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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어둠이 길러낸 아이
1장. 적막한 겨울이 깨지다 2장. 사냥하는 꽃 3장. 장대비와 잠긴 문 4장. 달빛을 가르는 그림자 5장. 다시, 피어나다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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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화선지처럼 새하얀 눈밭 한가운데 이질적인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미인의 피부에 찍힌 붉은 점, 혹은 때 이르게 추락한 동백 꽃봉오리 같은 것. 주변을 둘러싼 산수유보다 붉고 선명한 빛에 늙은 노비는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주저하는 걸음으로 다가섰다.
무난하게 긴 생에서 그는 처음으로 기이한 광경을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화창한 햇볕에 한층 창백해진 눈밭 가운데 사람이 누워 있었다. 태어났을 적과 같은 알몸뚱이였다. --- 「적막한 겨울이 깨지다」 중에서 달빛이 내린 전나무 숲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빛은 주변을 청보라색으로 물들였다. 서늘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채에 잠겨 있자니, 이초의 뇌리에 다시금 옛 인연이 떠올랐다. 반짝이는 두 눈과 새하얀 피부에 핀 보랏빛 꽃이 그의 안에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잡념을 다스리기 위해 이초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눈밭 한가운데 누군가 우뚝 서 있었다. 꽃잎을 머금은 돌풍 같았다. 겨울바람에 길게 묶은 머리가 나부꼈고, 가늘지만 탄탄한 몸이 곧았다. 검보라색 무사복에 걸친 흑표범 가죽에는 푸르스름한 달빛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검을 든 섬세한 모양새에 이초는 돌연 나타난 이 인물이 그가 찾던 살수이며, 사내가 아닌 여인이라고 확신했다. --- 「적막한 겨울이 깨지다」 중에서 오늘도 어제와 같은 지옥, 다르지 않은 어둠. 그 안에서 소녀는 한참을 지냈다. 사계절을 보냈고 밤낮을 세다 포기했다. 멍투성이 몸을 끌어안고 잠들기를 반복했다. 끌려나가 매타작을 당하느니 어둠 속에서 웅크리는 게 나았다. 그렇게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던 나날이었다. 별안간 꿈결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있니?” --- 「어둠이 길러낸 아이」 중에서 재미로 사냥감을 꿰어 죽이는 때까치. 기화를 거둔 스승 탄은 그녀를 그리 불렀다. 살수 기화는 점찍은 표적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제 몸이 상하고 더러워지는 꼴은 안중에도 없이 칼을 휘둘렀다. 마치 이빨에 꿴 사냥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독하고 잔인했다. 그녀에게 살수는 천직이었다. 하루는 임무에 실패할 뻔한 날이었다. 기화는 빗발치는 화살들을 뚫고 표적에게 향했다. 대담하다 못해 어리석다 할 정도였다. 목숨이 몇 개쯤 되는 양 거침없었다. 방에 당도하여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아낙들을 데리고 몹쓸 짓을 하던 양반의 목을 즉시 날렸다. 그리고 방에서 나와 그 목을 양반의 호위꾼들에게 내보였다. 그 기세가 귀신과도 같아서 적들은 주춤대며 물러섰다. 기화는 흐트러진 호위꾼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올 따름이었다. --- 「사냥하는 꽃」 중에서 숲으로 가며 그녀는 이초를 떠올렸다. 그 동그란 눈과 뺀질한 입술을 아주 찢어발겨놔야지. 다시는 구해주겠다느니 같이 가자느니 헛소리 못 하게. 기화가 검을 꽉 움켜쥐고 터벅터벅 산을 내려가던 때였다. ‘기화야, 보고 싶었다.’ 문득 그놈이 뱉었던 말이 떠올라 발걸음을 멈췄다. 산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겨울 숲이었다. 덫에라도 걸렸는지 기화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녀를 움직이게 한 건, 불현듯 떠오른 원수의 말이었다. --- 「사냥하는 꽃」 중에서 이어진 건 기화의 서늘할 정도로 이성적인 목소리였다. “내게 희망을 가르쳐준 것. 그게 네가 잘못한 일이다. 한번 깨우치면 지워지지도 않는 걸 겁도 없이 아로새겨놨으니.” “기화야.” 그의 말을 자르듯 다시 말할 때, 기화는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조금은 우는 것처럼도 보였다. “꿈꾸게 하지 마. 어둠 속에서 나는 이미 자유로워.” 기화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젖혀 나갈 태세를 했다. --- 「사냥하는 꽃」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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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 13개국 수출, 이탈리아 1위 작가 신작
★ 리디북스 판타지 분야 베스트셀러 어느 겨울 새벽, 눈밭 위에 남겨진 매화 한 송이 피와 꽃의 미학 속에 감춰진 잔혹한 진실 첫 장편소설 《환상서점》으로 유럽 전역에 ‘K-문학’의 저력을 증명하며 전 세계 독자를 매혹한 스토리텔러 소서림이 더욱 날카롭고 정교해진 문장으로 돌아왔다. 출간 전부터 해외 판권 문의가 쇄도한 신작 《살수, 기화》는 한 번 펼치면 멈출 수 없는 압도적인 필력으로 다시 한번 독자를 사로잡는다. 가상의 국가 목란국, 평화롭던 도성은 어느 겨울 새벽에 벌어진 권력자의 의문사로 발칵 뒤집힌다. 시신 곁에 남겨진 단서는 밀랍 매화 한 송이와 정체불명의 서찰뿐.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대귀족들의 죽음 앞에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어둠 속에 숨은 살수를 찾기 위한 긴박한 추적이 시작된다. 사건의 궤적을 쫓던 야경꾼 ‘이초’는 범인을 추적하던 중 베일에 싸인 살수 ‘기화’와 마주한다. 칼날이 부딪치는 찰나,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십여 년 전, 목곽고에 갇혀 멍투성이 손등을 내보이던 소녀와 그 위로 “꽃이 피었다”며 이름을 지어준 소년. 복수를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된 살수와 그녀를 지키고 싶었던 소년은, 이제 서로를 베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적이 되어 재회한다. “살아남기 위해 가장 먼저 내 마음부터 베었다” 기화는 냉혹한 살수로 길러지며 모든 감정을 도려낸 인물이다. 그녀에게 세상은 서슬 퍼런 증오와 복수만이 존재하는 곳이었으나, 이초와의 재회는 견고했던 그녀의 세계를 뒤흔든다. 죽여야 하는 자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자를 죽여야만 하는 모순된 운명 앞에서 기화는 묻는다. 평생을 지탱해온 복수심 끝에 남는 것은 구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지옥인가. 소설은 ‘피와 꽃, 그리고 식물’이라는 감각적인 장치를 통해 비극적 운명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살인의 현장마다 남겨진 꽃들은 잔혹한 복수의 표식이자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흉터다. 식물에서 차용한 인물들의 이름은 각 캐릭터의 성격과 존재감을 입체적으로 드러내며 서사의 깊이를 더한다. 궁정의 암투와 밤의 도성에서 펼쳐지는 추적의 끝에서 작가는 묻는다. 증오와 사랑의 경계는 어디인가. 맹목적 복수가 닿는 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어둠 속에 갇힌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는 허락될 수 있는 것인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스토리텔러 소서림이 빚어낸 다크 로맨스의 정수 참혹한 과거의 상처를 안은 채 엇갈린 칼날 끝에 선 이초와 기화. 이들의 재회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부조리한 운명에 맞서는 처절한 사투로 번져나간다. 특히 비극적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려는 기화의 선택은 독자들에게 강렬한 전율을 선사한다. 소서림 작가가 전작에서 보여준 독창적인 세계관은 신작에서 한층 깊어진 필력으로 빛을 발한다. 서늘한 긴장감 속에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이 소설은,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당신이 믿어온 모든 확신을 뒤흔드는 강렬한 잔상을 남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