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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_화음과 지음 006
조율 015 떨림처럼 빨리 지나가는 것들 017 춤을 추듯이 022 단순하고 아름다운 025 아침에 너는 029 무거운 혀 032 박제로 남은 신호들 037 뒷모습을 응시한다는 것 039 그의 마지막 문장 043 외투 045 덧 049 문신 051 소리를 알아주는 것 056 문은 그저 문으로 060 진눈깨비 063 가령 071 간섭 074 운명 079 기억 081 시간 086 소풍 090 연습 092 안부 096 연인 098 이해 102 인연 106 중력 110 질문 113 체감 117 총명 120 환송 125 한가 130 현재 132 희망 136 봄의 밤에 145 부르다 만 노래처럼 147 사소하게 151 낯설게 또는 서투르게 154 희미하게 159 그래서 지금은 검은 구멍들 160 마음이 기울어지니 164 이상하리만치 167 저마다의 이유로 169 그래도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172 그냥 여기까지였다고 176 마땅히 그러하여 178 깊은 밤 서쪽 180 하늘색 부리로 184 그런 것들이 쌓여 187 화가 날 정도로 깊은 190 이어지다 199 벌리다 201 지키다 205 묻다 209 기대다 212 멎다 216 감추다 219 붙잡다 224 매달다 228 날다 231 닦다 236 더듬다 239 견디다 243 놓다 245 숨다 248 기울다 251 내리다 255 이르다 259 흐르다 262 흐리다 266 짓다 270 우리는 기다림 속에 있다_정홍수(문학평론가) 274 |
황경신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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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바보 같은, 심지어 사랑이 아닌 짓들까지도 용서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그러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게 되면 뭔가가 과해지고 뭔가가 모자란다. 말을 아껴야 할 때 너무 많은 말들을 해버린다거나, 손을 거두어야 할 때 옷깃을 붙잡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한 번 템포가 뒤틀리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저항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결국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p.43-44 * 당신을 만나려고 작정했던 날, 길이 어긋나고 마음이 어긋나서 눈시울이 슬쩍 붉어졌어도, 기억나는 노래가 있다면 소풍이야. 모든 것이 조금씩 헝클어지고 기울어져서, 비틀거리고 넘어지면 소풍이야. 너무 멀리까지 와버린 건 아닐까 걱정이 들어도, 고요한 한숨에 바람이 어른거리면 소풍이야.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면 소풍이야. --- p.90 * 어쩌고 있나요. 어쩌지도 못하고 있나요. 여름은 다 갔나요. 가을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옷깃을 파고드나요. 소식은 가끔 듣나요. 듣고도 모른 척하나요. 좋은 사람을 만났나요. 누군가와 헤어졌나요. 미소를 지으며 자학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자만하는 습관은 여전한가요. 매일 아침 오만한 절망을 거울 앞에서 확인하나요. 숨기고 감추고 혼자 견디는 날들을 아직도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나요. 지우고 기록하고 또 지우는 일들을 지금도 반복하나요. 어떤 빛깔로 평안한가요. 어떤 리듬으로 비루한가요. --- p.96 * 사랑이 날아오는 슬픔이 여태 황홀하니 안식을 구하기는 글렀다. 무채색의 상념에 마음이 기울어지니 찬란한 일상이 버겁다. 진즉에 꽃은 떨어지고 잔가지들도 부러졌는데 단단하게 맺힌 멍 하나 푸르고 붉다. 사람의 흔적이 남은 시간의 씨줄과 텅 빈 공간의 날줄을 엮는다. 한 사람이 공기를 채운다. --- p.164 * 인연인 줄 알고 묶어둔 매듭이 더듬더듬 풀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이 자리에 이대로 가라앉아 있다. 그냥 여기까지였다고 그냥 말을 하면 그냥 여기까지일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먼 곳을 바라본다. 처음엔 달랐으나 도중에 같아졌으므로 앞으로도 여전하리라던 부질없는 믿음이 보풀로 흩어진다. 튼실했던 기억들은 어찌도 이리 연약한 시간 안에 담겨 있었을까. 함께 이정표를 세우며 걸어왔던 길은 어찌 이리 여러 갈래로 갈라졌나. 운명이라 알고 묶어둔 삶이 너덜너덜 해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이 자리에 이대로 못 박혀 있다. 돌이킬 수 있을지도 몰라서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우리는 그냥 여기까지이지만 차마 여기까지일 수는 없어서. --- p.176 * 모든 이야기는 하다 말고 모든 생각은 하다 말고 모든 삶은 살다 마는 것이므로, 그것 또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이므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 자체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이므로, 너무 많은 생각에 마음을 묶어두지 않으려 한다. 풀지 못한 오해와 사과하지 못한 잘못과 좀 더 용감하게 굴지 못해 잃어버린 것들이 있으나 대체로 괜찮은 삶이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요, 하고 나는 묻지 않는다. 조금만 더 여기 매달려 있게 해달라는 기도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 사랑하고 소유한다. --- p.230, * 세계는 끝없이 몸을 비틀어, 형태와 색채를 바꾼다. 변화를 감지한 존재들의 웅성거리는 침묵이 켜켜이 쌓인 빈자리마다 들어선다. 어제까지 존재했던 생명이 오늘 사라졌으므로, 세계가 어제와 같을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세계는 비어야 하고, 화내야 하고, 애도 속에 흔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부재의 자리가 감춰지고 사라진다면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삶과 죽음은 낡아지고 부서지고 버려질 거라고, 우리의 영혼은 텅 비어버릴 것이 라고 생각한다. --- p.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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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하지만 익숙하지 않고, 낯설지만 불편하지 않은 삶의 멜로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슬픔과 함께 온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변한다, 의미와 무의미가 공존한다, 친밀하면서도 낯선 관계, 이상하리만치 가깝고 동시에 먼 거리… 황경신 작가의 이런 문장들은 따로 툭 떼어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를 던진다. 글 속에 던져진 이러한 문장들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게 하고, 선명한 듯하면서도 어떠한 해답도 내릴 수 없는 길 위에 독자들을 세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이 짧은 글은, 말과 문장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사유의 힘으로 아름답다. 또 얼마간 슬프다”라고 평하면서 “그저 홀로 나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나아가되, 세계와 인간, 사물의 질서를 응시하고 숙고하는 간절함은 멈추지 않는다”라는 말로 이 책에서 느껴지는 사유의 힘을 강조했다. 게다가 그 깊은 사유는 작가가 매만져서 이리저리 엮어내는 말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정제되어 표현된다. 사유의 힘이 열어주는 새로운 세상은 “말들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난다. “무심코 지나친 말들이 열어줄 낯설고 새로운 세상은 또 어떤가. 번지고 스미는 말의 흐름과 연상을 통해 황경신은 그 말들을 닦고, 만지고, 연다.” _정홍수(문학평론가) 특히 ‘가령(假令), 운명(運命), 기억(記憶), 시간(時間), 연인(戀人), 이해(理解), 인연(因緣), 중력(重力), 질문(質問)’ 등 뜻으로 묶인 한자를 풀어 새롭게 해석해낸 글들은 정홍수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면 “뜻과 뜻이 모여 이루는 말들을 이리저리 나누고 묶어보면서 말의 속살을 새롭게 발견하고 발명하는 순간에 도달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황경신 작가는 이번 책에서 친밀하지만 익숙하지 않고, 낯설지만 불편하지 않은 삶의 멜로디를 들려준다. 떨림으로 그려낸 화가의 그림과 그 여운으로 써 내려간 작가의 글을 따로 혹은 함께 들여다보며 이 책을 읽어보자.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삶이라는 이미지 전체를 마주 세우고, 때로는 살아가는 일의 사소함과 동행하는 짧은 단상들. 어리둥절함이나 당혹감은 특별한 매혹의 대상이 되고, 뒤늦게 오는 것, 천천히 더디게 다가오는 것들을 껴안는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슬픔과 함께 온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너머로 ‘생’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 혹은 ‘운명’을 향한 막막한 갈증이 일렁인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과 동행하는 외로운 글쓰기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_정홍수(문학평론가) 여는 글 화음과 지음_황경신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엇이 발현하는 순간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감정, 불현듯 불길로 솟아오르는 마음이나 물길을 만들며 흘러가는 느낌이 심장에 새겨질 때, 또는 시간의 무수한 겹이 쌓여 층을 이루고 그것이 어떤 아름다운 무늬로 완결될 때, 그리고 사람의 생에 촘촘하게 박힌 슬픔이나 결핍 같은 것이 노래나 춤, 그림이나 글로 모습을 드러낼 때. 존재한 적 없으나 이제 존재하게 된 무엇은 타인의 감각, 그러니까 시각과 촉각과 후각과 청각과 미각을 자극하고 그의 세계를 간여한다. 심장을 말랑하게 만들기도 하고, 손바닥을 간질이기도 하고, 귓불을 단단하게 조이기도 한다. 무슨 마음을 먹게 하거나 어떤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인 화백의 그림은 그런 방식으로 나의 세계 안에 낯선 길들을 만들었다. 벅찬 그림들을 마음에 품으니 밤마다 꿈들이 찬란했다. 그 사이에 계절이 아홉 번쯤 바뀌었다. 그의 그림들은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었고, 그 간극을 재어보느라 나는 미몽을 헤맸다. 어떻게 하면 어지럽지 않은 화음이 될지를 고심했고, 어떻게 하면 그의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고 그대로 껴안을 수 있나 한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한 번도 이르지 못한 곳에 당도해 있었다. 이 길은 이렇게 끝났지만 막다른 골목은 아니다. 이제 내 눈앞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백, 수천 개의 문들이 있다. 만져보고 두드려보고 열어보는 일에는 언제나 망설임과 두려움이 있지만, 그 문 뒤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무엇이 발현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계절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나는 걸음을 옮겨야겠다.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짓기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