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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프롤로그 너무 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나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기 진실한 애정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자신의 연약함을 양분 삼아 동정은 우리를 마비시킨다 타인의 시선 살아 있다는 즐거움 그들은 분석하고 이론을 늘어놓을 뿐 문화적 충격 행복은 구체적 조건의 문제인가? 성직자 한 분 문화적 갈등 진정한 친구들 주변적(?) |
Alexandre Jollien
알렉상드르 졸리앙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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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 현재 순간에만 신경을 쓰고 거기에 매몰되는 것이 관연 좋은 일일까?
알렉상드르 : 잘 모르겠어요. 상황이 워낙 힘들다 보니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어요. 언제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다 보니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지요. 과거란 말도 실체가 없었죠. 1학년인지 2학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말한 것처럼 그 순간 순간만 생각하고 신경 쓸 수밖에 없다보니 골치 아프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죠. --- p.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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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에게 보내는 박수갈채, 그러나…
수영 선수 김진호, 영화 <말아톤>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마라토너 배형진, ?오체 불만족?의 오토다케 히로타다, 스티븐 호킹……. 누구나 이들의 공통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바로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의 삶 위에 우뚝 선 ‘인간 승리의 주역들’이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그와 그 가족들이 감내해야 했던 온갖 어려움에 가슴 먹먹한 감동을 느낀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의 동네에 장애인을 위한 교육 시설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리면 집값 걱정에 팔을 걷어붙이고 반대 시위에 나서기도 한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스타 장애인’들에게는 환호하면서도 정작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보통 장애인들에게는 냉랭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이러한 이율배반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혹시 ?오체 불만족?의 오토다케 히로타다가 지적하는 대로 ‘성공한’ 장애인을 바라보는 ‘정상인’들의 시선에는 “저런 사람도 어려움을 이겨내는데, 나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수 있어”라는 식의 우월의식과 자기위안적 사고가 은밀히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환호와 냉대는 결국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정상인’들은 장애인과 자신 사이에 그어놓은 엄격한 구분선을 단 한순간도 거두어들이지 않은 것은 아닐까? 장애인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다 알렉상드르 졸리앙은 말하자면 ‘인간 승리를 이루어낸’ 또 한 명의 장애인이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그는 뇌성마비 아동 수용기관인 노트르담 드 루르드 센터 부속 초등학교(책에서는 ‘센터’로 약칭된다)를 다닌 후 스위스의 프리부르 대학교와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철학과 고대 그리스어 등을 공부했고 2004년에 프리부르 대학에서 철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약자의 찬가?로 몽티용 문학 철학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문학 창작 지원 부문의 모따르상을 수상했다. 이쯤 되면 이 책 ?약자의 찬가?에서 장애를 극복한 저자의 감동적인 인생사가 펼쳐지리라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두 발로 걷고 양치질하는 등의 ‘지극히 평범한’ 일들을 수행하기 위한 저자의 고투와 ‘센터’에서 저자가 경험한 친구들과의 가슴 시린 우정 이야기는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이 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알렉상드르 졸리앙은 자신의 장애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철학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자신이 처한 ‘기이한 상황’을, 장애를 지니거나 그렇지 않은 타인들과 맺어가는 인간관계를 그는 철학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곧 용서한다는 것’이라는 말처럼 철학으로 그는 자신의 상황과 타인을 용서(용납)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에게 철학은 앎에 이르는 도구일 뿐 아니라 참된 위안을 주는 구원처이기도 하다. 또한 그를 철학으로 이끈 소크라테스는 그에게는 스승이자 친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졸리앙이 자신의 장애와 인간의 조건에 대해 때로는 허심탄회하게 때로는 치열하게 대화를 나눌 상대로 소크라테스를 초대한 것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졸리앙의 술회를 거들고 가끔씩 대화의 방향을 잡아나가고 졸리앙이 한 말에 의문을 제기하다가 마침내 충격적인 깨달음으로 그를 이끈다. 너의 연약함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너와 같이 약한 이들을 사랑하라.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졸리앙은 말한다. “너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이것이 그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는 출발점이다. 예를 들어 상업고등학교를 다닐 때 엄지손가락에 약간의 장애가 있는 친구가 그 손가락을 자꾸 감추려 하자 졸리앙은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장애를 숨기려 해선 안 돼. 나를 봐. 내 장애를 숨기려면 나는 커다란 쓰레기 비닐을 뒤집어쓰고 다녀야 할 거야.” 장애를 숨기려 하면 할수록 더욱 고립되고 문제점은 더욱 커져만 간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이처럼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그 커다란 긍정의 힘으로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려는 졸리앙에게 타인의 시선은 언제나 무거운 짐이다. 자신의 자질, 장점과 단점, 가능성 등은 전혀 생각지 않고 우선 장애인이라는 틀 속에 넣어버리고 보는 ‘정상인’들의 태도를 그는 사르트르의 ‘사물화’ 개념을 빌려 설명하면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경멸보다 오히려 동정 어린 시선이 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경멸은 차라리 경멸당한 사람을 자극해 분발할 여지를 주지만 ‘동정은 그의 자유를 부정하고 그를 마비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상인’들과의 관계와 대비되는 것이 졸리앙이 ‘센터’에서 친구들과 맺은 우정이다. 그는 그곳에서 서로에게 묻는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타인을 걱정하고 배려해주는 것이었음을, 누구에게 조그만 발전이라도 있으면 모두가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주었음을 감동적으로 술회한다.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이 타인을 필요로 하듯 타인 또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인간의 연약함이 우정을 낳을 수 있고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저자를 이끈다. 당연히 이것은 ‘장애인’들끼리의 우정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약한 부분, 부족한 면이 있게 마련이니까. 따라서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정상인’이 한 말이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제가 완벽히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인간의 위대함을 매일매일 느끼죠. 저는 연약한 존재예요. 따라서 타인의 존재는 저에게 선물이죠.”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넘어서 사람들은 대개 장애인과 자신을 각각 ‘비정상’과 ‘정상’으로 구분하고 그 사이에 높은 벽 혹은 넘을 수 없는 선을 가로놓는다. 그것은 졸리앙조차도 마찬가지여서,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자신과 센터의 친구들을 ‘비정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철학은 다시 한번 자기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즉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근거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고 그 견고한 벽과 선을 전복하고 뛰어 넘어야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2000여 년 전에 그리스인들에게 한 것처럼 졸리앙에게도 그러한 근원적 질문을 던져 그를 당황시키고 다시 깨어나게 만든다. 물론 그것은 졸리앙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졸리앙과 함께 삶과 세계가 정상과 비정상으로 단순히 나누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또한 삶이란 일직선으로 뻗어 있어 눈금으로 기준 미달, 초과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기에 하나의 잣대로는 도무지 잴 수 없는 신비로운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인식에 다다르면 장애인(그 밖의 다른 소수자들도 포함하여)에 대해 냉대와 동정 두 시선 모두를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을 뗀 셈이 된다. 연약함이라는 인간의 근본 조건을 우리 모두가 나누어 갖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함을 뼛속 깊이 인식한다면 세상은 좀더 살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프랑스판 서문의 저자가 말하듯 ‘인간이 인간의 친구라는 오래된 믿음을 진실하고 거짓 없이 증언하고’ 있는 이 책은 그런 세상으로 통하는 여러 문 중 하나를 열어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