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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장 고대 왜(倭)의 정체- 韓倭 인류유전학으로 본 ‘열도 倭=韓倭’ 韓倭가 남긴 열도의 고대 흔적(痕迹)들 고대 문헌의 ‘倭’의 변천- ‘倭’에서 ‘韓倭’로 2장 광개토태왕비문의 ‘(韓)倭’와 경자년(400)조의 ‘任那加羅’ 광개토태왕릉비문의 倭=韓倭 영락 8년 무술년(398)과 9년 기해년(399), 전쟁 비용과 대의명분 영락 10년(400) 경자년조의 ‘任那’의 위치 규슈의 韓倭들과 ‘任那(마츠라)’와 ‘가라(加羅)’의 뜻 Pax Koreana- 5세기 장수왕 서해독점패권주의 규슈의 고구려 고분 3장 『일본서기』 ‘미마나(任那)’의 성격과 위치 분석 비문의 ‘任那=맡을나=마츠라’와 『일본서기』의 ‘미마나’ 백제 무령왕(武寧王)과 『일본서기』 1대 천황 신무(神武, 진무) ‘みまな(미마나=任那)’의 위치로 본 『일본서기』의 재구성 4장 결론 - 비문의 마츠라(任那)에서 『일본서기』 의 미마나(任那)로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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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인들이 열도로 이주하여 열도의 인구를 구성했다는 인류유전학의 과학적인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이른바 ‘일선동조론’ 또는 ‘동조동근론’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한반도 침략이론으로 먼저 악용되었다는 것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 p.21 월왕구천은 춘추시대 사람이다. 서기전 464년이라는 사망 연대만 알려져 있다. “월왕구천은 회계에 봉해져 문신을 하고…”라는 부분은 『삼국지』 「위지(魏志)」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왜(倭)전」에서 다시 언급된다. --- p.94 고구려가 북부여의 해모수로부터 나왔다는 내용은 고구려가 스스로를 단군조선에서 북부여로,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고구려 자신은 스스로를 단군조선의 적통 후예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백제와 신라가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해 왔다는 내용을 사실이 아닌 과장된 수사법이라고만 단정할 수 없다. --- p.166 고구려는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뜻의 ‘다물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 그 고조선의 옛 지역을 회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고구려가 가지고 갔다는 것은 5세기에 고구려가 ‘다물정신’으로 영토를 회복한 것을 북위를 중심으로 한 당시 국제사회가 인정한 것으로 본다. --- p.238 실제 인물이었던 ‘규슈신라 세력의 대표’였던 ‘비미호’가 활약했던 절대 연대는 200년대인 3세기다. 이 연대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 「신공기」는 그 절대연대를 기준으로 규슈에서 규슈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활약을 펼쳤던, 본토를 포함한 열도 각 지역의 여러 백제 세력들의 연대(年代)를 비미호 절대 연대에 맞춰 서술된 것으로 보인다. --- p.316 무령왕이 규슈부터 오사카까지 동정하며 한때 위력을 펼치며 통일적 기세를 갖춘 적이 있었지만, 그 토대가 오래가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열도의 각 세력들이 어떤 세력의 통일적 집권 아래로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리 아래로 들어갔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통일적 중앙정부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근대 일본이 탄생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 p.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