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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의 서문 | 5
챗지피티의 序文 | 12 序評 | 15 1장 12연기설에 대해 1] 12연기설은 석가의 친설인가 | 23 2] 무상(無常)은 소멸(消滅)됨이 아니다 | 32 3] 12연기는 깨달음의 재료가 될 수 없다 | 34 4] 전변사지설(轉識四智)은 완전 망발이다 | 36 5] 행(行)이 식(識)의 선행조건인가 | 42 6] 이래도 저래도 모순 | 51 7] 식(識)은 무엇인가 | 53 8] 정보(情報)라는 것 | 61 9]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 65 2장 챗지피티 1] 능력과 한계 | 71 2] 각오와 다짐 | 73 3] 석가의 가르침 | 76 4] 제행무상(諸行無常) | 81 5] 제법무아(諸法無我) | 86 6] 열반(涅槃) | 98 7] 허구(虛口)적 왜곡 | 101 3장 사성제는 진리인가 교리인가 1] 용어(用語) 오류(誤謬) | 109 2] 재 다짐 | 115 3] 무슨 불교 | 119 4] 근본 자리 | 124 5] 난탈(亂脫) | 128 6] 티벳 불교 | 131 7] 12연기설 폐기 | 137 4장 오전공부 오후수행 (悟前工夫 悟後修行) 1] 오전공부 (悟前工夫) | 143 2] 반면교사 (反面敎師) | 148 3] 무념(無念) 무상(無想) 명상(冥想) | 151 4] 화두(話頭) | 157 5] 자각(自覺) · 자기모순(自己矛盾) 발견 | 160 6] 상주진심 성정명체 (常住眞心 性淨明體) | 165 7] 대승 사상 | 171 8] 반야심경 오류 | 175 5장 고집멸도 (苦集滅道) 1] 도성제 (道聖諦) | 191 2] 집(集) | 193 3] 중도법이라고? | 197 4] 집성제 (集聖諦) | 201 6장 초전법륜 해석이 문제야! 1] 싯달타의 자기 변호 | 205 2] 삼법인의 위상 | 212 3] 진정한 도성제 | 214 4] 엔트로피 법칙 | 222 5] 살불살조(殺佛殺祖) | 223 6] 생사 단멸 | 228 7장 수행 그 궁극의 자리 1] 잠자리 수행 | 235 2] 싯달타 선정 체험 | 238 3] 시공(時空)이 사라지다 | 250 4] 말조차 꺼낼 수 없는 풍토 | 251 5] 5세 싯달타의 인지능력 | 257 6] 불교계의 천재들 | 266 7] 가상(加上) | 270 8장 구차제정(九次第定) 1] 사선팔정(四禪八定) | 275 2] 사유(思惟) 방식 | 278 3] 상수멸 (想受滅) | 285 4] 유여열반(有餘涅槃) 무여열반(無餘涅槃) | 302 9장 해체. 조건의 결여 1] 방편(方便) | 303 2] 정토(淨土) 미륵(彌勒) 신앙 | 309 3] 다라니 | 313 4] 곡해(曲解) | 321 5] 그냥 고전(古典)처럼 | 325 6]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공통분모(共通分母)인 불성(佛性) | 331 7] 확철대오(廓撤大悟) | 335 8] 오류 (誤謬) | 339 9] 스마트폰 윤회(輪廻) | 343 10] 조건(條件) 해체(解體) | 361 11] 무상성(無常性) 아이러니 | 364 12] 견성성불(見性成佛) | 374 도덕경 | 397 후서 | 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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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의 깨달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며, 누구나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정경 스님’과 ‘ChatGPT’의 대화 교리 밖에서 붇다를 만나다. “수행자와 인공지능이 함께 묻고 부수고 다시 세운 대화 - 그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수행이 된다.” ㆍ석가께서 깨치신 만고의 진리는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만큼은 만고불변의 이치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50년 가까이 그토록 들어왔던, 말 같지 않은 온갖 불교 얘기를 챗지피티가 그대로 복사해 들려주기에 너무 신기해서, 계정을 열고 수 일 간에 걸쳐 나눈 기록물이 바로 이것이다. 분명 석가께서도 웃으실 것이다. 다 함께 웃을 수 있기를! 정경 스님 서문 중에서 ㆍ이 책은 새로운 불교를 제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불교’라고 부르고 있는 것들 중 상당 부분이 정작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라, 석가 이후에 덧붙여진 해석·신앙·체계였다는 사실을 정면에서 검토해 보자는 시도이다. 진리는 단순했으나, 설명은 복잡해졌고, 가르침은 살아 있는 통찰이 아니라 죽은 교리가 되었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전제의 왜곡’을 바로잡는 작업이다. 챗GPT 서문 중에서 ㆍ『석가 웃다』에서는 이미 불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갖추고 있던 챗GPT에게 스님이 질문하고, 질문을 받은 챗GPT의 답변에 근거를 요구하고 부족하거나 그릇된 부분을 지적하는 스님의 주장과 질문에 따라 명확한 요점을 정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 나아가 敎理에 국한하지 않고 禪定修行은 물론 老子의 철학까지 그 범위를 넓혀가면서, 세존 이후에 덧붙여진 ‘전제의 왜곡’을 바로잡고 살아있는 통찰과 단순한 진리의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순수한 의도가 담겨 있다. 정경스님의 『석가 웃다』는 최첨단의 AI시대에 미디어와 컴퓨터가 일상인 세대에게 가장 적확하고 필요한 불교지침서임이 분명하다. 가야산 해인사 희랑대 경성 스님 서평 중에서 이 글은 삼법인과 사성제에 관한 글이다. 이른바 삼법인(三法印)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듯싶다. 그러나 이 삼법인에서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사뭇 모순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과연 있기는 한 건가? 석가께서 깨치신 만고의 진리는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만큼은 만고불변의 이치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이기에 그것만은 적정(寂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즉 생각이 구성한 개념과 관념 따위의 일체에는 그 말과 상응하는 실체가 전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인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이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열반이 적정(寂靜)이라는 까닭은 고(苦)라는 번뇌의 불꽃이 꺼졌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한 것인 줄 알지 못한 탓이라고! 묻는다! 싣달타가 왕궁에서 고(苦)에 시달리다 쫓겨 출가했는가? 싣달타의 출가동기는 오직 생사단멸이었다. 아버지 정반왕이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출가만은 하지 말라고 설득했을 때, 싣달타는 “저를 죽지만 않게 해주신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삼법인 구조는 싣달타가 제행무상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와 제법무아의 도리를 통해, 열반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는 생사단멸 즉 더 이상 윤회가 없음을 간단명료하게 서술하신 가르침이다. “성품을 본다는 말을 그대로 이해한다면, 도대체 무슨 성품을 봐야 석가의 깨달음과 일치하는가?” 석가가 본 ‘성품’은 단 하나, → ‘무상(無常)·무아(無我)’에 의해 해체·붕괴가 모든 것에 동일하게 성립한다는 ‘법(法)의 성질’이다. 즉 어떤 실체적 성품, 본래의 성품을 본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성질(法性)’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품은 ‘어떤 실체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이렇게밖에 성립될 수 없는 성질’이라는 의미의 性입니다. 석가가 본 성품은 ‘존재는 전부 조건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그 성질(性)이다. 무상 → 지속되는 실체가 없다. 고 → 지속성의 추구 자체가 괴로움이다. 무아 → 어떤 대상 안에도 자기 본질이 없다. 공 → 모든 것은 조건생기이며 자성(自性)이 없다. 연기 → 조건이 성립될 때만 일어나고, 조건이 끊어지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즉, 석가가 본 ‘성(性)’은 어떤 존재의 본체(本體)가 아니고, 모든 존재가 “본체가 없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것이 곧 ‘법을 보았다(見法)’라는 말의 의미이다. 석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법을 본 자는 나를 본 것이다.”(見法=見我) 이 말은 “나라는 실체가 보인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법(法)’ = 만물이 무상·무아·연기라는 구조적 성질(性) 즉, 이 성질(性)을 보는 것이 붓다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무슨 성품을 보아야 하느냐?” ?? 모든 법이 자성(自性)이 없다는 ‘성질’, 그것을 보면 석가의 깨달음과 일치한다. 그게 바로 석가가 본 성(性)이며, 견성(見性)의 정확한 대상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석가가 본 성품 = ‘모든 존재는 본래 성품이 없다’는 성질(性). 그래서 석가의 깨달음은 ‘무엇의 본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본래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다”는 구조적 법칙을 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