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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추천의 글 감사의 글 서론 제1부 혁명으로 가는 길 1. 박정희_식민화된 군인 2. 군사혁명 전야_국가 재건에 대한 지식인 논쟁 제2부 군사정권과 국가 재건 3. 군사혁명_정당성과 지배력의 추구 4. 도약_미국과의 동맹 5. 세계적 변화_전환기의 한국 1968~1972 제3부 총체적 개혁 6. 새마을 운동_위로부터의 농촌 개발에서 유신까지 7. 유신 국가 8. 대통령 지시와 중화학공업화 9. 국군 현대화 1974~1979 제4부 결론_박정희 시대의 유산 10. 박정희 시대의 유산 부록 1. 장기공업개발 정책 2. 한국의 3단계 공업개발 : 중점 산업 3. 공업입국 장기계획 중화학공업화 3두정치 연표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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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엄연히 미국에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식의 급속한 산업화가 가능했던 것은, 박정희와 그의 국가주도 엘리트들, 특히 상공부 테크노크라트들이 미국의 충고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한미간의 충돌을 야기할 만큼 독립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은 냉전에 따른 미국의 안보 정책 및 동북아시아와의 재정적 연계와 관련된 유리한 국제 경제 상황 속에서 상당한 이득을 거두었다. 한국 수출품에 대한 미국 시장의 지속적인 개방과 박정희의 경제적 보호주의에 대해 미국이 보여준 관용은 박정희가 이용한 많은 이점 중의 하나였다(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980년대에 종결되었으며, 1997년의 경제 위기는 이러한 상황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실례이다). 한국을 경제적 독립과 정치적 자립의 길로 이끈 것은 박정희와 개발주의적 엘리트들이었다. 물론 박정희나 그 후의 어느 대통령도 이 두 가지 작업을 완벽하게 이루지는 못했다.
(pp.29~30) 박정희의 경우를 보면, 개발 목표와 박정희 자신이 스스로의 정치적 지도력과 행정 전략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박정희는 관료적 자율성이 국가 재건을 달성하고 자신의 정치 지도력을 강화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관료적 자율성이 상호적 의무라는 틀 위에서 훈련된 관료제를 확립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국가 수반이자 국가 상징으로서의 박정희는 관료들의 절대적 충성과 생산성에 대한 대가로 관료적 자율성을 허락하고 보장했던 것이다. (p.132) 유신 체제는 본질적으로 정부 기구를 전시와 유사한 상태로 바꾸고자 하는 박정희의 메커니즘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대미 의존도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최대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의심할 여지 없이 담대한 목적 뒤에는 박정희와 그의 고문들의 방위산업과 관련된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야심찬 계획이 숨어 있었다. (p.239) 중화학공업화 3두정치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를 해도 모자랄 만큼 중요한데, 이 3두정치가 ‘대통령 지시’를 중화학공업 정책을 시행하는 주요 방식으로 제도화시켰고, 또 이것이 재벌을 한국 산업의 기둥으로 동원해 사실상 대한민국주식회사를 창설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화학공업 3두정치는 사하시 시게루(佐橋滋)와 그의 팀이 ‘행정 지도’의 제도화를 통해 일본의 테크노크라시 선두에 섰던 것처럼(Johnson 1982 : 242~274) 열렬하게 민족주의적인 ‘한국식’ 테크노크라시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한국의 ‘대통령 지시’가 독특한 것은, 이 대통령 지시에 의해서 중화학공업 3두정치는 유신헌법이 박정희에게 부여한 것만큼이나 독재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오원철에 의하면 이러한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은 그가 박정희에게 중화학공업 정책을 유신 개혁하에서 최우선 정책으로 선언하라고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중화학공업화 3두정치의 권한은 유신 체제의 흥망과 그 궤를 같이했다. 즉 한편으로는 보기 드문 고도의 경제 성장을 기록한 ‘한국형 모델’의 공업화를 설계해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엄격한 방식 때문에 지지를 잃었다. (p.284) 왜 박정희는 자신의 극비 핵무기 전략을 시행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했을까? 부분적으로 박정희가 대미관계에서의 오랜 경험을 통해 한국이 미국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때 미국은 한국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가지 고려할 것은 박정희는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으로 동시에 예리하고 고도로 계산적인 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경지까지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pp.339~340) 요약하자면 박정희 시대의 급속한 한국형 공업화 모델은 상공부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도한 개발 엘리트에 의해 계획되고 시행된 정책의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가 정치적 이익을 얻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종신은 아닐지라도 장기적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보다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 즉 공업화된 근대 한국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자신의 개인적 야망과 국가의 이익이 합해진 이 목표가 오직 유신 체제, 혹은 ‘한국식’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pp.339~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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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왜 중화학공업화를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는가? 그리고 왜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는가? 저자는 국내외의 각종 저서와 보고서, 논문뿐만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미간행 문서, 박정희의 저작, 그리고 박정희의 정책과 관련된 인물 및 주변 인물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서 얻은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매우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시한다.
미국이 남한의 체제를 수호해주지 못할 것임을 깨달은 박정희는 중화학공업 분야를 육성함으로써 한 단계 높은 산업혁명을 이루는 단호한 정책을 입안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경제 부문의 모든 권한을 자신을 필두로 김정렴과 오원철로 이루어진 3두체제에 집중시켰다. 이들은 경제 계획 전체를 만들고 통제하는 막강한 힘을 지녔으며, 정당, 국회, 집권 이후 자신이 키우고 비호해온 기업인들은 물론 엄중한 방식과 전제적 억압에 저항하는 노동자, 학생, 지식인 들의 반대에 전혀 개의치 않고 정책을 추진했다. 한편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군과 방위비 분담 증가 요구, 중공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는 미국에 대항하여 경제개발 계획과 동시에 재래식 무기 생산을 위한 공개 프로그램과 핵무기와 미사일을 생산하기 위한 극비 계획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의 목표는 국가 재건과 방위였다. 일단 목표를 설정한 박정희는 그것을 이루겠다는 일념하에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온 국민을 가차 없이 밀어붙였다. 그리고 결국 자신도 그것으로 인하여 희생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교 교수인 저자는 박정희 찬양론자가 내세우는 공이 박정희 비판론자가 강조하는 과 없이 이루어지기 힘들었다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박정희 시대에 접근하고 기존의 이분법을 극복하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