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가을, 주저홍옥 | 팬심 | 순정 | 관람 | 필사 | 몰입 | 머뭇2부 겨울, 이유아파트 | 연탄 | 꿈 | 배웅 | 동백 | 라르고 | 진입로 3부 봄, 계속고사리 | 연못 | 수선화 | 수국 | 식탐 | 도둑 | 격려 4부 여름, 의미혀끝 | 수다 | 갈망 | 모래 | 냉면 | 재배치 | 썸머작가의 말
|
|
사소한 순간을 붙드는 마음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자리‘홍옥’, ‘요가 매트’, ‘필사’, ‘연탄’, ‘연못’ 같은 단어들은 단순히 소재가 아니라 시간의 한 조각이자 감정의 표면에 남은 자국처럼 등장한다. 저자는 잊힌 기억을 어느 사물들로 불러내며 한 인간의 생애가 지닌 리듬과 무게를 들여다본다. 이 책의 중심에는 감정의 겹을 무심히 들추어내는 작가의 세심한 관찰이 있다. 첫 글 「홍옥」에서 저자는 가을이 시작될 때마다 사과와 관련해서 기억이 되살아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단 한 입의 새콤함에 어린 시절의 두려움, 설렘, 시험을 앞둔 불안이 녹아 있다. 그 시절의 사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제철의 위안이었다. 이어지는 「팬심」에서는 1980년대 사춘기 아이의 무모하고도 순수한 열정이 펼쳐진다. 신해철과 무한궤도 공연을 보기 위해 광주로 향하던 모험은 열정이 어떻게 청춘의 불안을 잠재우는지를 보여준다. 「순정」에서는 요가 매트 ‘만두카’를 매개로, 사소한 물건에 깃든 기억과 자기 확신을 그린다. 땀으로 얼룩진 매트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위에서 한때 “스스로가 낯설 정도로 몰두했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필사」 편에서는 손으로 문장을 옮기는 남편의 모습에서 느리게 읽고 새기며 살아가는 행위의 본질을 보여준다. 저자는 활자를 베껴 쓰며 비로소 “한 문장 한 문장을 몸에 새겨 넣는 것 같”다고 말한다.이 책에서 개인적 기억은 사회적 풍경과 정서의 층위로 확장된다. 「아파트」와 「연탄」 같은 글에서는 1980년대 중산층 형성과 가족의 생존기가 함께 엮인다. 무궁화아파트의 낡은 벽지, 연탄가스 냄새, 곰국의 뽀얀 국물 냄새는 단지 한 가족의 생활상을 넘어 한국 근대 주거문화의 역사와 세대적 체험으로 번져나간다. 또한 「몰입」에서는 스마트폰 시대의 주의력 결핍 속에서도 여전히 책을 읽는 사람과 뜨개질을 하는 사람들을 포착하며 집중의 윤리와 느림의 미학을 다시 묻는다. 이 모든 장면은 몰입과 집중이라는 잃어버린 감각을 상기시킨다.시간의 퇴적층에서 나를 재발견하다이 책은 일상의 잔여를 응시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흘러간다고 여겨온 순간들은 사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층위로 조금씩 삶에 퇴적된다. 이 책은 그 층위를 하나씩 더듬어가며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결이 어떻게 현재의 감정과 사고를 형성하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를 뒤돌아보는 방식이다. 저자의 글쓰기에서는 특정 사건이나 인물의 서사보다는 아주 사소한 기색, 뉘앙스, 감정의 흔들림 같은 것들이 문장에서 찬찬히 떠오른다. 회고의 목적은 추억을 아름답게 덧칠하거나 한 시기를 깔끔히 정리하는 데 있지 않다. 시간이 흐르며 삶이 어떤 결을 갖추어왔는지 조용히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이러한 서술은 삶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려는 태도와는 거리를 둔다. 대신 기억이 스스로 떠오르는 속도를 존중하며 그때의 마음이 남긴 미세한 흔적들을 가능한 한 훼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에서 과거는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와 느슨하게 연결된 어떤 감각으로 존재한다. ‘모래알을 수집한다’는 말은 곧 사라질 것 같은 순간들에 잠시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이며, 그 시간들이 다시 삶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기다리는 일이다. 『모래알을 수집하는 시간』은 이미 흘러간 시간을 다시 품어보려는 조용한 마음을 담으며 삶은 큰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순간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