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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책을 펴내며 윤인구 | 제헌국회의원유족회 회장
축사 제헌국회와 헌법정신 이재명 | 대통령 기억에서 기록으로, 가족이 전하는 제헌국회의원의 발자취 우원식 | 국회의장 논고 제헌국회의원, 제헌국회를 다시 생각하며 서희경 | 서울대학교 회고록 01 제헌국회의원 강선명 청렴한 큰 어른 강명구 | 증손자 02 제헌국회의원 김경도 교육 백년대계의 초석을 다진 교육자 김성림 | 손녀 03 제헌국회의원 김광준 빛 광(光) 자 준걸 준(俊) 자 김관호 | 아들 04 제헌국회의원 김교중 잊어서는 안 될 전쟁의 기억 김정훈 | 증손자 05 제헌국회의원 김덕렬 75년 만에 쓰는 망부가(望父歌) 김현주 | 딸 06 제헌국회의원 김영기 대한민국 정통성의 상징-제헌국회의원의 실체 모습 김진현 | 아들 07 제헌국회의원 김옥주 김옥주, 젊고 유능한 초대 국회의원 김진원 | 아들 08 제헌국회의원 김용재 제헌국회의원 초부 김용재의 약사(略史) 김현문 | 아들 09 제헌국회의원 김웅권 파주 3.1만세운동과 조선민족청년단의 지도자, 김웅권 김형인 | 아들 10 제헌국회의원 김진구 백곡 김진구, 선의를 베풀고 대의를 이루다 김남석 | 손자 11 제헌국회의원 김태수 진해 할아버지 김태수 김동욱 | 손자 12 제헌국회의원 류래한 명함에 대한 소고 - 검소함과 청렴함에 대하여 류승현 | 증손자 13 제헌국회의원 류준상 제헌국회의원 소정 류준상 유민호 | 손자 14 제헌국회의원 문시환 나라 없는 설움처럼 뼈아픈 서러움이 없다 박영인 | 외손녀 15 제헌국회의원 박기운 명암(明岩) 박기운(朴己云) 선생의 생애와 정치 박준휘 | 손녀 16 제헌국회의원 박상영 외조부 계당(桂堂) 박상영(朴湘泳) 제헌국회의원을 추모하며 태준호 | 외손자 17 제헌국회의원 박종남 제헌국회의원 박종남(朴鍾南)을 추억하다 박경수 | 아들 18 제헌국회의원 박찬현 항상 등대가 되어 주신 나의 아버지 박순용 | 아들 19 제헌국회의원 백형남 젊음을 조국에게 백운선 | 아들 20 제헌국회의원 송봉해 나눔과 섬김의 봉사 정신으로 몸 바쳐 살아온 정암(靜庵) 송봉해(宋鳳海) 송민철 | 종증손 21 제헌국회의원 신광균 추위에 떠는 걸인에게 외투를 친히 벗어 주시고 오신 아버지 신현제 | 아들 22 제헌국회의원 신익희 해공(海公) 그리고 나의 아버지 신정완 | 딸, 신동호 | 종고손 23 제헌국회의원 신현모 나라와 말글에 바친 삶 신동립 | 손자 24 제헌국회의원 양병직 제주 대한청년단의 지도자, 청운(晴雲) 양병직(梁秉直) 양제갑 | 손자 25 제헌국회의원 오용국 제주를 대표한 제헌국회의원 오용국(吳龍國),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오창생 | 아들 26 제헌국회의원 원장길 그분의 삶은 마치 한 편의 서사시와 같았습니다 최윤상 | 외손자 27 제헌국회의원 유성갑 청운의 별이 지다, 석계(石溪) 유성갑(柳聖甲) 故 유대진 | 아들, 유빈·유담 | 손자 28 제헌국회의원 유홍렬 잊혔던 이름, 다시 꺼낸 기억 유유미 | 손녀 29 제헌국회의원 윤석구 기억 너머 할아버지, 故 윤석구(尹錫龜) 윤건 | 손자 30 제헌국회의원 윤치영 그리운 할아버지 윤인구 | 손자 31 제헌국회의원 이병국 국권 회복에 몸 바친 40년 이정구 | 손자 32 제헌국회의원 이상돈 설날의 추억 이영아 | 장손녀 33 제헌국회의원 이성우 나의 아버지를 추억하다 이연행 | 둘째 아들 34 제헌국회의원 이승만 우남 이승만, 아내 프란체스카를 위해 목조 양변기를 만들다 이병구 | 손자 35 제헌국회의원 이인 어느 한 해의 회고 이정 | 아들 36 제헌국회의원 이재형 운경 이재형, 대한민국 정치사의 중심인물 이해림 | 손자 37 제헌국회의원 이주형 조부 시곡공(時谷公)을 추모하며 이희일 | 손자 38 제헌국회의원 이진수 자랑스러운 나의 외증조부, 이진수 할아버지 최지연 | 외증손녀 39 제헌국회의원 전진한 할아버지 우촌(牛村) 전진한(錢鎭漢) 선생을 다시 만나다 전동현 | 손녀 40 제헌국회의원 정현모 은(銀)주전자에 담긴 그리움 한동현 | 외고손자 41 제헌국회의원 조국현 강철 같은 지조를 지킨 할아버지 조봉근│손자 42 제헌국회의원 조영규 관해(觀海) 조영규(曺泳珪) 제헌·3·4·5대 4선 국회의원 조상경│딸 43 제헌국회의원 지청천 지청천 장군의 아픔과 고뇌 지상철│손자 44 제헌국회의원 최범술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제헌국회의원 최화정│아들 부록 제헌국회의원 명단 제헌국회 사진 자료 제헌국회의원유족회 연혁(1994년~2025년) 제헌국회의원유족회 임원 명단(창립~5대) 제헌국회의원유족회 창립과 초창기 일화들 김진현 | 제헌국회의원유족회 창립 회장 제헌국회역사기념관, 제헌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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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49년에 아주 좋았던 기억으로는 중앙청 견학이 있었다. 삼청동에 있던 고종사촌들이 졸라서 이루어진 이벤트였는데 손을 잡고 중앙청을 향해 쫄랑거리며 가다가 아버님이 홀연 다른 곳으로 이끄셨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웅장한 그곳에서 어떤 어른을 만났는데 아버님은 “인사드려라. 이승만 대통령이시다.”라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다. 그곳은 바로 경무대였던 것이다. 옆에는 프란체스카 여사도 계셨다. 당시 사람들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전부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호주에서 왔다고 붙여진 명칭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어서 무언가 잘못 알려진 사실이 그대로 통용되었구나 싶었다. 경무대를 나올 때 호주댁은 나에게 인형을 선물하면서 “잘 가요, 아가.”라고 또렷한 한국어로 작별 인사를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람들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어를 전혀 못 하고 오만하다는 말들이 있어서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그날 본 프란체스카 여사는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정다감한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한테 인형도 선물했으니까
--- 「제헌국회의원 김덕렬: 75년 만에 쓰는 망부가(望父歌)(딸 김현주)」 중에서 그때만 하더라도 국회의원은 물론 상임위원장들조차 차를 한 대씩 못 갖고 재정위원장 홍성하와 아버님이 한 차로 동반하여 출퇴근을 했어요. 두 집이 신당동(약수동) 근처였습니다. 위원장이 아닌 국회의원과 국회 직원의 출근은 불하받은 미군 트럭이 맡았어요. 트럭 난간의 가운데를 따면 펼쳐지는 의자가 되는데 그 트럭이 말하자면 국회의원 통근 차량이었어요. 통근 ‘버스’가 없었지요. 이 트럭이 국회로 가면서 중간중간 신당동 네거리, 을지로6가, 3가 네거리 부근에 한 번씩 서는 거예요. 그럼 거기 모여서 타는 거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렇지 않으면 각자 전차 타고 다니거나. 비서도 없었고 보좌관도 없었어요. 월급은 중앙청 공무원 사무관급의 돈이었고 그 외 수당도 없었어요. 어느 날 국회 트럭을 얻어 타고 국회에서 내려 양정학교로 걸어가는데 연병호 의원이 흰 바지저고리에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역시 하얀 고무신을 신고 전차에서 내려 국회로 걸어가셨던 모습이 왜 그런지 어제 본 것같이 선한 이미지로 남아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요새 젊은 세대뿐 아니라 50대도 생각을 하기 힘들 텐데, 그때는 국회의원 집이라는 것이 여관이고 정거장이에요. 그냥 아무나 집 문 두드리면서 “나 안성군 공도면 아무개입니다.” 하면 문을 열어 줘야 해요. 집에 들어와 아버님이 밤늦게 오실 때까지 점심 먹고 저녁 먹고 또 자고. 그다음 날 아침에 아버지하고 나가면 다행인데 “내가 서울에서 며칠 더 일이 있어서.” 그러고는 나갔다가 그날 저녁에 다시 또 돌아오고 하면서 며칠이고 있는 분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 방이 내 방일 수가 없고 손님이 많으면 내 방에 모시고 난 안방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런 것이 그 당시의 제헌국회의원 집의 살림 풍경이었습니다. 손님 접대를 하느라 씀씀이는 큰데 아버님이 생활비는 충분히 못 대 주시니 어머님이 참 어려우셨지요. 나중에 어머님이 마당에다 닭도 손수 치시고. --- 「제헌국회의원 김영기: 대한민국 정통성의 상징-제헌국회의원의 실체 모습(아들 김진현)」 중에서 할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하셨다. 지금도 막걸리를 마시면 자연스레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아이들의 막걸리 심부름은 흔한 일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바깥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실 때쯤 할머니는 낡은 놋 주전자를 들고 동네의 유일한 점방(구멍가게)으로 가서 막걸리를 받아 오셨다. 그러면 나는 “제가 갔다 올게요.”라고 말하고 막걸리 심부름을 자처하고는 했다. 당시 점방에서는 막걸리를 큰 단지에 넣어 두고 주전자를 들고 오면 바가지로 퍼 주는 방식으로 막걸리를 팔았다. 사실 내가 막걸리 심부름을 자처했던 이유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이길래 그렇게 찾으시나.’ 하는 순수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올 때는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는 홀짝홀짝 맛보기도 했던 기억이 엊그제같이 생생하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 「제헌국회의원 김태수: 진해 할아버지 김태수(손자 김동욱)」 중에서 문시환의 이런 활동으로 경남 동래군에 있던 본가는 항상 일경에 의해 감시당했다. 아버지는 만주 안동현으로 가출했을 때 충격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을 듣고 일경의 감시를 피해 겨우 본가에 왔으나, 일경이 본가를 완전히 포위하여 감시하고 있었기에 상복을 입고 변장을 하고 들어가 아버지의 시신만 보고 나왔다. 어머니와 5명의 여동생들이 걱정하고 있었기에 아주 가끔 편지를 전하였지만, 본가 밖에서 감시하는 일경들에게 들킬까 두려웠던 어머니는 저녁이나 이른 새벽, 밥을 하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를 이용해 편지를 읽고 옆에 있는 아궁이에 넣어 태워 버렸다. --- 「제헌국회의원 문시환: 나라 없는 설움처럼 뼈아픈 서러움이 없다(외손녀 박영인)」 중에서 내가 학령 전의 어렸던 시절, 주위 사람들은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종종 물었다. “손자세요?” 아버지는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띠며 “손자 겸 아들이지요.”라고 대답하셨다. 그 말에는 어떤 유쾌한 자조와 함께, 나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늦게 얻은 아들이라 더욱 그러셨을까. 아버지는 나를 특별히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늘 표현으로도, 행동으로도 아낌없이 전해졌다. 비록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의 간극이 존재했지만, 아버지는 그 세월의 틈을 단지 세대차라는 표현 아래 방치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지혜와 지식, 그리고 끊임없는 사유의 언어로 그 거리를 메우고자 하셨다. 내가 종종 던진 하찮은 질문에도 항상 성의 있게 대답해 주시고, 질문 이상의 무언가를 깨닫도록 유도하셨다. 그 가운데 우리는 시대를 달리한 두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닿으려는 인간적 만남을 실현하는 부자지간이 되었다. --- 「제헌국회의원 박찬현: 항상 등대가 되어 주신 나의 아버지(아들 박순용)」 중에서 사실 오빠와 나는 우촌 선생의 사회장을 목격하기 전까지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한 분인지 몰랐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다니면 마주치는 많은 분이 알아보고 인사해서 좀 의아하기는 했지만 오빠는 그저 아주 많이 존경받는 동네 어르신 정도로 짐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국민학교 5, 6학년쯤 되었을 때 우리 남매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할아버지 자료를 잘 모아서 책을 한 권 만들어 남겨 보자고. 그 이후 우리는 기자로, 역사학도로 살면서 그 약속을 잊은 적은 없었지만 우리가 힘을 보탠 자료집의 출간을 보기까지 5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야 했다. --- 「제헌국회의원 전진한: 할아버지 우촌(牛村) 전진한(錢鎭漢) 선생을 다시 만나다(손녀 전동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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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의원은 누구인가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인 제헌국회의원들은 하루아침에 탄생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민족 지도자들이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그들의 불굴의 정신과 행동은 후세에 길이 기억될 만큼 눈부셨다. 미처 담지 못한 그날의 이야기 제헌국회의원들의 다양한 일화들은 그들이 교육과 계몽을 통해 미래 인재를 양성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천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연대와 사랑을 베풀고, 독재와 불의에 맞서 용기 있게 저항한 인물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교육과 계몽을 통한 인재 양성 제헌국회의원들은 교육과 계몽을 통해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는 신념이 확고했다. 이재형 의원의 손자 이해림은 이렇게 증언했다. “‘교육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하시던 할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설립된 운경재단(1993)을 통해 할아버지의 정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운경재단이 …… 1천여 명이 넘는 대한민국의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품으셨던 철학과 가치관이 앞으로도 이어져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인 의원의 아들 이정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선친은 후진들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교육 사업에도 힘을 썼다. 김천고보, 덕송고보, 오늘날 중앙대학의 전신인 중앙보육, 국학대학 등의 교육 기관의 창설을 주관하거나 직접 운영하였다.”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한 소통 정신 제헌국회의원들은 민주주의의 가치인 대화와 경청을 몸소 실천했다. 전진한 의원은 산책 도중 시민들이 질문하면 즉석에서 강연과 토론을 펼치고는 했다. 전진한 의원의 손녀 전동현은 이를 회상하며 이렇게 기술하였다. “할아버지와의 산책이 때로 지루할 만큼 길어졌는데, 할아버지를 알아본 분들이 다가와 질문을 하고 아예 잔디밭이나 나무 밑에서 자리 잡고 강연과 토론이 이어졌다. 그 소박하지만 진지하고도 평화로운 광경을 지금도 기억한다.”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와 헌신적 봉사 제헌국회의원들은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와 봉사를 성심껏 실천했다. 이성우 의원은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나누어 준 덕분에 6.25전쟁 당시 인민위원회 간부들조차 그의 은혜를 기억하며 보호해 주었다. 청렴과 원칙의 엄격한 고수 제헌국회의원들은 정치적 유혹이나 개인적 이익을 철저히 배제하고 강직한 태도를 견지했다. 신현모 의원은 세비 외 수당금 수령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준 의원과 나는 세비 이외의 수당금은 받지 않기로 하고 이 뜻을 연서로 국회의장에게 통고했다.”(신현모 손자 신동립) 류래완 의원은 의원이 된 후 친인척의 인사 청탁을 엄격히 거절하고 이렇게 강조했다. “넉넉하지 않게 살아도 비루하게 살지 말라.”(류래완 증손자 류승현) 신광균 의원은 평생 사적 명예나 욕망이 아닌 국민을 위한 삶을 살고자 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어기고 사적인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신 적이 결코 없었다.”라고 회고했다(신광균 아들 신현제). 사람을 중시하는 태도와 후손에 대한 가르침 제헌국회의원들은 사람과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진심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교류가 삶의 중요한 가치임을 강조했다. 원장길 의원은 바른 마음과 태도를 강조했다. “사정(思正), 심정(心正), 견정(見正), 언정(言正), 행정(行正)을 실행 실천하고 가슴속에 깊이 새기도록 하였다(원장길 외손자 최윤상).” 또한 신익희 의원은 자녀들에게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면 세상의 모든 일을 알아 두어야 한다. 좀 안다고 거만해서는 안 되며 남이 모른다고 비웃어도 안 된다.”라는 가르침을 남겼다(신익희 딸 신정완, 종고손 신동호). 독재와 불의에 맞선 저항 조영규 의원은 4.19혁명 당시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고, 5.16군사정변 이후에도 독재에 맞서 정치적 저항을 지속했다. 조영규 의원의 딸 조상경은 아버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기억한다. “4.19혁명 때 학생들의 추앙 대상이었던 아버님은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나섰다. 5.16군사정변 때는 군인들이 집에 와서 군홧발로 아버지를 연행해 가는 모습을 기억한다. 이후에도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옹,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시국을 걱정하는 모임에 앞장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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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만들었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1948년 5월 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말 그대로 법치국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한 글자 한 글자 쌓아 올렸습니다.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수호하려는 열망과 용기를 가진 국민과 함께, 제헌헌법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힘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 이재명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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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은 독립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해 국민주권, 민주공화의 정신으로 새로운 나라의 질서를 세우려는 원대한 포부, 혼란을 딛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국민 모두의 염원을 담아낸 위대한 첫걸음이었습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일상이 어떻게 공동체의 미래와 이어지고, 작은 삶의 조각들이 모여 오늘의 대한민국이라는 큰 역사를 만들어 왔는지를 생생히 보여 주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 우원식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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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우리 반만년 역사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백성에서 시민으로의 탄생을 알리면서 공화국 깃발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 위대한 정신을 새겨넣은 제헌국회의원들. 그들은 다시 지금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출발이 됩니다. 이 위대한 공화국 역사의 여정을 제헌국회의원들과 함께합니다. - 최태성 (제헌국회의원유족회 홍보대사 역사 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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