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여러분을 궁궐로 초대합니다___6
문화유산이란 무엇일까요?___10 1. 근대 역사의 현장, 덕수궁 정동이라는 이름의 유래__17 정릉동 행궁에서 경운궁으로__19 선조, 정릉동 행궁에 들다__21 경운궁이라 이름 짓다__26 존숭의 공간, 경운궁__27 대한제국과 경운궁__32 고종 황제와 환구단__34 대한문으로 들어서다__38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는 금천교__39 덕수궁의 정전, 중화전__40 임금님이 머물렀던 집, 석어당__44 즉위식이 열린 즉조당__46 황제가 업무를 보던 준명당__48 함녕전과 대화재__54 황제를 알현하던 덕홍전__58 길상 문양으로 장식된 정관헌__60 유현문 꽃담__63 근대 국가를 향한 의지, 석조전__64 석조전 서관__72 순종의 즉위식이 열린 돈덕전__73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__76 2. 잊혀졌던 궁궐, 경희궁 광해군과 인조반정__83 인조 임금님과 경덕궁__88 후기 왕들의 경희궁 사랑__89 서궐도안과 경희궁 배치__91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__94 명당수가 흐르는 금천교__97 궁궐의 관청, 궐내각사__102 즉위식이 열린 숭정문__104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__106 왕의 편전, 자정전__113 왕의 어진을 모신 태령전__118 상서로운 바위, 서암__122 언제나 마르지 않는 영렬천__124 융복헌과 회상전 자리에 위치한 반공호__125 춘화정과 반월석조__126 경희궁의 훼손__128 부록: 조선의 왕위 계보___132 부록: 궁궐에서 쓰는 말 잇기___133 부록: 십자낱말풀이___134 |
이향우의 다른 상품
|
폐허가 된 한양으로 돌아 온 선조(재위 1567~1608)는 월산대군의 후손 양천도정 이번(월산대군의 증손)이 살던 집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삼아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p.21 중화전(中和殿)은 경운궁(덕수궁)의 법전입니다. 그 이름을 다른 궁궐 법전에 붙이는 근정전이나 인정전과 같은 정(政) 자를 쓰지 않고 중화전이라고 했습니다. ‘중화(中和)’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으로, ‘대한제국으로 거듭나는 조선이 정상적인 세계질서 속에서 당당히 자리 잡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입니다. ---p.40 1904년 경운궁에 큰 불이 나서 그동안 새로 짓고 고치던 주요 건물들이 거의 다 타버렸습니다. 경운궁을 잿더미로 만들고 오늘날 덕수궁의 입지를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든 화재 사건입니다. 일본 측의 언론에 의하면, 함녕전 온돌을 수리한 뒤 말리는 과정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잘못해서 나무 기둥에 불이 옮겨 붙어 삽시간에 급한 북동풍을 타고 궁궐 전체로 번져 하늘이 새카맣게 변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1904년 4월 14일 밤 10시에 일어난 불은 고종을 위협하기 위한 경고로 일본이 일부러 저지른 사건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경운궁의 화재로 인해 궁중에 보관 중이던 귀중 문서와 그림 등이 소실되었지만, 고종과 대신들에게 그 무엇보다 큰 손실은 수백 년 보존되어 온 석어당과 즉조당 등 유서 깊은 전각의 소실이었습니다. ---p.55~56 경희궁을 지은 사람은 광해군입니다. 광해군은 재위 시기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짓고 새로 인경궁, 경희궁을 지었습니다. 광해군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王氣: 왕이 태어날 기운)가 서렸다는 말을 듣고 그 기운을 누르려고 정원군의 집이 있던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 궁궐을 완성하고 나서 바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왕기설은 새로 국왕이 된 인조에게 돌아갔습니다. ---p.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