 안녕히 마의 산들 |
|
새로 꾸린 가족과 함께 사는 건강한 사내가 예순의 나이에 치료 불가능한 퇴행성 질병에 걸려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행운에 빗대다니 대단한 악취미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루게릭병의 희생양이 된 것은 어떤 면에서 신들을 노하게 만들었던 탓이 틀림없고, 이 점에 대해서 더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왕 고통을 겪을 바에는 머릿속이 충만한 편이 낫다.
-「기억의 집」, 24쪽. 차디찬 강철 갑옷에 갇히는 일에 장점 따위는 없다. 정신이 민첩해지면서 생긴다는 즐거움은 대단히 과장된 것이다.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딱히 그 즐거움에 의존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었다. 신체적 결함에 대해 비신체적 보상을 찾으라고 격려하는 것은 아무리 선의라 해도 부질없다. 쓸데없는 짓이다. 상실은 상실일 뿐, 아무리 좋은 이름으로 부른다 한들 마찬가지다. 나의 밤들은 제법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그런 밤들 없이도 나는 잘 지낼 수 있다. -「밤」, 31쪽. 금욕의 반대말은 번영이 아니라 사치와 환락이다. 우리는 공익을 끝없는 상거래에 양보했고 우리의 지도자들이 더 높은 포부를 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처칠이 피와 수고, 눈물 그리고 땀 말고는 드릴 게 없다고 한 지 60년이나 지난 지금, 바로 우리 자신의 전쟁 대통령은 숨 가쁘게 도덕적 수사를 남발하면서 2001년 9·11 사태의 여파 속에서 우리에게 쇼핑을 계속하라고 요구하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이처럼 빈곤해진 공동체의 가치관 ― 소비를 통한 함께함 ― 이 오늘날 우리가 위정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전부다. 더 나은 통치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통치자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우리의 이기심은 줄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약간 금욕적일 필요가 있다. -「금욕」, 43쪽. 경주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만지작대고, 그를 집에서 유럽으로 데려가는 차, 차는 아버지가 거주하는 사회였다. 술집이나 술에 별로 관심이 없고 직장 동료도 없었던 아버지는 시트로엥을 다목적 반려자이자 명함으로 바꾸어 놓았고, 영국 시트로엥 자동차 클럽 회장에 선출되기까지 했다. 다른 사내들이 술과 정부(情婦)한테서 갈구하고 발견했던 것을, 아버지는 한 자동차 회사와의 외도로 승화했다. 어머니가 그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적대시했던 것도 이로써 설명이 된다. -「자동차」, 57쪽. 루게릭병을 얻은 후 나를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사실은 아마도 내가 다시는 열차를 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리라. 나는 이 상황이 매일매일 진행되는 실제 병세보다 훨씬 우울하다. 이런 깨달음이 무거운 담요처럼 나를 한없이 짓누른다.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암울한 종말의 느낌, 영원히 안녕을 고해야 하는 일들이 생겼다는 깨달음. 이런 부재(不在)는 단지 기쁨의 상실이나 자유의 박탈뿐 아니라 새로운 경험으로서의 배제를 의미한다. 릴케를 상기해 본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자아의 상실이다. 아니면 적어도, 가장 쉽게 평온을 찾던 자아의 더 나은 부분을 상실한 것이다. 이제 내게 워털루 역은 없다. 시골 정거장은 없다. 고독은 없다. 이제 무언가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저 한없이 있을 뿐이다. -「모방 욕망」, 80쪽. 나는 늘 결국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었고, 또 그 일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운이 좋지 않다. 일은 대부분 지루하기 짝이 없다. 삶을 향상시키지도 않고 지탱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한 번 (마치 빅토리아 시대 선조들처럼) 실업을 성품의 결점과 유사한 부끄러워해야 할 그 무엇인가로 여기게 되었다. 돈 잘 버는 전문가들은 실업자, 즉 복지의 여왕들이 대단히 부도덕하며 공익을 침해한다고 운운하는 동시에 힘든 노동의 미덕을 역설한다. 글쎄다. 그들도 그런 일을 한번 해봐야 한다. -「일」, 142쪽. 나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것들을 보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말들을 나는 더 이상 쉽게 전할 수가 없다. 신음 같은 모음 소리와 쉭쉭거리는 자음 소리가 입술에서 흘러내린다. 가장 가까운 협력자에게조차 형태 없고 불완전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언어를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게 된 지금에야, 의사소통이 공화정체(共和政體)에 얼마나 필수적인지 절절히 실감한다. 의사소통은 우리가 함께 사는 수단만이 아니라, 함께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일부다. 내 성장 과정 속에서 풍성했던 말들은 그 자체로 공적 공간이었다. 더욱이 적절하게 마련된 공적 공간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다. 만약 말이 황폐해진다면,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그것뿐인데. ---본문 중에서 |
|
“우리는 인생을 어디서 시작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인생을 어디서 마칠지는 결정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고 싶은지 잘 안다. 그 작은 기차 안에서 나는 그 어디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비범한 정신의 프리즘에 비친 한 시대의 초상 “지적 거인이자 치열한 전사, 탁월한 웅변가, 공적 지식인. 확실히, 토니 주트는 이 모두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스스로 이러한 칭송을 얻고자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단지 그 스스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바를 말하기 원했고, 또한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을 뿐이다.” -「옵서버」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자전적 에세이를 모은 유고작. 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토니 주트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 일명 루게릭병으로 인해 마비된 몸 안에 꼼짝없이 갇힌 수인으로 지냈다. 목과 머리를 빼고는 어떤 근육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예전과 다름없이 기민했다. 그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몸을 뒤척일 수도 없는 상태에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 했다. 주트가 스스로 밝히듯이 혼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찾아낸 해결책은 잠이 들 때까지 자신의 삶과 생각, 환상과 기억, 잘못된 기억 등을 샅샅이 훑는 것이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하지만 그 문장들을 어떻게 활자로 옮길 것인가? 혼자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사지가 마비된 그에게 메모장과 연필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밤새 머릿속으로 쓴 이야기들을 다시 기억해 낼 것인가? 주트는 밤새 쓴 이야기들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정신적 ‘저장 장치’를 이용했다. 메모리 샬레, 즉 기억의 집이다. 초기 모더니즘 사상가와 여행가들은 자신들이 습득한 지식을 저장해 두고 회상하기 위해 머릿속에 궁전을 지었다. 조너선 스펜스가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에서 이 기억술을 흥미롭게 묘사한 바 있기도 하지만, 주트에게 ‘기억의 궁전’은 사치스러울뿐더러 기능적으로도 떨어져 보였다. 대신 그는 1950년대 말에 가족과 함께 겨울 휴가를 보냈던 스위스의 샬레를 떠올렸다. 주트는 밤새 떠올린 문장들을 집의 세부, 즉 바와 식당, 라운지, 뻐꾸기시계 등에 차곡차곡 채웠다. 그리고 다음 날, 조력자가 그 문장들을 받아 적었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 쓴 최초의 글은 2010년 1월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실렸고, 이후 연재한 글들은 주트의 사후 3개월이 지난 2010년 11월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각각의 글은 주트 개인의 자전적 삶의 단편을 다루고 있다. 주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런던 거리에서부터 21세기 뉴욕의 주방을 오가며 과거의 경험과 추억을 반추한다. 차를 사랑했던 아버지, 그가 런던에서 즐겨 타던 버스와 기차, 학창 시절의 독일어 선생님, 1960년대와 70년대 킹스 칼리지와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보낸 학창 시절, 10대 시절 키부츠에서 겪은 경험 등이 각각의 주제가 된다. 그러나 다분히 사적인 경험과 추억들은 토니 주트의 정신을 체에 걸러지듯 지나면서 역사학자로서의 시각, 즉 우리가 사는 사회와 세계에 대한 성찰을 드러낸다. 런던의 특정 버스 노선에 대한 주트의 애틋한 기억은 시민 의식과 도시 계획에 대한 이야기로, 68혁명에 대한 기억은 유럽의 성 정치학과 혁명 세대로 불리는 자기 세대에 대한 평가로, 베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케임브리지 대학 기숙사 청소부에 관한 기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에 대한 성찰로, 주트 자신이 청년 시절에 돈을 벌기 위해 했던 여러 육체노동에 대한 기억은 노동의 미덕을 설파하며 실업자들을 부도덕한 사람들로 몰아세우는 세태에 대한 풍자로 전화한다. 때로는 감동적으로, 때로는 가슴 저미는 통증으로 다가오는 주트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에 대해 아련한 그리움을 느끼게 할 만큼 아름답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주트, 키부츠에서 정치적 유토피아주의를 버리다 주트는 런던에서 보낸 소년 시절을 아름답게 그린다. 그러나 이는 단지 젊음을 이상화하는 학문적 망명자의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런던 이스트엔드의 유대인 미용사의 자식으로 태어난 주트는 10대 시절 이스라엘에서 키부츠를 경험했다. 이스라엘에 첫 발을 내디딘 소년에게 키부츠는 “건강, 운동, 생산성, 공동의 목적, 자급자족, 그리고 자랑스러운 분리주의”를 뜻했다. 그러나 소년은 이내 키부츠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제약이 가해지는지를 알게 되면서 이곳에서의 삶이 편협하고 답답하며 지역주의적이라고 느낀다. “그저 집단 자치 정부를 꾸렸다거나 소비재를 평등하게 배급한다고 우리가 더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타인에게 더 관용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실은, 자부심이 극단에 이를수록 가장 악질적인 인종적 유아론만 강해질 따름이다.” 6일 전쟁 뒤 골란 고원에서 군 통역사로서 겪은 군 생활 경험은 키부츠를 떠나기로 한 주트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한다. 패전한 아랍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유대인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주트는 키부츠에 머물렀던 날들이 망상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주트는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그로부터 깊은 교훈을 얻는다. 키부츠에서 정치적 유토피아주의를 버린 것이다. 주트는 「키부츠」의 마지막 두 문단에서 왜 자신이 공산주의와 같은 정치적 유토피아주의와 결별하고 사민주의자가 되었는지, 왜 자신이 68혁명을 일으킨 신좌파의 열정에 휩쓸리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그 시절을 허비했다거나 허투루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별일 없이 1960년대를 보내면서 안락함을 즐기는 세태에 편승했다면 영원히 얻지 못했을, 나름대로 많은 기억과 깊은 교훈을 얻었다.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할 무렵 동기들이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이념적인 운동을 나는 실제로 경험했고 이끌었다. 신봉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그토록 강한 동질성과 의심 없는 충성심을 이끌어 내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알았다. 나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시온주의자가 되는 것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도, 코뮌주의를 믿는 이스라엘 정착자가 되는 것도, 모두 그만두었다. 런던 남부의 10대였다면 절대 깨달을 수 없었을 교훈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케임브리지 동기들과는 달리 나는 신좌파가 되고자 하는 열정과 유혹에 면역이 되어 있었다. 신좌파의 인종주의적 파생 정파인 마오주의나 극좌주의, 제3세계주의 등에는 더더욱 끌리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학생들이 주축이 된 반자본주의 변혁 운동의 도그마를 의식적으로 무시했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나 전반적인 성 정치학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위시한 모든 정체성 정치학에 회의적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노동 시온주의 덕분에 나는 조금은 이른 나이에 보편적 사민주의자가 되었다. 이스라엘 스승들이 나를 지켜봤더라면 이렇게 뜻하지 않는 결과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나를 지켜보지 않았다. 나는 시온주의와 결별했고, 사실상 죽은 이스라엘인이었으니까. -「키부츠」, 106-107쪽. 안녕히 ― “그 작은 기차 안에서 나는 그 어디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서 토니 주트는 철도 민영화의 폐해에 대해 격렬한 분노를 토해 낸 바 있다. 복지 국가의 사멸과 신자유주의로 인한 극심한 빈부격차와 온갖 불평등에 항의하는 사민주의자 토니 주트에게 철도 민영화는 고삐 풀린 시장 경제로 인해 망가진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철도 민영화에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기차는 주트에게 삶의 일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의 일부였다. 주트는 기차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상호적이었다. 기차도 주트를 사랑했다. 기차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생각건대, 사랑이란 가장 만족스럽게 자기 자신이 되는 상태다. 이 말이 역설적으로 들린다면,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에게 그 자신이 될 공간을 남기면서 그 안에서 자아가 안심하고 꽃피울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릴케의 충고를 떠올려 보라. 어릴 때 나는 사람들 틈에 있으면 늘 거북하고 뭔가 어색했다. 가족들과 있으면 그 느낌이 더했다. 홀로 있는 시간이 더없이 좋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존재로 있다는 것은 늘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었다. 어디에 내가 있든 해야 할 일, 기분을 맞춰 줘야 할 사람, 완수해야 할 임무, 못 다한 역할이 있었다. 뭔가 어긋나 있었다. 반면 어떤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안도감을 줬다. 혼자서 어딘가로 가고 있을 때만큼 행복한 일은 없었고, 그곳에 다다르는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더 좋았다. 걸으면 유쾌했고, 자전거를 타면 즐거웠으며, 버스 여행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기차는 곧 천국이었다. -「모방 욕망」75쪽 일곱 살 때부터 주트는 지하철을 타고 런던을 돌아다녔다. 열차에서 내려 역사를 살펴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철도역은 주트에게 “19세기 도시 계획과 기능 설계”를 대표하는 장소였고, “현대 생활의 화신”이자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당대의 성당”이었다. 그는 유럽의 철도역들을 걸어 다니고, 그간의 노정과 경험을 반추하며 한 사회와 한 문화를 파악했다. “나의 유럽은 열차 시간으로 계산된다.” 토니 주트를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자리 매김하게 한 포스트워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빈의 주 종착역인 서부에서 기차를 갈아타는 동안 나는 처음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때는 1989년 12월이었고, 그렇게 결심하기에 적절한 순간이었다.” 주트는 자신의 병으로 인해 더 이상 기차를 탈 수 없다는 사실에 깊은 상실감을 드러낸다. 주트에게 그것은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증거”이자 “자아의 상실”을 의미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에세이 「마의 산들?에서도 기차는 다시 등장한다. 스위스의 작은 산골 마을 뮈렌의 철로를 오가던 작은 기차를 떠올리며 그 안에서 모두에게 안녕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뮈렌의 좁은 철로가 지나는 시시한 길이 하나 있다. 그 중간쯤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 거기가 그 노선의 유일한 정거장이다 ― 스위스식 노천 음식을 판다. 앞쪽으로는 가파른 아이거 봉이 그 발치에서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지구대(地溝帶)를 묵묵히 내려다본다. 뒤쪽으로는 여름 헛간까지 기어 올라가서 소나 염소, 양치기들을 구경할 수 있다. 아니면 그냥 다음 열차를 기다려도 좋다. 기차는 당연하다는 듯 초 단위까지 철저하게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한다. 아무 일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다. 우리는 인생을 어디서 시작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인생을 어디서 마칠지는 결정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고 싶은지 잘 안다. 그 작은 기차 안에서 그 어디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마의 산들」, 23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