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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간의 대화를 옮기면서
제1장_ 24년간의 대화 김기영 감독, 영화를 시작하다 제2장_ 24년간의 대화 김기영 감독, 충무로에 오다 제3장_ 24년간의 대화 김기영 감독, 내 영화는 다르다고 말한다 제4장_ 24년간의 대화 김기영 감독, <화녀>로 흥행감독이 되다 제5장_ 24년간의 대화 김기영 감독, 작가주의에 눈 뜨다 제6장_ 24년간의 대화 김기영 감독, 감독의 수난시대를 말한다 제7장_ 24년간의 대화 김기영 감독, 몽유병의 세상에서 영화 만들다 제8장_ 24년간의 대화 김기영 감독, 다시 제작자로 돌아오다 제9장_ 24년간의 대화 김기영 감독, 외야에서 영화 만들기 제10장_ 24년간의 대화 김기영 감독, 부활을 꿈꾸다 내가 만난 김기영 감독님 인명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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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1919년 서울교동에서 출생하여 소학교 3학년에 평양으로 이사, 평양고보를 거쳐 경성치과전(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전신)에 입학하여 서울대 통합연극반을 창립하는 등 전공보다는 연극운동에 주력한다. 졸업 후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신하여 <대한뉘우스> 제작에 참여하였고, 미 공보원(usis)에 들어가 독자적으로 <리버티> 뉴스를 제작한다. 1955년 <주검의 상자> 를 연출하여 처음으로 극영화감독으로 데뷔. 이 영화를 계기로 최무룡과 강효실커플은 결혼을 한다. <양산도>,<봉선화>, 57년에는 김지미를 배우로 데뷔시켜 <황혼열차>를 발표한다. 특히 59년 안성기를 처음으로 발굴하여, 전쟁고아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린 <10대의 반항>은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아역상을 받는다. 1960년 "한국문예영화사"를 설ㄹ립하고, 그의 대표작인 <하녀>를 발표한다. 이 영화는 인간을 선악적 시각으로 접근한 독특한 표현주의 영화라는 각광을 받는다. 이후 <현해탄은 알고 있다>,<고려장>까지 제작과 감독을 겸하였으며, 71년 <하녀>를 리바이벌한 <화녀>, 72년 <충녀>로 한 해 최다 관객을 동원한다. 73년 <충녀>로 백상예술대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독상을 받는다. <파계>,<혈육애>, <이어도>등을 발표하여 작가주의 감독의 새지평을 연다. 79년 <수녀> 제작과 동시에 "신한문예영화사"를 설립 한 후 벙어리 여인의 폐쇄적인 심리를 그린 <느미>를 발표하고, <반금련>,<화녀>,<육식동물>등을 제작한다. 이후 10여년간 긴 공백을 거쳐 그의 영화는 젊은 관객층들로부터 재 발견되어 컬트의 스승으로 추앙받는다. 마지막 영화가 된 <악녀>로 재기를 꿈꾸다 1998년 2월 새벽 자택에서 전기 합선으로 인한 화재로 부인과 함께 사망했다. 1997년 제2회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