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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0 . 서문 1 . 메타문자 2 . 각명문자 3 . 표면문자 4 . 자모음 5 . 텍스트 6 . 도서인쇄 7 . 규정 8 . 구어 9 . 문예창작 10. 읽기방식 11. 암호풀기 12. 책 13. 편지 14. 신문 15. 종이거래 16. 글쓰는 탁자 17. 스크립트 18. 디지털 19. 코드변환 20. 서명 21. 추신 옮긴이 해설: 빌렘 플루서와 텔레마틱 사회의 유토피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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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미래상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타성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들은 이미 한번 글쓰기를 배웠고 새로운 코드들을 배우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우리 자신의 타성을 우리는 위대함과 고상함이라는 어떤 신비한 분위기로 감싸려 하고 있다. 말하자면, 호메로스와 같은 시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 괴테와 같은 작가들이 이룩해 놓았던 위대한 업적들이 글쓰기의 운명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성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다만, (성서의 저자를 포함한) 이러한 위대한 작가들이 그들의 업적들이 카세트테이프로 녹음되고 필름으로 영상화되는 것에 대해 싫어할 것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16쪽)
사고가 연출되는 차원은 우리에게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불유쾌하다. 먼저 그 차원은 사고과정에서'관찰이 관찰대상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관찰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주체 없는 객체라는 의미에서의 “대상성”(Objektivitat)은 여기에서는 언급될수 없다. 둘째로는 그 차원에서는 순수한 우연이 지배하고 있고, 그것을 비록 통계적으로 지수화할 수는 있지만, 어떤 개별 소립자의 미래적 행태를 예견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모든 가능한 것, 또한 가장 비개연적인 것도 역시 거기에서는 시간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한다. 따라서 이러한 불확실성(대상이 포착될 수 없다는 것)과 이러한 예견불가능성(모든 가능한 것이 언젠가는 필연적이 될 것이라는 것)이 사고를 특징짓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조정할 수 있다. 확정불가능성과 확률계산뿐만 아니라 사이버네틱도 역시 사유에 적합한 부분이고?이 경우 고려되어야 할 것은 사이버네틱적인 조정 그 자체는 다시 불확정성과 통계적 개연성(확률)의 차원으로부터 유래되고 있다는 점이다. (229~230쪽) 우리가 새로움에 직면해서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 중에서 아마도 첫번째 것은 순차적·진보적·선형적 사고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선형적 문자 속에서 스스로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그런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기억에 새로운 코드를 저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알파벳을 기억으로부터 지워 버려야만 할 것이다. (237쪽) 디지털코드에 의해서 생산된 영상들은 도처에서(또한 지표의저편에서도) 동시적으로 현재적이다. 그것들은 항상(또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미래에서도) 호출될 수 있고 현재화될 수 있다. 이 영상들에서는 “현재” “미래” “과거” 그리고 특히 “거리두기” 그리고 “가까움”(즉 “간격”) 등과 같은 개념들이 새로운 의미를 얻고 있다. 비록 상대성이론이 이러한 새로운 의미의 학습에 있어서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존화해야만 한다. (239쪽)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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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오래된 미래를 묻다
-우리는 계속 쓸 수 있을까? 미디어 연구의 선구자 빌렘 플루서의 대표작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가 수정, 복간되어 2015년 엑스북스(xbooks)에서 다시 출간되었다(이 책은 국내에서 1998년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로 번역·소개된 바 있다). 디지털이 공기처럼 익숙해진 시대, 고대벽화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문자’를 탐구하는 커뮤니케이션/디지털 사상가 빌렘 플루서의 고전,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는 차라리 예언서에 가깝다. 이 책은 문자코드에서 디지털코드로의 변환의 과정을 추적하며 인간의 사유능력과 글쓰기 행위의 의미를 밝히는 책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글쓰기의 ‘과거’와 ‘도태’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글쓰기의 ‘미래’를 논하고 있다. 도전받는 글쓰기, 읽기와 쓰기의 코드변환 하나의 유령이 출판계를 떠돌고 있었다. ‘책의 종말’이라는 유령이. 책이 과연 사라질 것인지 어쩔 것인지 정체 모를 불안과 공포가 책과 관련된 사람들을 잠식했고,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라고, 소위 말하는 ‘고귀한 정신의 문화유산’이 사라질 지경이라고,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밥줄 걱정이 아닌 듯 말했다. 여러분 그러나 종이책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물에 빠져도 여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며, 스티븐 킹이며 시대의 지성들은 그것이 마치 기술의 문제이기만 한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고, 혹은 꼭 지켜야 할 성(城)이 함락되기라도 한 양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디어의 어떤 세계를 예견한 천재적인 디지털 사상가 빌렘 플루서는 80년대에 이미 종이책과 인쇄매체, 디지털의 도래, 코드변환 등을 이야기하며 그것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일찍이, 알파벳 문자(와 그에 기초한 사고)가 있기 전에는 그림이 있었다. 무덤이며 동굴이며, 여기에 남아 있는 그림들은 전(前)역사시대의 마술적 사고를 보여 준다.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고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 마술적 사고는 도전받고, 알파벳 코드의 구조적이고 체계분석적 사고방식으로 머지않아 대체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21세기, 이제 디지털 코드(와 그에 기초한 사고)는 알파벳적 선형구조를 위협한다. 글쓰기라는 우주를 탐사하는 빌렘 플루서의 논의는 선형(linear)이 파괴되는 이야기에서 시작할 수 있을 텐데, 이는 의미들을 꿰기 위해서 선형적인 역사의식과 사고방식이 필요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 분절되고, 0과 1로 양자화된 코드가 지배하는 전혀 달라진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에 우리가 처해 있다는 정황의 이해가 우선될 필요가 있겠다. 이제 사람들이 무언가를 읽는 행위는 선형적이고 순차적이기보다는 비선형적이고 분절적이다. 필요에 의해 조합되고 편집되는 정보수집과 지식의 습득을 가능케 한 네트(망)적 전환은 언어의 규칙, 논리를 따를 필요를 불식시키며 어떤 평면을 향해가고 있다. 유일한 진리,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단 하나가 아니라, 망에 걸려드는 가능성들을 이용해 불개연성(정보)을 만들어 낸다.?우리가 연구자가 아니고 발명자이며, 더 이상 과학자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는 이유이다. 달라지는 글쓰기, 그래서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 흙에 글자를 새기고, 이 기록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인간은 ‘굽기’를 발명했다. 이어 거위깃털이, 펜촉이, 타자기가 발명되었다. 이는 인간정신이 이룩해 낸 고도의 성취물이다. 서양의 역사라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인간정신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정보를 생산하고, 후대에 전승시키고 또한 그것을 항구적으로 저장시키는 것. 정신의 불멸을 소원하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 글쓰기는 자유의지의 표현이며, 인간 행위 중 몹시 특유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책 속에서 빌렘 플루서는 ‘각명문자-표면문자-자모음-텍스트’의 순으로 문자를 이야기한다. 각명문자는 이를테면 돌이나 청동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표면문자는 종이 위에 잉크로 흘려 쓰는 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한 획 한 획 신중히 그어져야 하는 각명문자 시기에 잠복해 있던 어떤 기질이 글쓰기가 훨씬 수월해진 표면문자의 시기로 오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수정이 수월하지 않은 ‘원고지에 펜으로 쓸 때’와, 수정은 물론이거나와 복제와 편집이 자유로운 ‘컴퓨터에 글 쓸 때’의 우리의 사고와 글쓰기 과정을 돌이켜보면 이는 좀 더 쉽게 이해 가능하다. “인간은 힘을 덜 들이면서도 더 빨리 쓰기 위하여 정으로 새기지 않고 붓질을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의 신속성은 각명문자와 표면문자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다.”(본문 38쪽) 속도. 빨리 읽히기 위해 빨리 쓰여진 문자기록물들. 사유의 속도를 따라가고자 우리의 손도, 우리의 필기도, 필기를 돕는 기구도 점점 가속이 붙었다. 끊기지 않(으려)는 표면문자적 글쓰기 행위에의 시도는 따라서 인간의 사고와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우리가 쓰는 글쓰기 도구가 우리 사고에 함께 가담한다”는 니체의 말마따나 어떤 장치, 어떤 호흡을 갖느냐는 우리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에게 문자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주요한 요소이고, 글쓰기는 인간이 추상하는 바를 구체화하는 방법론으로 택한 것일진대, 달라지는 글쓰기의 전환점에서 플루서는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어떤 가능성을 제안한다. 빨리 읽고 빨리 쓰는 것. 끊기지 않는 것. 지치지 않는 것. 이것들은 기계들의 본질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러한 사고행위를 인간보다 더 잘 수행할 것임에랴. 이에 어쩌면 우리는 이 행위를 기계장치에 위임하고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 “두뇌와 타자기의 (눈과 손가락을 매개로 하는) 변증법은 타자기의 한 부분이 우리의 두뇌 속으로 그리고 우리 두뇌의 한 부분이 타자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영향을 미친다. 타자기가 두뇌의 한 부분을 차지함으로써, 그 전에 존재했었던 우리 두뇌의 한 부분을 잃어버렸거나?좀 더 낙관적으로 말하자면?하나의 두뇌 기능이, 다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자유로운 상태로 남는다.”(본문193쪽) 자유롭게 남아 있는 인간 정신의 다른 기능을 어디에 집중하여 어떻게 쓸 것인가? 사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꼭 글쓰기 그 자체라기보다는 무엇에 집중하느냐의 문제일지 모른다. 불확정성 세계의 글쓰기, 가능한 것은 실현된다 “디지털 사상가”로 불리어지는 빌렘 플루서의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기술의 본질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하이데거에 공감하고 있기도 했거니와 젊은시절부터 망명과 박해로 고향을 떠나 떠돌아야 했던 그의 삶. 뿌리없는 상실감은 곧, (모순되게도) 그의 뿌리였다. 붙박혀 살지 못하고 부유했던 생활이 그의 글쓰기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의 글에 각주나 참고문헌이 없고, 자유로운 에세이 형식이 대부분인 이유다. 떠도는 삶에서 늘상 직면해야 했을 문화적 한계, 언어…… 이것들은 빌렘 플루서에게 실존적인 문제였고, 패러다임 변환과 더불어 언어와 사고 자체를 코드변환적 측면에서 사유한 그의 연구가 기존의 가치들에 연연하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정보혁명은 도서인쇄, 알파벳 그리고 이와 결부된 사고방식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그러나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그러나 이미 예감될 수 있는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본문 94쪽) 가능한 것은 모두 실현된다. 1987년 빌렘 플루서가 가능성으로 제시한 모든 것들이 이미 현실로 나타난 2015년. 단순히 인류의 지적 능력의 퇴화랄지 독서능력의 감퇴를 안타까워하기만 할 게 아니라, 이 명백한 패러다임 변환의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궁구하는 일이 절급하다. 가히 혁명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시대의 변화, 기술의 진보, 달라지는 코드에 발맞추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며 그러기 위해 유치원에라도 기꺼이 돌아가야 한다고, 빌렘 플루서는 겸허히 주장하고 있는데, 새롭게 영접할 다른 세계(네트워크/망), 무수한 것들이 교차하는 그 지점들에서 비로소 진정 새롭고 진정 창조적인 것이 탄생할 것이라는 그의 말은 일견 픽션 같지만 또한 그보다 리얼하고 구체적일 수 없다.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입자와 파동은 멈추지 않는다. 불확정성의 세계에서, 글쓰기 자체도 글쓰는 주체인 우리도 그렇다. 기계는 인간화하고 인간의 영역을 기꺼이 떠맡는다. 기계는 이미 우리가 알던 단순한 자동장치가 아니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능숙하고 효율적으로 사고처리를 담당하게 된다. 이 사이,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의 자유를 획득하며 지금까지 존재한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된다. 전혀 다른 차원의 사유가 가능해졌음은 기계를 이미 외뇌(外腦)화한 신인류의 탄생으로 매일 실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자유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 가운데 하나는 ‘사실은 아무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우리는 자유롭고 싶다고 말하지만 막상 닥친 자유 앞에서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복잡하고 반복적인 것은 외뇌에게 기꺼이 넘겨 버리고 이제 남은 뇌의 기능으로 인간만이 가능한 새로운 할일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자, 자유이자, 미래이다.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있다. 미래를 보는 사람에게는. 혹은, 없다. 사실은 미래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