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표류 소년 · 9
|
이정명의 다른 상품
|
그토록 많은 말을 주고받았는데도 여전히 하지 못한 말들이 내 가슴에 쌓여 있다. 말이 되기에는 너무 길고 복잡한 이야기. 어쩌면 엄마가 듣고 싶지 않거나 듣지 않아도 알고 있을 이야기.
--- p.17 보라는 그런 아이들을 하루이틀 보아온 게 아니다. 너무나 부서지기 쉬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온몸에서 잠시도 힘을 빼지 않는 아이들. 보라는 소년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속삭인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을 거야. 그러나 소년은 움직임이 없다. --- p.32 12월 23일 금요일. 마지막 수업. 이제부턴 혼자 공부해야 한다. 불안하지만 두렵지 않다. --- p.58 자식의 미래를 판돈으로 걸고 경마처럼 몰아대는 부모는 12학군에 흔했다. (……) 하지만 자식을 위한다는 이유로 행하는 강압을 사랑의 특별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까? --- p.180 요한의 감정은 막연한 증오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감내해야 할 고통이었다. 왜 온전한 사랑만으로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부족한 걸까? --- p.194 그들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같은 선택을 한다. 말하지 않고 묻지 않고 모른 척하는 선택을. 침묵은 때로 진실보다 믿을 만하다. --- p.277 |
|
“그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할 인생. 고함도 나무람도 애원도 없이 혼자 결정하고 혼자 선택하고 혼자 책임져야 할 삶. 머지않아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들은 이 놀라운 장면에 입이 딱 벌어지고 혼이 나갈 것이다. (……)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_18쪽 어느 겨울, 경찰서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발신인은 중학교 교사. 자신의 학생이 등교하지도 않고 연락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신고를 받은 여성청소년과 경사 남보라는 그 학생의 집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매트리스 위에 나란히 누운 모자를 발견한다. 어머니 안도연은 이미 사망한 지 꽤 시일이 지난 상태였고, 아들 요한은 손목에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아직 맥박이 뛰는 중이었다. 곧장 병원으로 실려 간 그가 현장에 남긴 것은 도톰한 갈색 표지의 ‘학습 노트’였다. 다른 일에는 말문을 열지 않던 요한이 유일하게 언급한 그것. 갈색 표지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현장의 기억을 불러온다. 그녀는 피에 들러붙은 갈피들을 조심스레 분리한다. (……) 그녀는 귀를 기울인다. 소년이 하지 않은 말과 하지 못한 말, 할 수 없었던 말에. 말머리의 머뭇거림과 말 사이의 침묵과 끝맺지 못한 말의 여운에. _57쪽 공부 일정과 간단한 학습 메모, 요점 정리가 적혀 있는 노트는 얼핏 보기에는 특이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보라는 요한의 주변 인물들을 탐색해 나가기 시작한다. 담임교사인 인선,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을 앓고 있던 엄마의 주치의 우일, 요한의 이웃이었던 수임과 그의 딸 예림……. 이들 중 도연을 죽인 범인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우울증과 알코올중독 증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조사를 거듭하던 중 보라는 모자 사이에 장한솔이라는 남자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요한의 과외 선생이었던 그는 사건 당일 오후 요한의 집을 방문해 밤늦게 떠났다. 남편을 잃은 여자와 아빠가 없는 아이에게 그는 단순히 과외 교사 이상의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유력 용의자로 한솔이 떠오르며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듯하다. 그러나 보라는 계속해서 이런 의문이 든다. 오류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될 수 있을까? 자식 교육을 위해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아이를 기만한 파렴치한 과외 교사에게 분노가 들끓는다. 진만은 여론의 분노를 동력 삼아 수사를 밀어붙인다. 그가 시간대별로 촘촘하게 재구성한 사건에는 허술함이 없다. (……) “이제 장한솔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_205쪽 연약하기에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하여 소년의 주위에는 수많은 선의가 있었다. 따뜻한 이웃이 있었고 교사와 친구의 진심 어린 헌신과 우정이 존재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엄마가 함께였다. 그럼에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소설은 너무나도 연약해 서로를 지키려고 했던 선택들이 삶에 남긴 잔혹한 상흔을 드러낸다. 사랑했기 때문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 한 가족의 잔혹사가 일견 모른 척하고 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연의 악 때문에 누군가를 해치지.”“아뇨.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는 건 사악해서가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이에요. (……) 남에게 속기 쉽고 유혹을 이기기 어렵고 쉽게 두려워하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요. 연약함이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거예요.” _2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