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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4
1부 바다와 섬, 고향의 서정 2023년 7월, 바다와 섬과 카페·12 ‘그리운 바다 성산포’가 한 품에·16 소년의 노스탤지어·20 봄은 왔다. 기대와 꿈을 가지고·24 바다 위에 비친 지난여름의 실루엣·28 나란히 보는 바다와 섬, 그리고 수국·33 구두미 바다의 달빛과 시인·38 고향 무정·43 예배당 새벽 종소리·48 저 엄청난 ‘방종’… 가을 바다의 물비늘·54 성산포에서 취한 가을서정… 그리고 오문복 선생께 인사드리다·59 늦봄 어느날 ‘옹’이 폭포를 건너다·65 들국화가 피었어라!·71 시간의 복도를 지나는 오후·76 세월의 해도(海圖)를 읽는 밤·81 2부 나이와 시간, 존재의 사유 ‘그리움’ ‘회한’…상투적이지만 애수 가득한 단어·88 세밑 단상…70세라는 이상한 나이·93 세밑가지 잡담…시인과 에세이스트·97 어젯밤의 불면은 더 고약했다·101 허무맹랑하지 않은 어느 주석(酒席) 이야기·106 한해가 또 속절없구나!·111 ‘꼰대’, 시시한 노인에 대한 부름의 의미·116 오늘 아침에도 배달된 ‘편지’·121 우리의 여정에 ‘동사’로 나타나는 ‘유혹’들·126 죽음, 그 오래된 그림자·131 책, 그 자존과 허영의 굴레·136 밥이나 먹자·142 3부 시와 문학, 읽고 쓰는 운명 시비(詩碑)에 대하여·150 글쓰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154 책 읽기의 불편함과 어려움·160 ‘문주반생기’ ‘명정 40년’ 열독기(閱讀記)·164 “보이스피싱에서 시까지, AI와 함께 걷는 길”·169 문단은 언제부터 장터가 되었나·175 바위를 잡고 버텨라, 시지프스여!·181 『인간시장』을 추억하며·186 ‘서천꽃밭’에 자라는 시… 김원욱을 다시 쳐다보며·191 ‘깡’의 여정(旅情)…정영자 에세이를 보며·196 영혼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그리움…나기철 7시집 『담록빛 물방울』·201 4부 사람과 인연, 시대의 얼굴 ‘슬픔’…오승철의 시 「셔?」·208 “잘가, 친구!” 오승철 시인을 고별하며·213 ‘승철이 생각’과 서귀포의 봄·218 ‘자신 이익 챙길 줄 몰랐던 바보 잠들다’…문무병 선생 영전에·222 ‘비범함과 배짱’의 삶…고 신구범 전 지사의 명복을 빌며·227 소설가 김호의 산중(山中) 연주(演奏), 라면 맛·231 시인 문무병 나기철의 ‘상호데생’·236 원로 시인과 문우들의 백주 주음과 문담잡설(文談雜說)·241 벗과 문학과 술·246 보수동, 책의 시대가 남긴 풍경·251 5부 문학 현장과 동행의 기록 “봄을 불러내다”…‘시로 봄을 여는 서귀포’ 관람기·258 서귀포를 품다…‘강문신 문학관 개관’을 보며·263 오사카 ‘낭만파’의 좌충우돌기·268 ‘인생3락’과 꼬막비빔밥…서귀포문협, 문학관 탐방기·273 ‘낭만파 그 후’의 한담객설(閑談客說)·279 가을밤 ‘낭만파 그 후’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다·284 ‘낭만파 그 후’ 2024 송년모임·289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 전’-글동무들의 송년회·293 에필로그·299 |
康禎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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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바다와 섬, 고향의 서정
2023년 7월, 바다와 섬과 카페 바다가 넓게 보인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되새겨 보니 3층이다. 친구와 이야기하느라고 이곳이 바다와 섬이 보이는 3층 카페라는 인식 혹은 기억을 잠시 멀리 떨궈두었던 모양이다. 바다는 잔물결로 하얗게 파도를 만들어 보나 여의찮다. 아마도 이 무더위에 지친 태양과 바람이 거센 파도를 만들어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크고 억세다 싶은 파도를 보는 것도 싫지는 않다. 넘실댐이 때때로 두려움을 상기시키기는 하나, 연주해 내는 것은 삶의 변주곡이다. 거셈의 한바탕, 뒤이어 언제 그랬냐 싶게 가라앉는 리듬이 강약을 반복하는데, 우리의 삶과 같이 매우 상투적이다. 나의 근천스러운 상상력으로, 섬은 바다를 향해 연주하는 피아노와 같다. 건반을 두드려 내는 곡은 무엇일까? 그것을 듣는 자는 그의 마음에 있던 ‘무거운 돌덩이’를 치워 버리는 가벼움에 안도할지 모른다. 우리의 삶 속 하잘것없는 것들과 귀찮은 것들을 쫓아 버리는 것. 무람없이 들려오는 멜로디에 의지하면 섬과 바다를 넘어 다른 세계에 이른다. 바다와 섬을 보며 “멋있다”는 탄사는 맨 처음 나오는 표현이다. 바다에 떠 있는 섬을 보며 저런 감탄사의 사용은 진부하지만, 그런대로 범작(凡作)이다. 멋은 있지만 바다를 품은 섬의 멋내기, 이걸 본 자의 넋두리로 감상은 흐른다. 아쉽게도 그윽한 아름다움보다는 섬은 미추의 세계에서 벗어나 위로와 위안, 고독과 연민의 시어들을 품어 일렁이는 사색의 바다에 떠 있다. 섬이 주는 이미지는 그러므로 갈래갈래이다. 섬에서 지적 면모를 읽어 가는 이가 있고, 고독한 바다 가운데 있으므로 처지로 비유하는 이가 있다. 바다에서 둥둥 떠 있다고 하여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는 배처럼 화폭에 담는 이가 있고, 바다와 섬의 숙명적 ‘별리(別離)’를 상상하여 섬을 기선처럼 그려낸다. 기적을 울리며 떠나는 그 섬의 형상을 상상한다는 것, 오늘만은 객쩍다. 커피숍 3층은, 그 바다를 보고 싶어 찾아간 곳이다. 친구와 종종 들리는 이곳은 갈 때마다 나란히 앉아서 바다와 섬과 약간의 파도와 그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지만, 질리지 않는다. 늘 함께 하는 풍경의 정취는 시정(詩情)의 산파를 자임한다. 사색의 창을 열고 사유의 길을 가며 비로소, 삶과 사랑과 연민을 깨닫게 하는 곳, 시가 불리워지는 그곳에 나는 와있다. 글 무지렁이일밖에 없는 필자의 욕심이다. 그 바다와 섬을 위해 모든 시인들이 이미 절창했던 시어들을 짓밟는 것은. 그래서 혼자의 상상력과 느낌에 억지를 더해 씨부렁거린다. 안개비가 속절없이 내릴 때 섬은 미상불 쓸쓸해 보인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어서 정작 섬은 외로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워했다면 왜 사람들이 찾아 위로를 받을까. 섬이 있는 바다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다를 찾는 발길인데, ‘구두미(서귀포시 보목동 소재 섭섬이 보이는 앞바다)’ 에서 갈 길을 잃는다. 이곳의 섬은 또 다른 상상력이다. 밤에 찾아와 여기서 ‘야상곡’을 듣고 갔다는 시인도 있지만, 여기서는 다른 얼굴의 바다와 섬을 본다. 섭섬과 바다가 협연으로 빚어내는 은빛은 환상적이다. 꿍쳐놓은 풍악(風樂)의 밑천이 모자라서 궁색하지만, 여기도 사색의 바다라고 명명하는 것은 성의가 아닌 듯하다. 이곳엔 명명백백히 다른, 품에 안기고 싶은 바다와 섬이 존재하고 있다. 음력 유월 열하루의 바다는 보름을 나흘 앞둔 월광으로 은빛 길을 내고 있다. 그 은은한 흔들림 따라 길을 무작정 쫓아 가면 섬은 훤칠하고도 푸근한 모습이다. 낮에 저 사색의 바다 위에 떴던 반달이 어느새 밤이 되자 그 섬 위로 걸터앉아 내려다본다. 친구와 내가 낮에 본 반달은 그새 익어 조금만 보태면 될 만월로 우리를 남몰래 쫓아왔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섬은 어느새 양팔을 벌린다. 내 품에 안기라고. 다채한 색으로 수(繡)가 놓여진 별빛이 바다 위로 쏟아져 ‘밀어’를 쏟아낸다. 비밀스런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면 하염없는 기쁨의 은총 속에 있는 것이리라. 젖을 주던 푸근한 모든 어머니의 가슴, 질풍노도를 제 것으로 하며 부끄러워했고 고독했던 한 여인의 가슴! 안기는 자의 쓸쓸함을 감춰주고 나서 섬은, 위안의 온도로 가슴을 데워준다. 서귀포의 바다와 섬은 시인의 것이었다. 연인의 것이었다. 노스탤지어였고, 그리운 고향이었다. 그리고 유년과 청년을 넘긴 일기장이었다. 친구와 함께 마주하는 바다와 섬은 그 모든 것의 존재를 하나하나 기억시킨다. 태어나 바다와 섬을 떠나지 못한 자의 변명을 위해. 혹은 누군가를 위해 쓸 시를 위해. ‘그리운 바다 성산포’가 한 품에 - ‘이생진 시인과 함께하는 시 낭송회’ 참관기 기상해 보니 오전 5시 가까웠다. 어제 기상청은 오늘 맑은 날씨를 예보했다. 대충 조거 팬츠와 셔츠로 갈아입고 집 밖을 보는데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힌다. 아니 오늘 맑은 날씨 예보가 빗나갔나, 하면서 문을 빼꼼히 열어 내다보니 우산을 쓰지 않고는 나들이를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걱정이 되었다. 친구가 회원들과 함께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행사 하나가 있었다. 오후에 열리긴 하지만, 오후 내내 비가 올 것 같아 모처럼 행사가 망칠까 염려되었다. “오후 되면 개일지도 몰라. 일단 내 아침 ‘일과’를 마치고 보자” 이렇게 생각하며 조깅하기 위해 나섰다. 차를 몰아 제주시 공설운동장으로 갔다. 도착까지는 10분이면 넉넉하다. 비가 오는 날은 이곳 2층 트랙을 돈다. 여기는 일정 구간을 제외하고 지붕이 있어서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오는 날 전지훈련 장소로도 쓰인다. 또 많은 러너들이 뛰는 곳이기도 하다. 종종 여기서 열심히 달리기 하는 후배들을 만난다. 비가 오니까 아침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까지 이곳으로 모인다. 벌써 몇몇이 열심히 걷기를 하고 있다. 장년과 노년으로 어우러진 7~8명 정도의 사람들이 단체를 이뤄 모였다. 서 있는 채로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한 다음 걷는 운동을 시작한다. 성호를 긋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아마도 성당의 레지오 단원들 같다. 매주 걷기 운동을 하며 신앙생활을 돈독히 하고 있는 그룹으로 여겨졌다. 5시 반 정도 달리기를 시작해서 한 시간 정도로 마쳤다. 비가 계속 내린다. 집으로 와서 날씨를 검색하니 오전 10시부터는 흐리다 오후에는 청명하게 갠 날씨가 예보되어 있다. 아침밥 먹고 차를 몰아 달려야 하겠다. ‘성산포 오정개 해안으로’ 이곳은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를 써서 유명한 시인의 시비 19개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4월 15일 토요일인 오늘은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시인과 함께하는 시 낭송회’가 열린다. 나는 며칠 전부터 나의 고우(故友) 이승익 시인의 초청을 받아서 참석하기로 했다. 시인은 이곳 토박이로, 나와 성산읍 온평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 글 앞에서 ‘친구’라고 했던 사람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만날 수 없었는데, 30대 후반 어느 날 서귀포에서 우연히 만나서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다른 동창들의 소식도 들었다. 그 후 내가 제주시로 이사한 후에는 더 자주 만났다. 이 친구는 1970년대 유명했던 야당 정치인을 후원하는 청년그룹 멤버였다. 그 때문에 제주시로 종종 올 일이 있었고, 그래서 만남이 때때로 이뤄졌다. 2007년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S 회사에 있을 때 『글밭 제주』라는 동인집을 발간하고 우리 회사에서 출간 기념회를 열었다. 제주도지사를 지냈던 분이 대표이사였는데, 그가 축사를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친구에게는 『우성강 연가』 등 이미 발간된 시집이 있다. 오정개 해안은 그야말로 명당 중에서도 으뜸이다. 성산일출봉이 서쪽으로 그 웅자를 드러내면서 바다를 굽어 보고 있다. 동남쪽으로는 나즈막이 우도가 보인다. 바다는 잔잔했고 멀리 비가 오다 개인 청명한 날씨는 오늘따라 특별하게 일출봉과 우도를 뚜렷이 그려내고 있다. 와락 모두 품에 안긴다. 내 두 팔을 벌리고 성산일출봉을 오른쪽 팔을 뻗어, 우도를 왼쪽 팔을 뻗어 저 수평선 쪽으로 모두어 안으니, 아뿔싸! 내 연인의 포근한 가슴이었던가? 그대로 한 품이다. 두어 번 찾아갔던 나폴리 앞바다 같은 상상이 일었다. 아직 여름은 아니지만 ‘오 솔레미오’를 부르는 게 이곳에 대한 ‘예의’ 같지만 나는 그저 상상으로 만족하고 만다. 곧이어 연주자들이 무대에 오르면 오정개 바다도 신명 나겠지, 하는 생각도 하면서. 시 낭송회는 시작되고, 시들은 청아하고 고운 목소리의 ‘요정’으로 변해 오정개 바다 위로 저 수평선까지 날아간다. 물허벅 장단에, 팬플룻과 에어러폰 연주에 한바탕 신명이 났다. 96세의 이생진 시인이 마이크를 잡았다.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움도 없이 말 하나 않지만”.(시인은 시 전체를 낭독했지만 필자가 일부분만 옮겼다.) 이 시는 그의 역작 ‘넋’이다. 숙연해졌다. 오정개 앞 잔잔하게 일고 있는 파도를 보고 있다. 지난날의 내 아쉬움을 보고 있다. 어리석음으로 저쪽 언덕에 미처 닿지 못했던 사랑의 노래를 듣고 있다, ‘살아내지 못한 것’들이 ‘피워내지 못한 욕망’이 파도가 되어 나의 심연에서 일렁인다. 에필로그 노을이 타는 자리에서 긋는 문장의 하이픈 ‘글바치’로 행세하며 매일매일 글쓰기를 업(業)으로 살아온 지 벌써 몇 년이 되었다. 기자를 하면서 수십 년 글을 써왔다고 하지만, 사실의 파편들을 엮어낸 건조한 기사였고 그것을 나의 글 혹은 나의 문장이라고 한다면, 조금 오버한다는 지적 받기 맞춤하다. 철모르고 들어간 언론사에서 짬밥 좀 먹자 ‘데스크’를 맡게 되니, 당시 신문 1면의 하단 칼럼과 한 달 한 번 정도 사내외 필진에게 돌아오는 2,000자 정도 되는 칼럼을 떠맡아 써온 여정을 돌이켜 보면, 세상 안팎을 넘나들며 따라야 했던 숙명적 글쓰기의 수업이었다. 수십 년간 남의 이야기를 갈무리해 기사를 짜깁기하다 비로소 나의 글을 짓기 시작한 셈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같은 생각이기도 한데 그것들을 변명할 필요가 없다. 하루하루가 외롭고 진을 빼는 행위다. 글쓰기는 쓰는 이 모두에게 미지의 개척지이며, 성에 차지 않는 늘 불만의 땅이면서, 나에게는 신에게 외면당한 숙명의 척지(瘠地)에 쟁기질하는 고단한 노동과도 같았다. 이 책에는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잡문 중 대부분 ‘제주헤럴드’에 발표된 글들을 추려 담았다. 2021년 12월 말 나는 돌연 어떤 ‘깨달음’에 이르러 이듬해 1월 1일부터 원고매수를 정해 매일매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22년 첫 책 『만각과 자탄』 발간 후 “나 스스로를 정리하자”는 생각이 강렬해지면서, 자신과 이렇게 약속을 하고 지키고 있다. 새벽 조깅과 뒤이어 컴퓨터 화면을 마주하는 일. 나는 이 정념(情念)의 계율을 신앙처럼 받들었다. 펜 끝이 얼어붙어 단 한 자도 나아가지 못하던 고통이, 문장의 수액으로 흘러내릴 때, 나는 비로소 어떤 ‘희열’에 젖어 들었고, ‘써야 할 이유’를 넘어 ‘살아야 할 이유’를 기어이 마주할 수 있었다. 책 속에는 고향의 이야기, 가족 이야기, 선배와 친구와의 이별 이야기, 불량기 가득하고 궁색했던 나의 소년 시대, 기자로 분주했던 청년 시절을 지나오며 겪었던 기억들이, 저들끼리 조각보를 맞추며 들어섰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 회한, 자책들이 덩이가 져 내 기억 속을 방랑하다가 드디어 자판 속의 활자로 부활했다. 글 마을의 ‘무당’으로 살기를 원하면서 쉼 없이 추구했던 것은 이 세계의 글쟁이들과의 ‘접신’이었다. 나는 이들의 영혼에 들리게 된다면 강신무를 추며 한 판의 너끈한 굿을 벌여볼 생각이었다. 정작 판을 벌인 굿 마당 작두 위에서 나의 춤은 아슬아슬했으나 나에게 내린 신을 온몸으로 맞아들였다. 일상의 번뇌가 빙의라는 지독한 산고(産苦)를 통해 문장으로 육화(肉化)되는 그 ‘실성(失性)’에 닿고서야, 나는 산문을 나서는 행자의 미소가 곧 나의 구원이었음을 깨달았다. 별로 대단한 것도, 이 책을 읽는 그대의 가슴으로 울림을 줄 단서 하나 없는데, 이렇게 부끄럽게 다시 한 권의 책을 내어놓게 됐다. 자랑과 덜된 과시욕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그래도 책을 내놓고 싶다는 비루한 욕심을 떨쳐내지 못해 구태여 ‘두 번째 책’이라고 부른다. 풋내기 독서가의 종잡을 수 없는 푸념, 서툰 글바치의 넋두리가 없지 않지만, 모두 내 아득바득한 생활과 그 속에서나마 꿍쳐놨던 사색의 조각보를 한 땀 한 땀 이어붙였으니, 그대의 너그러움으로 부디 읽힐 수 있기를 기원한다. 아귀 뒤틀리고 금이 나고 깨어지고 부서진 문장 속에서나마 이 글을 쓴 마음을 이해해 준다면, 더없는 기쁨이겠다. 밤새며 원고를 고치고, 마침내 글의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 길을 내준, 나의 글벗의 손을 빌려 책의 모양을 마침내 만들 수 있었다. 발간에 이르러 돌아보니, 만사에 앞서 “기쁘다”는 한마디가 나를 덮친다. 막 흘러 가버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안도도 이내 사라지고 숨을 돌린 기억은 나를 오던 길로 다시 돌려세운다. 낙일의 그림자가 드리운 낡은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바다와 섬, 그리고 노을이 덮는 서쪽 하늘을 본다. 작은 자릿배 몇 척이 잔물결에 흔들거리며 파도 소리를 삼키는 내 고향 보목마을 포구다. 노(櫓)를 저어 건너온 바다의 풍경에 나는 넋을 놓았다. 섬 뒤편에서 떼진 노을이 내 안으로 들어와 빛과 어둠을 실감 나게 가르려고 한다. 미련함과 아둔함으로 점철된 내 삶의 점묘(點描) 위로 시선이 멈춘다. 진실과 거짓, 기쁨과 슬픔이 혼재된 이 세상에 내가 있으며, 내 남은 시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노을이 타는 여기서 단어와 단어, 문장과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 하이픈을 긋는다. 어제와 오늘을 잇고, 이 책 속에서 자유를 얻은 단어들을 나의 품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이것은 지나간 고통을 달래며 다시금 글의 신과 마주하기를 소망하는, 나의 간절한 신무(神舞)다. 책을 기꺼이 출판해 주신 황금알출판사 김영탁 선생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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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지 않는 바다, 저물지 않는 문장 김영탁(시인·『문학청춘』 주필) 강정만의 산문집 『저물지 않는 제주바다의 문장들』을 읽는 일은 제주바다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일과 닮아 있다. 처음에는 바다의 빛깔이 보인다. 다음에는 파도의 결이 보인다.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물결 위로 지나간 시간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마침내 독자는 깨닫는다. 이 책에서 바다는 풍경이 아니라 문장이고, 문장은 삶을 건져 올리는 그물이며, 저자의 생애는 그 그물에 걸려드는 빛과 그늘의 집약체라는 사실을.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내 삶의 ‘바다’에서 ‘문장’을 찾아 헤맸다”고 적는다. 이 한 문장은 이 산문집 전체를 여는 열쇠다. 그는 바다를 보았고, 바다를 걸었고, 바다를 기억했다. 그러나 이 책이 단순히 제주 풍경을 예찬하는 산문집에 머물지 않는 까닭은, 그가 바다를 외부의 자연으로만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강정만에게 바다는 자기 생의 내부에 출렁이는 근원적 장소다. 그 바다에는 유년의 가난이 있고, 여름날 검은여의 물빛이 있고, 보리밥과 물외의 맛이 있고, 친구들의 목소리가 있고, 문우들의 웃음과 죽음이 있고, 문학에 대한 집요한 열망과 회한이 있다. 그는 제주바다를 쓰는 것이 아니라, 제주바다를 통해 자신을 읽는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제주바다에서 길어 올린 삶과 기억의 산책’이며, 자연의 산문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산문이다. 이 책의 첫 번째 미덕은 장소의 구체성이다. 성산포, 오정개 해안, 구두미, 검은여, 범섬, 섶섬, 법환리, 보목동, 서귀포, 칠십리공원 같은 지명들은 이 산문집에서 단순한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저자의 생애가 통과해온 정서의 좌표다. 지명은 곧 기억의 번지이고, 바다는 곧 존재의 원적지다. 「2023년 7월, 바다와 섬과 카페」에서 저자는 바다와 섬을 앞에 두고 삶의 변주곡을 듣는다. 파도는 강약을 반복하고, 섬은 바다를 향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하다. 이 대목에서 풍경은 곧장 음악이 되고, 음악은 다시 삶의 은유가 된다. 그는 바다를 보고 “멋있다”는 진부한 탄사에 머물지 않는다. 바다와 섬이 품은 위로, 고독, 연민, 별리의 감각을 하나씩 꺼내어 자기 언어로 데운다. 그래서 이 책의 바다는 그림엽서의 바다가 아니라, 오래 앓은 사람이 문득 기대는 어깨 같은 바다다. 특히 「소년의 노스탤지어」는 이 산문집의 정서적 원천을 보여주는 중요한 글이다. 휴대폰도,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제주 소년들에게 여름은 곧 바다였다. 강을 모르고 개천을 몰랐던 제주 소년들에게 바다는 여름 그 자체였고, 유년의 우주였다. 보리밥을 양푼에 담고, 오이를 된장에 찍어 먹고, 용천수에 몸을 담그고, 검은여에서 물장난을 하던 기억은 가난의 기록이면서도 풍요의 기록이다.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지만 감각은 넘쳤고 삶은 거칠었지만 기억은 눈부셨다. 저자는 그 시절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깃든 순정한 생의 에너지를 포착한다. 개발로 용천수가 사라지고 풍경이 변해버린 오늘, 검은여는 더 이상 예전의 검은여가 아니다. 그러나 사라진 장소는 기억 속에서 더 짙은 실재가 된다. 개발은 물길을 막았지만, 문장은 그 물길을 다시 흐르게 한다. 이것이 강정만 산문의 힘이다. 이 산문집에서 고향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고향은 그립지만 마냥 아름답지는 않다. 고향은 따뜻하지만 때로는 무정하다. 「고향 무정」에서 저자는 옹기종기 살던 마을의 풍문, 장례, 연애담, 청년들의 봉사, 가난했던 시절의 거친 호칭과 우정을 떠올린다. 고향은 누구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만큼 가까웠던 공동체였지만, 동시에 소문이 빠르게 번지고 개인의 삶이 쉽게 구경거리가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저자는 그 세계를 감상적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웃음과 쓸쓸함, 정겨움과 불편함을 함께 놓는다. 그래서 이 책의 고향은 박제된 낙원이 아니다. 그것은 냄새가 있고, 욕설이 있고, 술이 있고, 장례가 있고, 실패한 연애가 있고, 가난한 소년들의 객기가 있는 살아 있는 장소다. 강정만 산문의 또 다른 중심축은 시간이다. 이 책의 2부 제목은 「나이와 시간, 존재의 사유」다. 여기서 저자는 칠십이라는 나이, 세밑의 허전함, 불면, 유혹, 죽음, 책, 밥 같은 주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 주제들은 추상적 관념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는 철학적 사유를 생활의 냄새 속으로 끌어내린다. 늙음은 관념이 아니라 몸의 변화이며, 죽음은 사전 속 단어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부고와 밤의 불면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다. 책은 고상한 정신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자존과 허영의 굴레이고, 밥은 생의 가장 낮고도 끈질긴 위안이다. 저자의 나이 듦에 대한 태도는 특별히 흥미롭다. 그는 노년을 성스럽게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를 향해 “근천스럽다”고 말하고, “폼잡으랴” 살아온 시간을 자조하며, 때로는 늙어가는 몸과 마음을 짓궂게 바라본다. 이 자기풍자의 감각이 산문을 살아 있게 한다. 강정만의 문장은 나이 듦을 말하면서도 늙지 않는다. 늙음의 쓸쓸함을 인정하지만, 거기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노년의 복도 끝에서 서성이는 사람처럼 말하지만, 그 손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등잔이 들려 있다. 그 등잔이 바로 문장이다. 이 책의 문장은 종종 회고적이지만, 회고에만 갇히지 않는다. 저자는 과거를 소환하되 그것을 오늘의 사유로 다시 읽는다. 예컨대 검은여의 여름을 떠올릴 때, 그는 단순히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라진 용천수와 난개발의 흔적을 함께 본다. 구두미 바다의 달빛을 보면서는 한기팔 시인의 시 세계를 떠올리고, 성산포 오정개 해안에서는 이생진 시인의 「넋」을 듣는다. 바다를 보는 일은 문학을 읽는 일이 되고, 문학을 읽는 일은 다시 자신의 삶을 되묻는 일이 된다. 이처럼 강정만의 산문은 풍경, 기억, 문학, 인생이 서로를 비추는 다면체의 구조를 지닌다. 3부 「시와 문학, 읽고 쓰는 운명」은 이 산문집의 비평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강정만은 대기자이면서, 산문가이면서 동시에 문학 독자이고, 문학 현장에 몸담은 사람이며, 문단의 안팎을 오래 지켜본 증인이다. 그는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책 읽기가 얼마나 불편하고도 필요한 일인지, 문학이 어떻게 허영과 자존 사이에서 흔들리는지를 솔직하게 말한다. 이 대목에서 그의 산문은 단순한 감상문을 넘어 문학적 자의식의 기록이 된다. 특히 AI 시대의 문학을 다룬 글은 오늘의 문학 환경 속에서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AI가 문장을 생산하는 시대가 왔음을 인정하면서도, 문학의 본령이 인간 고유의 체험과 상상력에 있음을 강조한다. AI가 기존의 것을 조합하고 모방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살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용서하며 겪은 고통의 결정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비판이 아니다. 오히려 문학이 왜 여전히 인간의 일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저자는 문학을 신성화하지도 않지만, 문학이 단지 문장 생산 기술로 환원되는 일에는 분명한 거리를 둔다. 그에게 문학은 삶의 상처를 통과한 언어이고, 기억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결정이다. 「문단은 언제부터 장터가 되었나」에서는 문학 현장의 세속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드러난다. 강정만은 문단을 낭만적 공동체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문학이 사람의 이름값, 자리, 이해관계, 허영과 뒤섞이는 현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을 안다고 해서 문학 자체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비판은 문학을 향한 기대와 애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랑이 식은 사람은 비판하지 않는다. 아직 문학을 믿는 사람, 적어도 문학이 사람의 내면을 건드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문단의 경박함을 견디지 못한다. 강정만의 문학론에는 이런 쓴맛 나는 애정이 배어 있다. 이 산문집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4부 「사람과 인연, 시대의 얼굴」이다. 여기에는 오승철, 문무병, 신구범, 김호, 나기철 등 제주 문학과 지역 사회의 여러 얼굴이 등장한다. 저자는 이들을 거창한 기념비로 세우지 않는다. 대신 술자리, 여행, 문학 행사, 사소한 대화, 떠나간 뒤의 허전함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되살린다. 특히 오승철 시인을 고별하는 글과 문무병 선생 영전에 바치는 글은 한 시대의 문인을 떠나보내는 마음의 기록이다. 이 대목에서 강정만의 산문은 사적 추모와 지역 문학사의 기록 사이에 선다.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곧 한 시대의 문학적 공기를 붙잡는 일이 된다. 문무병에 관한 글에서 저자는 그를 제주신화와 무속 연구에 헌신한 향토학의 중요한 인물로 기억한다. 몸은 불편했지만 언어는 또렷했고, 문학과 제주신화에 대한 열정은 후배들에게 방향을 가리키는 아우라처럼 남았다고 적는다. 이 기록은 제주문학과 제주정신의 한 계보를 보존하려는 산문적 행위다. 지역문학은 작품 목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함께 걸었던 길, 함께 마셨던 술, 함께 나눈 말, 병든 몸으로도 놓지 않았던 열정의 기억으로 이루어진다. 강정만의 산문은 바로 그런 비공식의 문학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을 관류하는 정조는 ‘연민과 따뜻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민은 무른 감상과 다르다. 저자는 사람을 쉽게 미화하지 않는다. 자신도, 친구도, 문인들도, 문단도, 고향도 모두 결점과 허술함을 가진 존재로 바라본다. 그럼에도 그는 그 허술함을 버리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불완전한 것들 곁에 오래 머문다. 늙은 친구들, 떠난 시인들, 사라진 용천수, 개발로 변해버린 바닷가, 책 읽기의 불편함, 글쓰기의 난감함, 술자리의 허무, 노년의 불면. 이 모든 것은 아름답기만 한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강정만은 그것들을 오래오래 따뜻한 성찰로 보듬으므로써, 문장의 품 안에 들인다. 그때 연민은 삶을 견디는 태도로 융숭 깊은 삶과 문장이 하나로 응집한다. 강정만의 산문에는 익살과 비애가 함께 있다. 그는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불쑥 자기를 낮추고, 장중한 문장을 펼치다가도 농담의 고개를 넘는다. 이 리듬은 제주바다의 물결처럼 느슨하면서도 끈질기다. 어떤 문장은 문인 특유의 서정으로 흐르고, 어떤 문장은 기자로서 관찰의 정확성을 보이며, 어떤 문장은 문학청년의 울분처럼 튄다. 이 잡종성은 단점이 아니라, 이 책의 개성이다. 산문이란 본래 한 사람의 호흡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르다. 강정만의 호흡은 정제된 단정함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때로 장광설을 늘어놓고, 때로 비약하고, 때로 투덜거리고, 때로 감탄한다. 그런데 바로 그 흔들림으로 그의 산문은 살아서 움직이고 사람의 말처럼 들린다. 『저물지 않는 제주바다의 문장들』의 바다는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같은 의미로 반복되지 않는다. 어떤 글에서 바다는 유년의 놀이터다. 어떤 글에서 바다는 시인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다. 어떤 글에서 바다는 노년의 회한을 비추는 거울이다. 또 어떤 글에서 바다는 떠난 사람들의 넋이 파도로 돌아오는 자리다. 바다는 하나의 상징으로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주된다. 이것이 책의 제목이 지닌 힘이다. ‘저물지 않는 제주바다’란 실제로 해가 지지 않는 바다가 아니라, 저물어가는 생의 시간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바다, 문학의 바다, 고향의 바다를 뜻한다. 저녁은 오지만 바다는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는다. 문장은 그 어둠 속에서 물빛을 붙잡는다. 책의 후반부에 이르면 산문집은 개인적 회고를 넘어 문학 공동체의 기록으로 확장된다. 「시로 봄을 여는 서귀포」 「강문신 문학관 개관」, 오사카 여행기, 서귀포문협 문학관 탐방기, 낭만파 모임과 송년회 기록 등은 문학이 책상 위의 고독한 작업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만나고 걷고 먹고 떠들고 헤어지는 생활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문학은 작품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안부와 농담, 술잔과 밥상, 여행길과 행사장, 송년회의 어수선함 속에도 있다. 강정만은 그 현장을 빠짐없이 챙기는 기록자다. 그는 제주문학의 성대한 대문보다 그 뒤편의 작은 마당을 더 오래 바라본다. 거기서 문학은 제도나 명예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척으로 남는다.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감동은 결국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충실한 응시’에서 나온다. 저자는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으려 한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박물관의 유물처럼 보존하려 하지 않고, 그는 오히려 사라짐 자체를 인정한다. 다만 사라지는 것들이 아무 말 없이 없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한 번 더 불러보고, 한 번 더 바라보고, 한 번 더 문장으로 적어둔다. 산문은 그렇게 소멸에 맞서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 된다. 강정만의 산문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읽는 사람’으로서의 태도다. 그는 풍경만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시를 읽고, 사람을 읽고, 술자리를 읽고, 시대를 읽는다. 이 책에는 한기팔, 오승철, 이생진, 강문신, 김원욱, 정영자, 나기철 등 여러 문인의 이름과 작품이 등장한다. 저자는 그들의 문장을 자기 삶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놓는다. 인용은 장식이 아니라 대화다. 선배 시인들의 문장은 제주바다와 만나고, 그 바다는 다시 저자의 사유를 흔든다. 이 점에서 이 산문집은 제주문학에 대한 하나의 독서록이기도 하다. 강정만은 책을 읽으며 제주를 다시 보고, 제주를 보며 책을 다시 읽는다. 이러한 독서의 방식은 산문집 전체에 두터운 문화적 층위를 만든다. 제주바다는 단지 자연의 장소가 아니라, 문학적 기억이 축적된 장소가 된다. 성산포는 이생진의 시와 함께 울리고, 구두미는 한기팔의 시적 세계와 겹치며, 서귀포의 봄은 오승철과 강문신의 문장 속에서 다시 열린다. 저자는 자신의 기억만을 앞세우지 않고, 다른 문인들의 시선과 자신의 시선을 겹쳐 제주를 읽는다. 그 겹침 속에서 제주라는 장소는 개인의 고향을 넘어 한국문학의 한 서정적 지형으로 확장된다. 문장론의 측면에서도 이 책은 흥미롭다. 강정만의 문장은 때로 길고 굽이친다. 짧게 끊어 명료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사유가 흘러가는 곡선을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다. 이 때문에 그의 산문은 빠른 정보 전달의 글과는 다르다. 독자는 그의 문장을 서둘러 소비하기보다, 파도 소리를 듣듯 따라가야 한다. 문장 속에는 한자어와 구어, 문학적 수사와 일상적 표현, 자기비하와 고전적 비유가 뒤섞인다. 어떤 문장은 조금 능청스럽고, 어떤 문장은 비장하며, 어떤 문장은 느닷없이 해학적이다. 그 혼합의 리듬이 바로 강정만 산문의 얼굴이다. 말하자면 그는 단정한 정원보다 바람 부는 해안길에 가까운 문장을 쓴다. 그 길에는 돌도 있고, 풀도 있고, 바닷물에 젖은 자국도 있다. 이 책을 독자에게 권한다면, 무엇보다 ‘제주’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먼저 권하고 싶다. 그러나 이 책은 제주 여행 안내서가 아니다. 관광지의 아름다움을 안내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의 제주는 살아온 사람의 제주다. 관광객의 카메라가 놓치기 쉬운 시간의 주름, 개발 이전의 바닷가, 가난했던 마을의 소문, 문우들의 술자리, 시인들의 흔적, 늙어가는 이의 내면이 깃든 제주다. 그래서 이 책은 제주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에게 오히려 더 새롭게 다가갈 수 있다. 풍경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낸 만큼 깊어진다는 사실을 이 산문집은 조용히 증명한다. 또한 이 책은 노년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독자에게 깊은 위로를 준다. 저자는 늙음을 패배로만 쓰지 않는다. 물론 늙음에는 불면과 회한, 죽음의 그림자와 몸의 불편함이 있다. 그러나 늙음은 동시에 세계를 더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젊은 날에는 그저 지나쳤던 수국이 어느 날 꽃으로 보이고, 무심했던 바다가 어느 날 삶의 문장으로 읽히며, 함께 술 마시던 친구의 말 한마디가 뒤늦게 문학적 의미를 얻는다. 노년은 감각의 쇠퇴만이 아니라 의미의 재배치다. 강정만의 산문은 바로 그 재배치의 과정을 보여준다.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에게도 이 책은 각별하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거창한 질문에 이 책은 거창하게 답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준다. 문학은 사라진 용천수를 기억하게 하고, 죽은 친구를 다시 불러오게 하고, 고향의 바다를 다시 걷게 하고, 늙어가는 자신을 조금은 우스워하며 견디게 한다. 문학은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구호이기 전에, 한 사람이 자기 생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읽게 만드는 힘이다. 강정만에게 문학은 그런 것이다. 허영과 자존의 굴레 속에서도, 장터처럼 변한 문단의 소란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을 붙잡아 세우는 무엇. 그것이 이 책 곳곳에서 파도처럼 들려온다. 그리하여 이 산문집의 미덕은 완전무결함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이 책은 한 사람이 자기 생의 어수선함을 숨기지 않고 내놓는 데서 동력을 발휘한다. 저자는 자기 문장을 “날라리 문장”이라 낮추고, 삶을 “위험천만한 벼랑”에 비유하며, 남은 시간을 “끝이 보일 듯 말 듯 남아있는 복도”로 느낀다. 그러나 그 낮춤과 불안 속에서도 그는 계속 쓴다. 왜 쓰는가. 기억이 부서지기 전에, 사람들의 이름이 흐려지기 전에, 바다의 빛이 사라지기 전에, 자기 안의 물결이 완전히 잦아들기 전에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 절박함이 문장을 밀고 간다. 『저물지 않는 제주바다의 문장들』은 결국 한 사람의 ‘만년의 항해일지’다. 항해에는 출항의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암초가 있고, 안개가 있고, 길을 잃는 시간이 있고, 상어에게 살점을 뜯긴 청새치처럼 뼈만 남은 성취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항해했고, 자기만의 고기잡이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문장을 얻었다. 그 문장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어떤 문장은 물비늘처럼 반짝이고, 어떤 문장은 늦가을 서리처럼 차갑고, 어떤 문장은 술기운처럼 헐렁하며, 어떤 문장은 부고를 읽는 사람의 손끝처럼 떨린다. 그 모두가 강정만이라는 문인의 바다다. 이 산문집은 독자에게 말한다. 삶은 지나가지만, 지나간 삶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고향은 변하지만, 고향을 부르는 마음까지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고. 사람은 떠나지만, 이름을 불러주는 문장이 있는 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문학은 힘이 약해 보이지만, 한 사람의 기억을 끝까지 지키는 데에는 아직 충분히 강하다고. 강정만의 문장들은 그렇게 제주바다 위에 오래 떠 있다. 저물 듯 저물지 않고, 사라질 듯 다시 밀려오며, 읽는 이의 마음에 조용한 물길 하나를 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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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바다는 오래도록 많은 이야기를 품어 왔다. 바람이 지나가고 파도가 부서져 사라져도, 그 흔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다시 이야기로 살아난다. 강정만 기자의 글 또한 그러한 바다의 기억과 닮아 있다. 그의 글에는 제주의 풍경과 시간,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담담한 시선으로 깃들어 있다.
강정만 기자는 서귀포 보목마을에서 태어나 스물네 살에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제주 언론의 현장을 지켜왔다. 이 책은 그가 오랜 시간 신문 지면과 여러 매체에 발표해 온 글 가운데 60편을 가려 엮은 에세이집이다. 제주 바다와 고향의 풍경에서 길어 올린 사유, 세월과 나이 들어감에 대한 생각,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따뜻하게 흐른다. 오래된 친구가 조용히 다가와 귓가에 이야기를 들려주듯, 그의 글은 제주 사회의 기억을 이어가며 잔잔하고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 고충석 (前 제주대학교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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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강정만 선생의 책 『만각과 자탄』을 스스로 구입해서 읽고 나서 나는 그분의 필력에 감탄한 바 있다. 이 책은 언론인으로 살아온 시간에 켜켜이 쌓인 여러 모습들을 진솔하고 유려한 필치로 이어가, 아, 여기에도 이런 분이 있었구나 했다. 그 후 선생을 만났는데 그분은 나를 자주 놀라게 한다. 오랫동안 아침 마라톤을 한다든가. 하루에 뭐든 20매를 쓴다든가. 또 근래 들어 세계문학 벽돌책을 읽는다든가, 또 그가 하는 인터넷신문 ‘제주헤럴드’에 줄기차게 쓰는 글이라든가. 그 글들이 나올 때마다 나는 또 감탄할 수밖에. 선생은 소년 시절부터 늘 가슴 한쪽에 문학을 품고 있었던 듯한데, 그래 이번 책에서도 그에 대한 사랑을 여실히 나타내 준다. 선생의 글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촉촉이 스며들기를! - 나기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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