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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진 섬에서
2. 임진년, 그 여름의 광해군 3. 파천, 비는 내리는데 4. 전쟁터의 희망 5.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좋으리 6. 백성들이 가르쳐 준 대동법 7. 원군 아닌 원군 8. 그대만 있으면 9. 잘못 만나다 10. 광풍, 광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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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거절은 칡넝쿨보다 질겼고, 녹슨 칼보다 거칠었으며, 지아비를 죽이는 심성보다 잔인했다. "광해군은 장자가 아니다!" 13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들은 오직 이 하나의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벌써 끝냈어야 할 전쟁을 지리한 강화 협상만으로 6년을 끌더니 정유년에 끝내는 재전쟁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때도 명군은 마찬가지였다. 이길 수 있는 싸움조차 그들은 피했다. 명군의 장수 유정은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명군을 철수시킴으로써 왜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모두가 이런 식이었다. 명군은 조선 백성들을 강간하고 죽이고 약탈하고 수만 석의 군량미만 축냈을 뿐, 도요토미가 죽고 더는 싸울 의지마저 잃어버린 왜적과의 마지막 싸움에서까지 조선을 도우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임진년에 시작된 7년 전쟁은 냉정하게 보면 조선의 승리였다. 이순신과 권율 같은 수많은 장수들과 의병들과 백성들이 목숨을 바쳐 만들어낸 승리. 그런데, 그런 그들이 이제 와서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로 그들의 존재를 과시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 광해군에 대한 세자 책봉을 거부하는 그들의 태도는 더욱더 강경해졌다. 1604년 다시 보낸 주청사에게 명의 관료 섭운한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난신적자로다! 이 어찌 개나 소 같은 짐승들이나 할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뿐만이 아니었다. "가서 광해군에게 전하라. 광해군은 분수를 지키라 하라!" 아아, 이 어찌 살아서 들을 수 있는 말이던가. 그들은 광해군에게 왕세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라는 말까지 입에 담은 것이다. 광해군은 이제 저들이 어찌하여 이토록 질기고 강경하게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명나라 신종이 아직 황태자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신하의 나라인 조선의 왕세자 책봉을 먼저 승인할 수 없다는 것, 더욱이 섣불리 둘째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준다면 자신들의 황태자를 결정할 때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이유라는 것을. 이 얼마나 가당찮은 이유인가. 저들의 기우를 위해 조선의 중대사가, 조선의 왕권이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조선은 이런 모습이 아니다. 그가 꿈꿔온 나라는 자주적인 나라, 독립적인 나라, 3천년 전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단군의 나라, 북경까지 넘보았던 고구려처럼 힘있고 웅장한 나라였다. 광해군은 환인의 통곡소리를 듣는 것만 같았다. 단군의 울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질책하는 광개토대왕의 그렁그렁한 목소리 또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광해군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신하의 나라인 조선은 이제까지 명나라의 고명을 받아왔다. 만에 하나 명나라의 책봉 고명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두고두고 광해군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이 우려는 하나둘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 pp.22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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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이제 폐주가 된 광해군의 참모습을 복원한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기록이다. 패배한 이들을 상찬하고 기념하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광해군을 우리 역사는 폐주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기록을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라 부른다. 그를 가리켜 역사는 패륜적인 혼군이며 무능하고 부덕한 폐주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본질적으로 반정세력이 자신들의 명분을 구하기 위해 왜곡하고 폄하한 부분도 많았음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광해군의 폐위를, 인격의 패륜이나 부덕의 소치가 아닌 서인과 북인 사이에 확대된 붕당정치의 희생으로 바라보고 있다. 광해군이 과단성 있게 추진했던 개혁적인 정사, 혜안에서 비롯된 후금과의 실리 외교는 필연적으로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사람의 거센 반발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개혁적인 정사로 인해 자신들의 입지와 안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결국, 반정이라는 이름으로, 예지와 기개를 가지고 있던 한 젊은 왕을 옥좌에서 끌어내렸다.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조는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자초하였고 삼전도에서 후금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당해야 했으니, 광해군의 폐위는 두고두고 생각을 요하는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정황으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같은 반정에 의해서 물러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곧바로 사사된 연산군과는 달리 광해군이 15년 간 위리안치의 유배생활을 이어가다가 자연사한 사실은 광해군을 폐위한 반정의 명분이 그만큼 미약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