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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로부터 고대의 황혼까지
이 책은 누구보다도 희랍문학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싶었던 독자들에게 반가운 책일 것이다. 한동안 ‘신화 현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만큼 희랍 신화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뒤이어 많은 원전들이 재번역되거나 처음으로 번역되고 있다. 신화를 통해 희랍문학에 입문한 독자들 중 자기가 읽은 책의 전후좌후를 알고 싶어했던 이들이라면 한번쯤 희랍문학사를 찾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희랍문학사가 출간된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아직 이렇다할 희랍문학사가 출간된 적이 없었던 것은 학문적으로 충분한 확장을 거두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희랍문학이 너무나 방대한 역사와 문헌을 가지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이 책 <희랍문학사: 호메로스로부터 고대의 황혼까지>은 기원전 8세기부터 6세기에 이르는 정신의 거대한 물줄기를 다루고 있다. 정확하게는 문헌상 15세기까지 이어지는 흐름 가운데 비잔틴제국이 성립하고 몰락하기까지의 기간(326-1453년)을 제외한 1400년간 이어진 희랍문학의 역사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의 역사를 상고기, 고전기, 헬레니즘기, 황제기까지 네 개로 나눈다. 이것은 문학사에서도 받아들이는 구분이며 이 책도 역시 이 사분법을 따르고 있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이 책은 호메로스가 지은 서사시 <일리아스>의 첫 구절로 시작하여 고대의 황혼이 올 때까지의 희랍문학사를 이루는 주요한 대목들을 짚어나가고 있다. 저자는 호메로스가 없어져버릴 위기를 만들어냈던 ‘호메로스 문제’에서부터 직업 시인의 등장, 각종 문학 장르의 시작과 발전, 희랍 사회의 확장과 언어의 변화에서 비롯한 희랍문학의 변천, 고대 희랍의 황혼까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펼쳐 보인다. 희랍문학-기타문학? 고대 희랍문학은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문학의 씨앗이 탄화되어 있는 거대한 늪이며 해마다 이곳은 다양한 동식물군이 어우러지는 장관을 자아낸다. 굳이 여러 사람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사실이며 현대의 모든 문학은 희랍문학을 참조하고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고대 희랍문학의 축복이 내리고 있다(물론 여러 ‘탁월한’ 번역가들이 ‘축복’의 주체였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화 <그리스로마신화>가 유래 없는 판매부수를 올리고 그동안 축약본 혹은 인용문구로만 알려지던 방대한 작품들이 처음으로 번역되거나 재번역되고 있다. 문화적 향유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반가운 현상이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서인지 서양고전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 확장되고 있는 조짐이 보인다. 서양고전학 전문잡지(<안티쿠스>)가 창간되는가하면,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가장 유명한 신화책 번역가의 따님이 서양고전학 전공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한 것이 그 예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애초에 신화에 관한 책들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매개가 된 나머지 은연중에 한국의 독자들에게 ‘희랍문학=신화’라는 등식이 퍼져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희랍문학에 대해 말할 때 신들의 이야기와 호메로스를 건너뛸 수는 없지만, 그 후에 생겨난 희비극의 전통, 철학의 탄생, 헬레니즘기의 궁정문학과 로마문학으로 이어진 장대한 흐름을 신화 이야기에 붙잡아 매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은 ‘축복’을 받았다면 해서는 안 되는 불경한 짓일까? 과연 한국의 독자들은 신화의 영웅들처럼 문학의 원류를 찾는 모험의 대장정에 나서게 된 것일까? 유럽문학의 모태이자 인류가 남긴 위대한 지적 유산이기도 한 희랍문학을 찾아나서게 된 독자들이 따르는 경로를 도서관 혹은 데이터베이스 식으로 한다면 이렇다. 예1) 도서 > 전문서적 > 어문학계열 > 기타어문학 > 기타문학 (인터넷서점 A) 예2) 문학이론/언어학 > 세계문학이론 > 기타나라문학이론 (대형서점 K) 예3) 문학> 기타제문학> 기타문학 (국립중앙도서관) 한국 문학이 중심인 우리나라에서 불문학이나 영문학, 독문학, 스페인문학, 러시아문학처럼 큰 언어권을 가진 문학 이외에 나이지리아문학, 파푸아뉴기니문학처럼 각 나라에 문학에 전부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기타문학’이나 ‘기타나라문학이론’으로 부를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희랍문학이 실제로 우리 도서관과 서점에서는 ‘기타문학’으로 분류되고 있으니 혹 희랍문학의 맛에 취한 사람이라면 김빠지는 일일 게다. ‘낯선 것’을 넘어선 희랍문학 저자 마틴 호제는 책머리에서 하루가 다르게 국경이 희미해지고 있는 세계화의 시대에 고대의 희랍문학이 찾아보기 힘든 ‘낯선 것’들을 풍부하게 갖고 있으며 낯선 것들과의 접촉이 갖는 효용에 관해 강조하고 있다. 그는 유럽 문학을 낳은 것은 희랍문학이지만 어느덧 그 원류가 ‘타자’가 되었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마틴 호제의 말에 기대어 한국의 독자들이 희랍-로마 신화를 읽는 이유도 은연중에 낯선 것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다. <희랍문학사>를 지도로 삼아 우리 독자들이 보다 수월하게 ‘낯선 것’과의 접점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