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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시인의 말 1부 눈이 길을 지우는 방식 눈이 길을 지우는 방식 관념의 족쇄를 풀면 만학晩學 만학의 고행, 무엇을 통과하는가 생각은 눈처럼 흔적 없는 숨결 눈이 지나간 자리에서 둥근달을 기르는 밤 고목古木의 합장合掌 자석과 철의 하루 참나무, 고요한 결 문턱의 숨 적멸의 밤, 산사는 말이 없다 2부 1호선, 해연 아래서 신입사원 1호선, 해연 아래서 사랑에도 등급이 있나요 이유 있는 고집 삶을 실은 바퀴 눈 끝의 허기 비문증, 그 떠다니는 점 흘러가는 밤의 틈 초인종의 온기 어스름이 아침을 스칠 때 장무상망長毋相忘 목멱, 수행의 기록 먼 별에서 보내는 안부 3부 기침으로 남은 사랑 어머니의 부엌 어머니의 귀 아버지의 망치 비 스미는 장독대 명치끝의 장맛비 밤새 안녕이라더니 기댔던 사람 누님은 먼저 내리는 사람이었다 같은 흙 위에서 가을 하늘, 당신에게 아버님 전상서 기침으로 남은 사랑 부치지 못한 편지 4부 백도, 고독이 하얗게 쌓인 섬 덴마, 바다 위의 숨 바다를 밭 삼아 1 바다를 밭 삼아 2 바다를 밭 삼아 3 바다를 밭 삼아 4 바다를 밭 삼아 5 바닷가에는 포구의 시인 가냘픈 기적 양미리의 도시, 속초 국물로 남은 꿈 능파대 백도, 고독이 하얗게 쌓인 섬 ■ 작품 해설 이 지워진 자리에서 고요를 배우는 일 |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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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올라가자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고 나만 그렇게 말해두고 잠들었다 어스름부터 검은 머리 위 새치처럼 눈발 서넛 박히더니 밤새 세상은 말을 지웠다 설설 끓던 아랫목은 굴뚝에 체온을 빼앗기고 콧잔등 시린 아침 엉킨 낚싯줄 같은 머리칼 얼음에 닿은 쇠눈처럼 굳은 눈 밤사이 세상의 흰 것들 흰올빼미, 몰티즈, 오래된 침묵까지 이곳에 모여 장엄하게 눌러앉았다 마음만 앞세웠던 냉이는 잠기고 체온을 나누던 나무는 팔을 내렸으며 세월 묵힌 장독대도 날개에 얼굴을 묻은 왜가리처럼 멈춰 서 있다 집 나갔던 적막이 돌아와 숨소리마저 삼켰다 넉가래에 기대 한 줄 엉성한 길을 낸다 발목을 넘고 무릎을 향해 오르는 가라앉는 소리 태고의 고요가 이러했을까 강물에도 흔들림 없는 바다처럼 쓸어내도 닦아내도 하늘은 열리지 않는다 예고 없이 세계는 다른 빛으로 덮였다 뜬구름 하나 없이 가보지 못한 북쪽의 도시처럼 잊힘이 천천히 쌓였다 바람 잘 날 없던 숨바꼭질 끝 돌아보니 여기, 이 자리 늙은 감나무 어깨를 툭 치며 바람도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몸은 눈 속에 묻힌 말뚝처럼 서 있고 발을 잡아매는 흔적 없는 길 눈발이 하늘에 빗금을 긋는 동안 나는 올라가지 않는 몸으로 하루 속에 잠긴다 --- 「눈이 길을 지우는 방식」 중에서 그랬었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옳지도, 틀리지도 않았던 하루가 느리게 뒤를 따른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해 질 무렵엔 진눈깨비가 되었다 눈을 치우라는 문자와 누군가를 찾는 안내가 울렸다 무음 속으로 가라앉는다 도시는 잠들 준비를 한다 창밖을 보다가 낮 동안 발에 땀이 나도록 걷던 내가 낯설어진다 이유를 접어둘수록 마음은 더 많은 틈을 낸다 명절이 가까워도 닿을 얼굴이 없고 떠오르는 이름도 희미하다 와이퍼가 유리를 밀어낼 때마다 시야가 잠시 맑아진다 서로의 선을 넘지 못한 채 평행으로 흘렀던 시간 가로등 하나가 어둠을 붙들고 서 있는 밤 부르지 못한 이름 하나 입술 위에 닿았다 사라지는 것 눈 계속 내림 --- 「생각은 눈처럼」 중에서 한동네, 한날한시에 향불이 하나씩 타오르고 은은한 연기가 바람 따라 춤추네 남겨진 사람들, 발끝 모래 속에 숨죽이고 바람 속에서 서로의 숨결을 느끼네 뒤란, 앵두나무 붉은 열매 햇살에 젖어 눈물처럼 반짝이고 바람이 스치는 가지마다 속삭임이 흐르네 잎사귀 흔들릴 때마다 바닷가 파도 소리 멀리서 답하네 어제, 작은 목선 하나 거센 풍랑 속에 잠겼고 바다는 깊은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네 오늘, 햇살이 물결 위를 어루만지고 덴마* 다시 떠올라 물결 위에서 숨을 고르네 바다와 사람, 삶과 죽음 한숨 안에 이어져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흐르네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덴마, 바다 위에 숨 쉬네 그 소리, 파도에 실려 먼 하늘까지 울리네 * 강원도 영북 지방의 노를 저어 다니던 작은 목선. --- 「덴마, 바다 위의 숨」 중에서 새끼들 곤한 잠 깨울까 조심조심 철 대문을 나선다 창문마다 그림자놀이 새벽에 한입 떼어준 초승달 자박자박 따라온다 기세등등한 칼바람에 입김마저 하얗게 질리는 난폭한 얼음장 바다와 맞서며 불빛 가냘픈 집어등 아래 오늘의 기대에 부풀고 내일 희망의 그물을 드리운다 붉게 피어나는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물보라를 헤친다 저만치 포구에 아낙네가 반기고 무뚝뚝한 얼굴에 구릿빛 미소가 번진다 시퍼렇게 날 세운 물살에 내일을 심으며 온몸으로 시를 쓴다 --- 「포구의 시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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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어머니의 부엌 누군가의 기침 도시의 밤 그리고 바다와 산의 침묵. 눈이 길을 덮어도 누군가는 다시 그 길을 걸어간다.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그 작은 흔적들을 길어 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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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삼용 시인의 첫 시집 제목을 나는 「덴마, 바다의 숨」으로 추천했었다. 바다에서는 생과 사의 거친 숨소리가 「바다를 밭 삼아」 연재시를 5편이나 쓰도록, 내내 ‘미역귀’가 일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중략)…/ 덴마 다시 떠올라/ 물결 위에서 숨을 고르네”라는 구절이 결국 대학원을 다니며 시쓰기에 골몰하게 한 시힘이었지 싶어서였다.
그러나 표제시 「눈이 길을 지우는 방식」이야말로 그의 삶과 근간의 철학이 내재한 작품이라고 본다. 가볍게 지워지는 흰 눈발에도 “검은 머리 위 새치처럼/ 눈발 서넛 박히더니/ 밤새 세상은/ 말을 지웠”으며, “집 나갔던 적막이 돌아와/ 숨소리마저 삼”켰지만, “바람 잘 날 없던 숨바꼭질 끝/ 돌아보니/ 여기, 이 자리//”임을 자각하는 내면에는 “시퍼렇게 날 세운 물살에/ 내일을 심으며/ 온몸으로 시를 쓰게(「포구의 시인」중에서)” 하는 본연의 ‘나’가 의기롭게 서 있으니 말이다. 이에 송삼용 시인의 도전의 삶과 시인정신이 함께 드러나는 「시인의 말」부터 읽어보라고 당부하고 싶다. “어머니의 부엌/ 누군가의 기침/ 도시의 밤/ 그리고 바다와 산의 침묵/ 눈이 길을 덮어도/ 누군가는 다시 그 길을 걸어간다./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그 작은 흔적들을 길어 올린다." - 김금용 (시인, 계간 《시결》 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