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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반지성
양장
류근일 저
기파랑 200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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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비평/비판 top100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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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편집자의 말
두 지식인의 생애의 고백-반지성에 저항한다

1부_편력(遍歷)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체사상으로
주사파 스펙트럼
최강 주사파 조직 민족민주혁명당
햇볕정책으로 부활한 주사파
주사파가 간첩을 신고하다
잃어버린 세대

2_입신(立身)
교양의 충격, 광주의 충격
관념과 현실
민주사회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
인간의 모순, 사회의 모순
뉴 레프트와 주체사상파
혁명가적 인간형
지식인 운동과 대중운동
악惡을 악으로 싸우면 악이 된다
운동은 구도求道의 길
영향
죽음의 그림자
아버지와 아들
인생을 아껴라

3부_한국현대사 바로잡기
역사에의 도전
세대차
오도誤導된 분단의 책임
단세포적 친일파 규정의 위험성
이승만의 나라 세우기
부르스 커밍스 식式 한국전쟁의 해석
북한, 남한 민주화운동의 걸림돌
박정희와의 악연을 끊다
국내 평정
제5공화국 이후 대통령들의 재평가
김대중의 수정주의 정권
한국현대사

4부_북한 바로 읽기
타락의 역사
김정일 마피아 독재의 존속 비결
북한과 공동운명체가 된 남한 정권
남한 좌파가 개발한 친북 논리들
김정일은 누구인가?
북한주민을 위한 네트워크
순진한 '북핵北核' 대책
투명한 눈으로 바로보는 북한 인권
반미 편집증
좌파의 도덕성을 기대한다

5부_뉴라이트의 가능성
가짜 평등주의를 거부한다
문제는 리더십
포퓰리즘과 지성의 내란시대
거리에 야만이 넘쳐흐르고 있다
한국 보수의 기회주의 비판
지식인의 생명은 정직성이다
중도中道로 비겁을 변명할 수 없다
오류를 시인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다
좌파의 공교육 장악
국수적 민족주의의 편견을 깨라
새 리더십을 희망한다
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시대
뉴라이트, 무엇을 할 것인가

에필로그
정담情談
독서讀書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지성이 희망이다

저자 소개

편집 : 김미영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현대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민주화네트워크(NKNET) 기관지 편집장,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 기자를 거쳤다. 현재 포항 한동대에서 미국법과정(JD)을 밟고 있으며, 같은 대학 기초학부에서 「지성과 현실」 강좌를 맡아 강의하고 있다.
대담 : 류근일
1938년 서울에서 출생, 1956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대학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3년 캠브리지 대학 에딘버러 펠로우십으로 영국에서 1년간 수학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 서울대 필화사건으로 첫 옥고를 치른 이래, 5.16직후 민통학련 사건으로 투옥돼 7년여를 감옥에서 보냈고, 유신 직후 민청학년 사건으로 세 번째 투옥됐다. 중앙일보,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했다.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현재 조선일보에 「류근일 칼럼」을 집필중이다.
대담 : 홍진표
1963년 광주광역시 출생. 고교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목격했다. 1982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 이듬해 정치학과로 옮겨 학생운동에 전념, 집시법.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세 차례 투옥됐다. 서울대 총학생회 사무국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등 재야단체 간부로 일했으나, 1996년 전향 후 10여 년 동안 북한의 인권 및 민주화를 위해 일하고 있다. 현재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책실장, 시대정신 편집위원, 자유주의연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고, 뉴라이트 이론가로 활동 중이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5년 11월 25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391쪽 | 596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95641316

책 속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식 정치에 대해서는 상당히 오랜 동안 부정적인 시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1980년대에 전두환 권위주의가 계속 이어졌으니까요. 정치적 억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6.29 선언 직후에 마음의 정리를 했어요. "박정희 식 경제개발 모델은 일정한 시기에 그 적실성(適實性)을 발휘했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다만 유신독재가 꼭 필요했느냐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박정희 씨 본인은 유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박정희 씨 자신이 몰락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잘못한 것이다." 지금은 박정희 시대에 대해 완전히 깔끔하게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박정희 식 경제개발 모델은 성공했다. 그러나 유신(維新)으로 정치적 파국을 자초했다. 반대자에 대한 억압의 비용이 관용의 비용을 초과했기 때문에’ 이후에 신군부(新軍府)가 치고 들어온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도 정당화가 안 됩니다. 그리고 개인적 부패와 사심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와 관련해서, 박정희 씨는 A학점, 전두환.노태우 씨는 F학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박정희와의 악연을 끊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1. 홍진표씨의 공개적 전향의 계기가 된 1999년 주사파 지하조직 민혁당 검거 사건의 배경에는 한 주사파 재야단체 간부가 남파 간첩을 신고하는 아이러니한 사건이 있었음을 설명하는 대목

홍진표 역사적 사건은 간혹 아주 어처구니없는 계기로 벌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혁당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는 과정에는 조금 우스꽝스러운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친북 주사파가 남파간첩을 신고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북한은 간첩을 남파한 사실을 단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1968년 11월에 발생한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맹목적 주사파들은 사실을 눈앞에 뻔히 보면서도 북한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습니다. 말하자면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 이후에 북에서는 간첩을 절대로 남파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믿는 거지요. 대부분의 맹목적 주사파들이 그 정도로 순진합니다.
1997년에 북한 공작원이 그런 친구들 중 하나에게 접근했어요.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이 친구가 그걸 국정원이 파놓은 함정이라고 판단하고 자발적으로 간첩신고를 한 겁니다. 대한민국 국정원이 어떻게 그런 함정을 팔 수 있겠습니까?
그 사건이 이른바 1997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입니다. 여자는 독약을 먹고 현장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접촉했던 사람들이 대거 검거됐지요. 게다가 이 간첩사건이 김영환 씨의 민혁당 검거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그들 부부간첩을 내려 보내면서 ‘김영환에게서 소개받았다’는 얘기를 하라고 지시했던 겁니다. 국정원에서는 최정남의 진술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남한 주사파라는 것이 이쪽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친북 조직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주사파가 북한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공안당국이 처음으로 하게 된 겁니다.
즉시 김영환 씨 집을 압수수색 했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절묘한 시점이었지요. 왜냐하면 바로 그때 김영환 씨는 잠깐 중국에 나가 있었거든요. 사건이 발생한 것을 알게 된 김영환 씨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어서 자기 집 서가에 있는 책 한 권을 치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통화내용이 국정원에 감청되고 말았지요. 사실은 그 책이 난수표(亂數表)였거든요. 『나는 장미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제목의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그 길로 김영환 씨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렸지요. 그리고 2년 동안 중국에서 발이 묶였습니다.
--[주사파가 간첩을 신고하다] 중에서


2. 서울대언어학과 학과장으로 재직하다 6.25 당시 월북해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던 류근일씨의 부친이 북한에서 숙청과 복권을 겪는 과정에서 남한의 아들과 운명적으로 연결됐던 가족사를 설명하는 대목

류근일 9.28 수복 훨씬 전인 7월 말 아버지는 "평양에 소환되어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한 달 뒤에 돌아올 것 같다"는 말씀을 남기신 채, 륙색 하나를 걸머지고 골목길을 빠져 나가셨습니다. 그게 이승에서 뵌 아버지의 마지막 뒷모습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92년 겨울 어느 날, 나는 정보기관의 고위간부를 동반한 전 김형직사범대학 교수이자 탈북인사 김 모 씨를 만나게 됩니다. 참으로 감개 깊은 만남이었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김일성대학 간부로 활동하시면서 서울출신 멋쟁이 교수로 학생들한테도 인기가 좋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중앙당 집중지도'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남한 출신들에 대한 대숙청 때, 전 직원과 학생들이 강당에 집합한 가운데 숙청관들이 아버지를 불러다 세워놓고는 일종의 인민재판 같은 것을 하더랍니다. 죄목이야 어린 아이 이름처럼 갖다 붙이면 그만이겠지만, 처음에는 간첩으로 몰았답니다. 가지고 있는 외국어 원서들을 시비하는가 하면, 외국 방문객을 접견할 때 왜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외국어로 말했느냐, 그게 간첩행위를 한 것 아니냐고 비판했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완강하게 버티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며칠 뒤 아버지는 함경도 오지(奧地)에 격리수용을 당하신 채, 호미 농사를 지으며 10년 가까이 죽지 못해 연명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게 어디 사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런데 1960년대 후반 어느 날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평양에 데려가더니 김형직사범대학 운동장 연단에 세웠답니다. 그러더니 "오늘부터 류응호 동지가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고 공표하더랍니다.
김 교수 말에 의하면, 한번 그렇게 함경도로 유배당한 사람들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왔느냐? 그게 참 기막힌 노릇입니다. 아들인 내가 남쪽에서 감옥살이를 한다는 것을 저들이 뒤늦게 알았는지, 그 때문에 아버지를 '전시용(展示用)'으로 평양에 다시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지요. 물론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 탈북인사 김 교수는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아버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참 영화 같은 이야기지요? 명색이 '복권(復權)'이지, 아버지는 극심한 감시 하에서 일정한 영역 밖으로 여행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공인 언어학 강의도 금지 당한 채 영어교육만 담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교수 자격도 박탈하고 박사학위도 주지 않으면서 심지어 처음에는 교수식당에서 식사하는 것도 금했다는데, 김 교수가 식사 문제만은 해결해 드렸다고 합니다. 훗날 태어난 이복동생은 반동분자 자식이라 대학에도 못 가고 전기공이 되었다가 된장공장에서 감전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공공장소에서도 아버지 주변에는 사람들이 앉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반동분자 곁에 앉았다가 무슨 의심을 받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전에 황장엽 선생도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버님께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다"고.
-[아버지와 아들] 중에서

3. 5.16군사쿠데타 직후 민통전학련 사건으로 7년 3개월, 유신정국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여 투옥돼 박정희 시대 8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류근일씨가 박해의 기억을 딛고 박정희 시대를 실존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

류근일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弑害)되고 장례를 치를 때, 생각한 바가 있어 어머니와 예닐곱 살 먹은 아이를 데리고 부천 시청에 설치된 빈소를 찾아갔어요. 그 앞에서 명복을 빌어 주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제 귀하는 이승의 연극 한 판을 떠나 순수 영혼으로 돌아가시었소. 그러니 영가(靈家)님과 나의 악연은 여기서 끝냅시다. 피해자인 내가 먼저 마음을 풀 터이니 함께 자유로워집시다. 나는 귀하에 대한 원한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소." 이렇게 털고 나니 그토록 홀가분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진심으로 그이하고 연관된 나쁜 카르마(karma, 業)를 더 이상 연장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식 정치에 대해서는 상당히 오랜 동안 부정적인 시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1980년대에 전두환 권위주의가 계속 이어졌으니까요. 정치적 억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6.29 선언 직후에 마음의 정리를 했어요. "박정희 식 경제개발 모델은 일정한 시기에 그 적실성(適實性)을 발휘했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다만 유신독재가 꼭 필요했느냐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박정희 씨 본인은 유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박정희 씨 자신이 몰락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잘못한 것이다." 지금은 박정희 시대에 대해 완전히 깔끔하게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박정희 식 경제개발 모델은 성공했다. 그러나 유신(維新)으로 정치적 파국을 자초했다. 반대자에 대한 억압의 비용이 관용의 비용을 초과했기 때문에’ 이후에 신군부(新軍府)가 치고 들어온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도 정당화가 안 됩니다. 그리고 개인적 부패와 사심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와 관련해서, 박정희 씨는 A학점, 전두환.노태우 씨는 F학점이라고 정리했습니다.

-[박정희와의 악연을 끊다] 중에서


4. 최근 부상하고 있는 뉴라이트 정치운동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과제를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논의하는 대목

홍진표 사실 그것 외에는 다른 가능한 방법도 없습니다. 쿠데타 같은 것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지요. 우리는 뉴라이트 운동을 실효성 있게 전개하기 위해서 앞으로 자유주의연대를 더 강화하고 영향력을 확대시킬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수 쪽에서 우파정권을 창출해야 한다든가, 빼앗긴 정권을 찾아내야 한다든가, 그런 발언을 자주 하는데, 우리로서는 자유주의 개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정권을 창출하거나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류근일 : 욕심을 부리자면 뉴라이트와, 존경받는 선배세대를 망라網羅하는 범(汎) 대한민국 세력의 투쟁기구가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덧붙여서 선배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겁니다. 우선 6.25 때 부상당하신 분들과 전사하신 분들, 전공을 많이 이루신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소리 없이 진력하신 60대 70대 산업전사 여러분들도 정말 존경합니다. 단지 선배세대는 이제 후속세대의 출현을 적극 밀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경험에서 나오는 경륜과 지혜의 조언을 해줘야 합니다. 이런 국면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 이렇게 해라, 하는 등의 도움을 줘야 합니다. 젊은 전사들이 선두에 서고 선배들이 밀어주는 역할분담을 하자는 것입니다.

-[뉴라이트, 무엇을 할 것인가] 중에서


5. 당면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을 반지성주의 증후군으로 보는 두 대담자가 젊은이들에게 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

홍진표 : 1980년대 초반에 운동을 개척했던 사람들이 중간에 운동권을 떠나 후배들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은 책임을 묻는다면 그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비난일 겁니다. 1990년대 초반쯤인가 '단무지'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단순, 무식 뭐 그런 말의 줄임말이라고 했어요. 전남대 녹두대니 오월대니 하는 것이 학생운동에서 추앙을 받았죠. 그때 제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왜 더 배운 것이 잘못이지? 그런 분위기가 상당히 생경하게 느껴졌어요. 나중에 노무현 정권 탄생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태를 지켜보면서 그때 그 친구들이 지금 이 사회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어요.

류근일 : 스페인 내란사를 보면 우나무노(Unamuno y Jugo, Miguel de 1864~1936)라는 대학 교수가 있었어요. 용기 있는 사람이더군요. 대학에 군인들이 진주해서 교수들을 집합시켜 놓고 우나무노 교수에게 연설을 시켰어요. 인격적으로 추앙을 받는 사람이니까 저 사람이 프랑코를 지지하면 도움이 되겠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막상 연설을 했을 때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교양(無敎養)과 반지성(反知性)에 대한 싸움을 하고 있다". 연설을 하고 나서 그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바로 그 지성과 반지성, 교양과 무교양의 싸움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난폭한 반지성이 민중, 개혁, 과거사 정리,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채 무대의 전면으로 치고 나왔습니다. 항전을 준비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이 곧 희망이니까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지성이 희망이다] 중에서
리뷰 총점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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