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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임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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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토로지컬 모닝이란 말이 이렇듯 나름나름으로 심약하다고 할 수도 있는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증세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한테만 해당되는 무슨 특수한 병이기나 한 것처럼 버젓이 그 말을 기입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라면 석가보다도 더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 아니할 수가 없겠군요.
--- p.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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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느 철학자는 사랑을 어떤 대상에 대한 관장된 심리의 지속이라고 했어요. 가령,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여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그 여자에 대하여 그 남자는 과장되게 예쁘다, 귀엽다, 착하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그런 과장된 감정을, 길든 짧든, 지속하고 있는 상태라는 거지요. (이 소설은 통째로 읽혀야 합니다. '책속으로'가 필수 사항이여서 어쩔 수 없이 골랐지만 마치 토막난 시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책속으로'가 꼭 필요하지 않다면 등록시 '책속으로'의 내용은 제외해 주시면 어떨까요?)
--- p.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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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실상이고 어느 것이 허상이냐고요? 그야 당연하지요. 죽지도 않은 내 아내를 죽었다고 하며 나에게 새 출발을 하라고 강요하는 처남은 허상이고, 그 반대의 처남은 실상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내 아내는 여기 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엄연히 살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허상은 끊임없이 출현하여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우리 부부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엇지요.
--- p.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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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력요? 글쎄요. 스님한테 특별한 신통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신통력이라는 걸 믿지 않습니다. 인간 세상에 진실로 신통한 것이 있다면 과학 문명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들 외에 뭐가 또 있겠습니까? 전화만 해도 그렇지요. 아무리 멀고 외딴 곳에서라도 단추만 누르면 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잤아요? 세상에 이보다 더 신통한 것이 뭐가 또 있겠어요? 내가 그 스님과 친한 것은 그분의 인자하면서도 호탕한, 그러면서도 현명한 성품과 지혜 때문이지, 그 분의 무슨 신통력 때문은 아니랍니다.
--- p.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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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내가 이 도시에 온 것부터가 도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요? 허참!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는군요. 그런식으로 말한다면 미구에 닥칠 어떤 사건을 두고 도망 다닌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서 사람들은 이제 마음대로 여행도 할 수 없겠군요. 대체 언제부터 이 나라에 여행의 자유가 없어진 거죠? 언제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사전 허가를 받도록 된 거죠?
내일 아침이면 영장이 발부될 거라고요?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가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영장도 없는 부당한 인신 구속 상태에서 심문에 응할 의무가 나에게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밤에는 일단 나를 풀어주시오. 낯선 여행지에 아내를 혼자 버려둘 수는 없으니까요. 뭐라고요? 도주와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어 그건 안 된다고요? 당신들은 정말 고집불통이로군요. 내가 도주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방금 설명했잖아요. 그리고 영장을 신청해 둔 상태라면 당신들은 이미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런데도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어 날 풀어줄 수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내가 무슨 증거를 어떻게 인멸한단 말입니까? --- p.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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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들고 있던 아령으로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 지긋 지긋한 처남의 허상을 향하여 말입니다. 처남의 허상을 제거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내가 만약 뒤를 돌아보면 그 허상은 다시 살아나 엉뚱한 말을 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실제 내 처남이 죽었다니 하늘에 맹세코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건 다른 누군가가 한 짓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처남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중에 한 사람의 소행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처남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은 대부분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니까요.
---p.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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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본 이 소설
이 소설은 주인공이 독백체로 구술하는 형식이다. 내용 면에서 ‘환상과 실제’가 절묘하게 버무려져 있는 데다, 한편의 추리 소설을 읽는 느낌을 주기도 할 만큼, 사건의 진실을 향한 행보가 주인공의 진술을 따라 나선을 그리며 펼쳐진다.
이제까지 하일지는 ‘거리두기’를 통해 자신의 미학을 창조해왔다. 그런데 이번 소설에 보이는 일인칭 시점의 독백체 자체도 전에 없던 형식이거니와, 이를 통해 만들어낸 문학적 질감이 또한 독특하다. 독백체로 쓰는 장편이란 콘라드의 표현을 빌리면 먼 항해에서 돌아온 뱃사람이 항구의 선술집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야말로 제멋대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하는 얘기와 어울리는 틀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거리두기’보다는 청중을 무섭게 빨아들여 그들을 저 악마성에 푹 담갔다가 혼을 온통 빼놓은 상태로 내동댕이쳐버릴 수 있는 그런 얘기와 어울린다는 뜻이다. 이 소설은 굳이 따지자면 형식에선 콘라드를 차용하면서도 내용에선 전혀 콘라드답지 않은 수형도를 그린 셈인데, 왜 이렇게 어려운 구도를 택한 것일까. 작가는 혹시 우리를 무섭게 끌어당기는 것이, 사실은 실제의 육체성이 아니라 환상의 비육체성이고, 우리를 밀어내는 것 또한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환상의 무형성이 아니라 실제의 육체성이라는 걸 방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의 소설 이력에서 새로운 ‘거리두기’를 꾀할 셈이었을까. 한 편의 소설을 읽어가며 문체와 주제에 적응했다고 느끼는 순간, 시선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서사 구조를 향하게 마련이다. 이 소설의 독백에, 한 남자의 진술이 전하는 눈물겨운 사연에 익숙해지면서 독자는 그 서사 구조에 끌려 들어가지만 서사는 곧 플롯을 배반하고 플롯은 다시 서사를 배반하면서 한사코 독자를 밀어낸다. 이 파동 속에서 독자는 과연 어떤 진실과 만날 것인가. 아니, ‘환상과 실제’의 착종 속에서 이런 식의 질문은 또 가능한 것인지. 만났다 싶으면 몸을 틀어버리는 서사, 행간이 내장한 의문 부호들…… 마지막 장을 덮었지만 아직도 남자의 들린 목소리가 쫓아오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