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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소녀 쟈지
옮긴이의 글 작품 소개 작가 연보 |
Raymond Quen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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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라고요?”
“그래, 파업. 지하철이 말이야, 이 유달리도 파리스러운 교통수단이 말이야, 땅 밑에서 잠이 들었단다. 표에 구멍 뚫어주는 직원들이 일을 전부 놔버렸거든.” “아, 더런 놈들.” 쟈지가 소리친다. “아, 심통꾸러기들. 내게 이런 짓을 하다니.” “네게만 그러는 건 아니지.” 철저하게 객관적인 가브리엘이 말한다. “상관없어요. 그렇다 해도 바로 내게, 지하철을 탈 생각에 그다지도 행복했고 그다지도 만족했던 내게 이런 일이 닥친 거니까. 제기랄, 엿 같네.” “이성의 소리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지.” 때때로 가브리엘은 살짝 칸트 냄새를 풍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담은 발언을 하곤 했다. --- p.15 “아무것도 아닌 것이 여러분에게서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데, 삶을 견뎌내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생명을 낳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생명을 불어넣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생명을 갉아먹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생명을 데려가네. 그렇지 않다면, 그러니까 극도로 작은(몸짓) 암세포 몇 개의 고약하고도 왕성한 행동이나 혹은 무책임한 익명의 누군가가 발사한 총알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나, 인간사 온갖 근심을 파란 하늘로 날려 보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운명이 안겨준 타격을, 승진을 위해 감내해야 할 모욕을, 식료품 장수의 눈속임을, 정육점의 고기 값을, 우유장수의 우유 값을, 부모들의 극성을, 교사들의 분노를, 좀팽이 상사의 고함을, 있는 것들의 비열함을, 없는 것들의 징징거림을, 무한한 공간의 침묵을, 꽃양배추의 냄새를, 목마의 수동성을 그 누가 버텨내리오. 이 몸은 발레복을 입고 당신 같은 얼간이들에게 내 허벅지를,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태생적으로 털북숭이이나 직업적으로 싹싹 밀어버린 내 허벅지를 보여주면서도 이 모든 문제를 놓고 생각에 잠긴 적이 너무나 많았도다. 여러분이 원하기만 한다면, 오늘 저녁에 이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노라.” --- pp.184-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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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의 취향, 기발한 상상력, 유머로 완화된 염세주의적 세계관
- 언어유희의 대가 ‘레몽 크노’ 문학의 결정판 언어의 판타즘과 해학적 어조로 ‘어느 얼간이 소설가’가 지었다 허무는 패러디적이고 바로크적인 세계 크노 첫 출간, “‘번역 불가능성’ 신화의 균열을 노리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 레몽 크노, 프랑스 현대 문단은 그의 이름을 빼고 논할 수 없다. 기상천외한 말장난과 재기 넘치는 상상력으로 크노만큼 언어유희를 즐긴 인물이 또 있을까. 새로운 조어와 문법과 철자법이 탄생하고 구어와 속어와 은어가 책 속으로 들어왔으니, 크노는 도서관 장서에 박힌 케케묵은 언어가 아니라 길거리 대중의 입에서 살아 숨 쉬는 언어, 즉 구어체 불어를 창작의 재료로 삼고, 언어의 극단적 유희와 실험을 창작의 방식으로 삼아, 인생 허무와 존재의 불안을 해학과 유머로 노래한 작가였다. 특히 99가지 문체의 변주곡 『문체 연습』과 은밀한 해체미의 걸작 『지하철 소녀 쟈지』는 이런 창작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는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들이다. 『지하철 소녀 쟈지』는, 당시에 이미 14편의 소설과 4편의 시집을 낸 중견 작가이자 다수의 문학상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크노에게 “쟈지의 아버지”라는 애칭까지 달아주며 실질적으로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파격적 언어 구사와 패러디 방식을 통해 전후 사회를 유머러스하게 그리면서 소설 장르의 해체를 극단까지 밀고나간 이 소설은 그야말로 크노 문학 세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출간은 크노를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 유명세와 평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못한 배경에는 무엇보다 번역의 난해함이 큰 난관으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에 대한 크노의 판타즘이 곳곳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원작 텍스트는 “기상천외한 말장난과 변화무쌍한 잡종과 변종의 언어”, 그리고 “여기서 꾸어오고 저기서 빌려와 원주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분탕질해놓은 언어들”이 활개를 친다. “번역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이 소설의 번역이 그야말로 지뢰밭을 건너는 작업이었다 하니, 출간 반세기만에 한국어로 빛을 보게 된 핑계 아닌 핑계로 여겨질 법하다. 프랑스 번역학 박사 학위를 받고 번역학계의 고전 번역에 깊은 관심을 가진 번역가 정혜용이 원작 텍스트의 맛과 작가의 의도를 단어 하나하나의 수준에서 살펴가며 우리말로 옮겼다. 그가 오래도록 묵혀온 애정과 수고로움이 없었다면, 이번 출간은 진정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금지된 욕망을 좇는 앙팡테리블의 모험 이 소설은 파리에 상경한 ‘쟈지’라는 이름의 계집아이가 외삼촌 집에 맡겨진 이틀 밤과 하루 낮 동안 겪는 모험담이다. 이 아이의 소원은 딱 하나, 지하철을 타는 것. 하지만 파리의 지하철은 파업 중이다. “출입이 금지된 심연으로부터 쇠비린내 나는 매캐한 먼지내가 살살 풍겨오고 있었다. 그만 가슴이 미어진 쟈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본문 67면) 쟈지는 과연 지하철을 타게 될까? 쟈지는 가브리엘 외삼촌과 그의 패거리를 따라 파리 구경에 나서는데, 시종일관 곤란한 질문을 해대고, 사사건건 참견하고, 속내를 발가벗기려드는 이 아이에게 어른들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만다. “호뭐색슈얼이 뭐예요?” “아저씨는 왜 결혼하지 않았어요?” “왜 사람들이 이런 건 말하면서 저런 건 말하지 않는 거죠?” 대담하고, 오만하고, 예의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 쟈지는 말끝마다 “엿 먹어라”를 날리며, 어른들이 완전한 척 생각하며 살아가는 세상의 허를 찌르고 그 속에 의심과 불안의 씨를 뿌린다. 이는 어른들의 세계가 무지 궁금한 쟈지가 그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아이의 궁금증을 만족시켜주지도, 출입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아이에게는 굳게 닫힌 세계, “금지된 심연”, 그것이 바로 지하철이다. 지하철을 가리키는 불어단어 m?tro는 그리스어 어원에서 ‘어머니’, 즉 근원적 존재로서의 어머니를 뜻한다. 인간이 독립적인 개체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떨어져 나와야 하고, 떨어져 나온 뒤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근원.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통과의례적인 성장 소설의 면모를 지니고 있고, 쟈지가 겪는 모험담은 장차 어른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이겨내야 하는 시련으로 볼 수 있다. 짜깁기한 대사와 포즈의 바로크적인 분출 이 소설에서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의 세계라는 점이다. 변덕이 심한 전지적 화자와 서민계층의 인물들이 쏟아내는 다채로운 문체와 말투, 말장난과 비속어, 상투어와 패러디의 난장이다. “나폴레옹은 엿이나 먹어라”고 쟈지가 똑 부러지게 선언했듯 신은 죽고 영웅은 사라진 세계에서, 이제 소설의 주인공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대중들이며, 무엇을 이루겠다는 목적도 욕망도 없는 이들의 행위는 공허한 ‘말’로 축소되고 말았다. 쟈지가 “엿 먹어라”로 시대착오적 가치들을 과감히 거부하는 데 반해, 어른들은 관례적으로 굳어진 어휘와 역할의 “목록”, 혹은 수많은 다른 텍스트에서 빌려온 말들을 기계적으로 편집해서 자기 것인 양 사용한다. 자기 고유의 생각과 욕망을 갖지 못한 채 상투성에 함몰된 인간 앵무새들. 진짜 앵무새 라베르뒤르는 또 하나의 상투어로 이들의 정곡을 찔러댄다. “나불나불, 나불나불, 네가 할 줄 아는 건 나불대는 것뿐이지.” 우스꽝스럽고 하잘것없는 인물들이 여기저기서 빌려와 주어진 상황에 맞게 짜깁기한 대사와 포즈의 바로크적인 분출, 화려한 패러디의 무대,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무대에 잠시 올랐다 틀에 박힌 춤을 추고 사라지는 꼭두각시들처럼, 이들의 삶은 장황하지만 한순간 깨져버릴 꿈일 수밖에 없고, 세상은 시끌벅적하나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한 편의 연극에 불과한 것이다. 존재의 불안, 죽음에 대한 강박, 크노 특유의 이런 염세주의적 세계관은 가브리엘의 장광설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표출되어 작품의 전체 분위기를 지배한다. “파리는 한낱 환몽일 뿐, 가브리엘은 한낱 (매력적인) 몽상일 뿐, 쟈지는 몽상의 (혹은 악몽의) 환몽이고, 이 모든 이야기는 환몽의 환몽이요 몽상의 몽상으로, 어느 얼간이 소설가가 (오, 미안!) 타자로 친 헛소리보다 조금 더 나을까 말까.”(본문 141면) 소설 장르의 극단적 해체 - “폐허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지하철 소녀 쟈지』는 출간 당시 한 달 만에 5만 부가 팔리며 대성공을 거두는데, 이런 성공의 요인 중 하나는 소설의 외관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대단히 기교적으로 무너뜨린 작법이라 할 수 있다. 겉으로는 50년대 말 파리를 무대로 작중인물들의 궤적을 좇지만, 이 외관의 틀은 점차 균열을 일으키며 독자를 혼란에 빠트린다. 시간과 공간은, 아무 설명 없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얼렁뚱땅 넘어가고, 파리의 명소들은 혼동되기 일쑤고, 시제가 현재와 과거로 들쑥날쑥하는 등, 비약과 혼미를 거듭한다. 인물들은 고유의 심리적 특성도, 확고한 정체성도 없다. 가브리엘이 “집안의 진정한 어른”인지, 클럽 무희 “가브리엘라”인지, 마르슬린은 가브리엘의 “부드러운 아내”인지, 용감한 “마르셀”인지 아리송하다. 양키물건 장수에서 경찰로, 형사로, 아룬 아라쉬드로 화려하게 변신을 거듭하는 변모의 대가에 이르면 정체성의 혼란은 극에 달한다. 그런가 하면, 딸을 강간하려는 아버지를 엄마가 도끼질 한 방에 머리통을 갈라 죽인 비극적 사건조차 신문의 삼면 기사거리로 희화화되고, 마르슬린을 겁탈하러 온 형사조차 단어 문제를 가지고 삼천포로 빠지니, 후반부의 카페 난투극과 과부의 죽음을 제외하면, 뭔가 소설적인 대단한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 배경은 뒤틀리고, 인물은 모호하고, 사건은 무화되면서 형식은 조금씩 무너져내리고, 종국에는 리얼리즘과 판타지의 경계마저 허물어지는 이 이상야릇한 소설. 크노는, 서구 문명의 절대적 가치가 붕괴된 전후 사회에서 소설 장르 역시 그러한 운명을 비껴가지 못했음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을 두고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이야기를 직접 허무는 대신 전통적 요소를 하나씩 벗겨냄으로써 서서히 해체되어가는 ?품이라 평하며, 이를 “폐허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에 비유했다. 하나의 완벽한 질서 아래 일관성 있게 구축된 세계, 그것이 고전적 의미에서의 소설일진대, 화자랍시고 ‘어느 얼간이 소설가’가 난데없이 등장해 텍스트 상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은 결국 소설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말하려던 게 아닐까. 소설은 소설가가 작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언어적 허구’라는 것을. 크노는 자신의 소설들이 양파 같다고 했다. 독자에게 이건 허구라고 말하며 스스로 해체되어가는 이 소설 역시 무수한 껍질에 싸인 양파 같다. 한 겹 벗기면 어른 같은 쟈지와 애들 같은 어른들이 있고, 또 한 겹 벗기면 “어디서이케써근내가나.”로 포문을 여는 언어의 유희가, 또 한 겹, 금지와 욕망의 구조가, 또 한 겹, 유머로 무장한 실존의 철학이, 또 한 겹, 소설이라는 장르의 해체가…… 껍질은 벗겨지고 독법은 달라진다. 우리 시대의 크노 크노 문학은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이다. 프랑스는 물론, 크노를 자국의 언어로 번역한 나라에서는 어디든 꾸준히 읽히고 있고, 영화광들은 루이 말의 영화를 통해 크노를 만나고, 연극 무대에서는 연출가의 색깔에 따라 매번 다양한 크노를 볼 수 있다. 이런 크노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선은 일상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고, 해학과 유머가 웃음을 선사하며, 삶의 부조리를 다룸으로써 현대인의 보편적 삶의 핵심을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크노의 자유롭고 실험적인 창작 의지가 현대문학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크노는 소설 장르의 해체가 진행되던 시기에 철저한 해체를 통해 새로운 형식의 미를 구축했고, 문학 언어의 전형으로 간주되던 문어 대신 구어를 창작의 재료로 삼아 새로운 문학, 살아 있는 문학을 창조하고자 했으며, 속어와 은어를 포함한 다채로운 일상의 언어를 글쓰기의 경지까지 끌어올려 문학 언어의 다변화를 노렸다. “새로운 문학의 출현은 새로운 ‘재료’의 사용을 통해서이다”, “문법학자들과 교육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손상되지 않은 언어의 사용이 곧 ‘생각’ 자체를 만들어낸다”고 역설한 크노. 인문학과 문학의 위기가 회자되고 인터넷 시대에 언어가 마구잡이로 해체되는 작금에, 크노의 이런 실험정신과 도전적 사유는 우리의 문학계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진다. 물론, 레몽 크노라는 천재적 작가의 열정과 재능을 보는 것 자체가 이미 독자에게는 큰 기쁨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