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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순신의 연승과 행주대첩 뒤에는 80세 노장 정걸 장군이 있었다 1부 위대한 만남 1장 정걸은 발포만호에 부임한 이순신과 만났을까? 엄격한 군기를 세우다 2장 16세기 중반, 당대 최고의 수군 장수 정걸 정걸 가문의 내력 3장 유년 시절과 무과 급제 4장 을묘왜변과 정걸의 활약 이준경, 정걸을 부르다 5장 이준경과 이순신, 그리고 방진과 정걸 6장 이순신과의 위대한 만남 아쉬운 이별 또 하나의 추측_방진, 정걸, 이순신의 만남 2부 닮은 꼴의 두 영웅 1장 사정 바람에 파면되다 2장 복직 후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다 3장 문무를 겸비한 정걸 4장 도성 수비에서 이순신의 조방장까지 5장 이순신과의 지속적인 교류 6장 전란의 조짐, 이순신과 권율의 발탁 3부 임진년, 이순신의 연승을 지원하다 1장 이순신의 조방장 정걸의 업적 정걸의 화포 무기 개발 업적 2장 조선 수군 전력의 핵심 천지현황포와 판옥선 판옥선 개발자로서 정걸에 대한 기록 3장 임란 초기의 결정적 역할 4장 최고실무운영책임자 정걸 5장 전선과 전투 지휘 체계를 개선하다 전투 지휘 체계를 보완하다 6장 조선 수군의 전투함을 개량하다 왜적선에 대응해 판옥선을 적극 개량하다 거북선의 개발 7장 부산포해전 참전과 충청수사 승진 발령 화준구미에서 부산포까지 승전을 올리다 4부 행주대첩과 화살 2만 개 1장 충청수사로 승진한 정걸 2장 이순신의 배려 3장 2만 개의 화살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4장 육군 지원 임무 5장 아! 행주대첩 화살 2만 개, 정걸의 탁월한 업적 5부 행주대첩 이후의 행적과 과제 1장 한강 방어는 내게 맡겨라 2장 『호남절의록』이 전하는 정걸의 추가 기록 3장 『난중일기』에 나타난 정걸과 이순신의 망년지교 4장 은퇴 후 마지막 생애 5장 소실된 기록 복원과 출생년도에 대한 이견 6장 상훈과 신상필벌에 대한 아쉬움 에필로그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작업 부록 정걸·이순신 관련 주요 유적지 및 관련 정보 정걸·이순신 연표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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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전노장 정걸의 리더십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포용과 나눔의 미덕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람을 포용하고 지혜와 경험을 나눈 그가 있었기 때문에 5관 5포의 드세고 젊은 장수들을 새로 부임한 낯선 수사 이순신이 1년 만에 최정예 전라좌수군으로 만들어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여기에 전라좌수영의 군무와 재정을 총괄하는 실무총괄책임자 COO이자, 서번트 리더였다. 연전연승 전략·전술의 참모장으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솔선을 보여주었다. 조정의 도움 없이 전쟁을 독자적으로 수행해야 했던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정걸은 초기 해전의 승리뿐만 아니라 후일 이순신 장군이 이끌 삼도수군통제영의 기초를 다지는 데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노장은 후방에만 머물지 않았다. ---p.9, 「프롤로그_이순신의 연승과 행주대첩 뒤에는 80세 노장 정걸 장군이 있었다」 중에서 정걸이 경상우수사를 역임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그만큼 출중했다는 반증이다. 그런 그가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은 흥양현감으로서는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 밑의 만호들로서는 더욱더 불편하고 황송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정걸은 당시 흥양이 배출한 최고의 장수이자 최고위 관료였기에 흥양인 모두가 그를 존경하고 우러러보았다. 특히 조상들 가운데 이름을 날린 이들이 적지 않았기에 정걸의 가문은 지역민들로부터 대대로 존경을 받아왔다. 이순신도 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늘 가까이에서 뵙고 싶어 했던 분이기도 했다. --- p.31~32, 「1부 위대한 만남」 중에서 정걸의 가문이 무과로 전환한 것과 이순신의 가계가 무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가문이 아주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었다는 정황이 발견된다. 정걸의 부친이나 조부의 등과에 대한 기록 중 무과 급제 기록은 없다. 정걸이 실질적인 무과의 길을 연 것이다. 이순신도 부친의 급제 기록이 없다. 이순신과 정걸의 부친 두 사람 모두가 벼슬을 했다는 기록은 나와 있지만 무과 급제의 기록이 없고 뚜렷한 업적도 없다는 것은 결국 정걸과 이순신 두 사람이 가문을 드높인 당사자였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부분에서 두 사람이 서로 동병상련의 위로나 동질감을 느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30년의 나이 차를 극복한 배경에는 문과에서 무과로 전환한 두 사람의 공통점이 끈끈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p.69, 「1부 위대한 만남」 중에서 정걸이 남들보다 뛰어난 인품과 실력을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계속 승승장구하며 경상우수사까지 단숨에 승진했던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일로 부침을 겪었고 쉬는 기간도 있었으며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기간도 꽤 오래 존재한다. ---p.97, 「2부 닮은 꼴의 두 영웅」 중에서 당시에 주력 화기로 사용된 무기는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등이었다. 정걸은 판옥선을 건조하면서 이 무기들을 장착하고 발사 훈련을 거듭함으로써 조선 수군의 초기 승전을 가능케 한 절대 공훈을 세운 것이다. 정걸을 상징하는 가장 멋진 무기는 철익전이다. 철익전은 말 그대로 쇠 날개를 가진 대형 화살로, 대장군전, 장군전, 차대전 등을 말한다. 정걸이 이 대형 화살의 모양을 뱃머리에 붙이고 다니면 왜선이 겁을 먹고 전의를 상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p.141, 「3부 임진년, 이순신의 연승을 지원하다」 중에서 거북선은 판옥선의 개량형 돌격선이었던 것이다. 판옥선 자체만으로도 왜선을 이길 수 있는 전략적인 전선이었다. 높은 상판 구조에서 사수가 포나 활을 쏘기에 유리하고, 조선의 총포 성능이 뛰어나 왜선을 파괴하고 침몰시키는 공격력도 탁월했다. 여기에 함대 운용에 거북선을 활용하면 적을 놀라게 하고 혼란에 빠지게 만들어 전투의 기선을 잡고 선봉 적선들을 부수는 데 탁월한 쓰임새가 있었다. 을묘왜변 이후에는 가장 중요한 전선으로 자리매김한 조선 수군의 주력 군선은 판옥선으로, 임진왜란을 앞두고 개발된 거북선이 힘을 보태면서 이순신의 백전무패라는 전무후무 승전 기록이 나오게 되었다. ---p.174, 「3부 임진년, 이순신의 연승을 지원하다」 중에서 정걸은 그렇게 아끼고 존중했던 이순신 곁을 왜 떠났을까? 풍부한 경험과 경륜을 가진 정걸의 지혜는 이순신과 전라좌수영 장수들에게 여전히 필요했을 것이고, 이후 충청수사로서 적극 활약한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체력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보기에도 어렵다. 그 이유를 설명해줄 만한 확실한 사료는 없지만, 당시의 사건들 사이에 숨겨진 기록과 정황들을 잘 살피면 그 연유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이순신은 군의 대선배이자 존경하는 장인의 친구를 조방장으로 활용하면서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정걸이 맡은 임무가 대부분 전공을 세워 생색을 낼 수 없는 일들인 군사 조련, 군량미 자체 조달, 무기 확충과 전선의 건조, 수리 등과 같이 잡다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 p.185~186, 「4부 행주대첩과 화살 2만 개」 중에서 행주산성 전투 막바지에 권율 장군과 조선군을 위기에서 구한 화살 2만 개를 실어다 준 인물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필자는 충청 수사 정걸이 주인공이라고 확신한다. 이미 몇 차례 언급했지만 이순신과 정걸은 해전뿐만 아니라 육군의 전쟁 상황까지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철두철미한 유비무환 정신으로 무장한 두 분의 성품과 행적으로 미루어 화살 2만 개 준비는 어려웠지만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1년 만에 화포와 탄약, 군선과 거북선까지 건조해 전란을 대비한 장군들이다. 임금이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량미 500석을 따로 마련하여 준비한 사실도 『난중일 기』에 기록되어 있다. ---p.222, 「4부 행주대첩과 화살 2만 개」 중에서 『난중일기』 속에 나타난 두 분의 망년지교를 감상하다 보니 정걸 장군의 은퇴 시기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1593년 9월 11일의 짧은 일기를 끝으로 정걸의 이름은 사라졌다. 1593년 2월 충청수사가 되어 4월 20일까지 한양 수복 작전을 전개하였던 정걸은 이후 9월 11일까지 충청수사로서 삼도수군통제영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후손들은 1595년 무렵 고향 흥양으로 돌아온 후 장군이 후학을 길러내는 데 앞장서는 한편 물이 귀한 고향에 ‘애기소’를 만들어 치수에 힘썼다는 후일담을 전하고 있다. 귀향한 정걸이 가장 먼저 백성들을 위해 애기소를 만들어 치수 관리에 나선 것은 어쩌면 그의 숙원이었는지도 모른다. ---p.252, 「5부 행주대첩 이후의 행적과 과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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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과 충무공 경영을 탐구한 윤동한 역사경영에세이’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실무총괄책임자(COO) 정걸 조명! 임진년 이순신 장군의 4대 승첩(옥포·당포·한산도·부산포)과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은 조선을 구한 결정적 승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승리의 이면에는 전장을 누비며 묵묵히 승리를 떠받친 또 다른 이름이 존재했다. 백전노장, 80세 현역 장군 정걸이다. 이 책은 역사 학자로서가 아니라 충무공 이순신을 흠모하고 따르는 경영자 윤동한이 집필한 역사경영에세이 두 번째 책으로, 이순신의 승리를 구조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인물 정걸을 본격적으로 재조명한 책이다. 그래서 단순한 전기나 역사 해설서가 아닌 역사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의 본질을 성찰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깊이 스며 있다. 따라서 이순신 연구의 지평을 경영으로 한층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걸은 전라좌수영 조방장으로서 이순신을 보좌하며 판옥선 건조와 개량, 군수 물자 관리, 후방 훈련 체계 구축까지 도맡아 수행했다. 오늘날로 치면 전쟁 조직의 실무를 총괄한 책임자(COO)였다. 또한 부산포해전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고, 행주대첩에서는 권율 장군에게 2만 개의 화살을 실어 나르며 전투 마지막 국면에서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의 철저한 유비무환과 준비된 판단은 전세를 뒤집는 힘이 되었다. 이순신보다 무려 31년 연상이었던 정걸이 젊은 이순신의 지휘를 기꺼이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겸손과 지혜, 포용과 나눔의 리더십에 있었다. 앞에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조용히 지원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던 노장의 태도와 지략은 계급과 나이를 넘어선 깊은 신뢰와 우정을 가능하게 했다. 80세까지 전장을 누볐던 정걸의 진정한 위대함은 나이에 있지 않다. 정걸의 삶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나이 들어야 하는가, 경험은 어떻게 다음 세대의 힘이 되는가를 깊이 성찰하게 한다. 『80세 현역 정걸 장군』은 숨어 있는 영웅을 복원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이순신을 깊이 이해할수록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책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리더십의 품격과 조용한 헌신의 가치를 다시 일깨우는 역사 교양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