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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인간에 대하여
1. 만약 신체 없이도 사유할 수 있다면 2. 모더니티 다시 쓰기 3. 물질과 시간 4. 로고스와 테크네, 또는 텔레그래피 5. 오늘, 시간 6. 순간, 뉴먼 7. 숭고와 아방가르드 8. ‘소통 없는 소통……’ 같은 것 9. 재현, 현시, 현시할 수 없는 10. 말, 순간 11. 숭고 이후, 미학의 상태 12. 보존과 색채 13. 신과 꼭두각시 인형 14. 순명(順命) 15. 스케이프랜드(Scapeland) 16. 도무스와 메갈로폴리스 옮긴이 해제 |
JeanFrancois Lyot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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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연들 중 다수는 시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 이유는 시간의 문제가 우리가 논하는 구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진보는 시간 절약을 전제로 한다. 빨리 간다는 것은 빨리 잊는 것이고, 마치 ‘속독’처럼 나중에 유용한 정보만 남기는 것이다. 반면,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을 향해 뒷걸음질 치는 쓰기와 읽기는 느리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헤매다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아남네시스(anamnèse)는 가속과 생략의 대척점이다.
--- p.9 어린 시절에 진 이 빚은 우리가 결코 갚을 수 없다. 그러나 저항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부당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잊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글쓰기, 사유, 문학, 예술의 임무는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 모험을 하는 것이다. --- p.16 만약 사유를 데이터의 선별과 분류 형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그것은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데이터는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질 수 있는 것[잠재적 데이터]이며, 선별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는 진실을 말이다. --- p.37 사유하기의 고통은 하나의 증상, 즉 다른 곳에서 시작되어 원래 자리 대신 정신에서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다. 고통은 사유 그 자체로, 그때 사유는 우유부단하기로 결단 하고,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바라지 않기를 바라고, 의미여야 하는 것 대신 그냥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자 한다. 이것은 아직 명명된 적 없는 의무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 다. 아마도 그 의무는 부채감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단어, 문장, 색이 찾아오는 방법일 것이다. 따라서 사유하기의 고통은 시간의 고통, 사건의 고통이다 --- p.40 사유하기는 사유와 의문, 그리고 그 과정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하기 위해서는 그 이유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 사유할 때, 우리는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아직 규정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 p.135 그리고 의지는 시간의 기술인 자본의 형이상학에 동화된다. 혁신은 ‘작동한다’. ‘일어나고 있는가?’의 의문 부호는 멈춘다. 일어남과 함께 의지는 무너진다. 아방가르드의 임무는 시간에 대한 정신의 추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숭고의 감정은 이런 비우기의 이름이다 --- p.188 내가 보기에 이 질문은 다음 세기의 삶과 사유의 쟁점이 될 만한 유일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잊게 만드는 것은 하나의 위협이며,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위협은 그리는 행위와 회화의 본질 사이의 긴장, 즉 서양 회화에서 가장 뛰어난 세기들 중 하나에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해준 긴장을 없애버리겠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224 사유는 게토 안에 있지 않다. 사유를 아낌없이 쏟아부은 모든 작업은 사유의 게토의 벽에 몰래 침투해 사유를 무화하는 데 기여한다. 사유는 벽돌 위에 그 흔적을 남길 수 있을 뿐이다. --- p.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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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 철학자 육후이Yuk Hui는 2019년 ‘『포스트모던의 조건』 40주년’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우리 이후의 리오타르Lyotard, after us」라는 글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처한 기술적 조건을 고려할 때 리오타르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제목에서 보듯이 그는 리오타르가 우리보다 더 뒷세대인 듯이 앞선 사유를 하고 있다고 보았다.*
『비인간』(1988)은 ‘규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사유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인간적, 정신적, 지구적인 현상에 머무르면서 규정하지 못해서 유보하거나 성급하게 덮어버린 것들의 흔적, 제대로 사유하지 않고 방치한 것들을 다시 사유하자는 제안이다. 그런데 이 책의 부제는 왜 ‘시간에 관한 강연’일까? 리오타르에 따르면 시간의 문제는 비규정적인 것들을 사유하는 데 결정적이다 …… 인간의 한계를 확인하고 인간의 총체성이 무너지는 고통이 현실화하는 지금, 『비인간』은 시간에 대한 몇 가지 반시대적 사유와 감각을 요구한다.* 1998년 프랑스 갈릴레(Galilée) 출판사에서 처음 발간된 『비인간』은 리오타르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발표했거나 미처 발표하지 못한 글을 모은 책이다. 주로 예술가나 철학자, 해당 분야 지망생 혹은 일반 청중을 위한 강연을 계기로 쓴 글들이라 감각적 예시와 독특한 형식, 사유를 이끌어내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가득하다. 태양이 폭발해서 신체가 없어져도 사유는 남을 수 있을까? 인공지능도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질 수 있을까? 소통을 강조하는 신기술과 아방가르드는 양립할 수 있을까? - 리오타르는 국내에 『포스트모던의 조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비인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너무 많은 오해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이 책에서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근대적 시간과 물질 개념,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인간 중심적이고 지구적인 사유에서 벗어난 ‘비인간적’ 사유를 마음껏 펼쳐놓는다. 리오타르에게 ‘비인간’은 한편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삶이 기계화되고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하는 것을 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지만 간과하고 있던, 그래서 인간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던 미지의 속성을 의미한다. 전자를 통해 동시대에 과학-기술이 고도화되고 동시에 수행성이 삶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어버린 현실을 진단하면서, 후자를 통해 수행성이라는 개념적 계산에 포획되지 않는 영역을 탐사함으로써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오늘날 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텔레그래픽 문화는 해당 문화가 형성된 맥락을 제거하는 길내기를 불러내며, 기술-과학은 그것을 개발한 인간의 의도나 목적을 폐제한 채, 인간을 수혜자라기보다 운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따라서 리오타르는 신기술이 강요하는 길내기와 훑어보기의 종합에 대한 저항으로서 관통하기를 제안한다.* 리오타르는 ‘목적론적 상기’, 즉 어떤 목적 하에 개별 기억을 불러내는 기억해내기와 구분해서, 어떠한 목적이나 개념도 미리 존재하지 않는 기억 작업을 아남네시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남네시스에서 연상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술이다.* - 21세기에 와서 인간중심주의의 탈피를 내세우며 등장한 사변적 실재론의 영향 아래, 동시대 미술은 이제 비인간 대상, 즉 사물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질료와 물질 내지 사물, 그리고 ‘일어남’이라는 사건에 주목하는 그의 예술론은 다시 한번 동시대적이다.* 리오타르의 미학과 예술론은 주로 ‘숭고’의 개념을 중심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숭고뿐만 아니라 일어남(occurence), 음색(timbre) 등 인간의 인지를 넘어서는 ‘비인간적’ 개념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리오타르가 칸트의 인간학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숭고’의 개념을 길어올렸다면, 여기서는 그 숭고 개념이 회화, 사진, 연극, 음악, 건축, 도시, 풍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적 사례들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번역은 경제학·미술사를 전공하고 ‘가속주의’를 통해 리오타르 사상을 재조명한 이승현과 프랑스 현대 미학·미술관학을 전공하고 리오타르의 『비물질』 전시를 연구한 안소현이 맡았다. 리오타르의 실험적인 글쓰기는 번역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두 번역자가 서로를 이해시키며 수년동안 다듬어낸 결과물은 분명 독자들이 리오타르 미학과 예술론의 정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책의 독자들을 위해 『포스트모던의 조건』 전후의 리오타르에 대한 설명과 각 장의 해설을 담은 해제와 『비인간』을 절멸, 아남네시스, (비)물질, 일어남, 숭고 이후, 증언이라는 6개의 시간으로 재구성한 또 다른 해제는 독자들이 텍스트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은 옮긴이의 해제에서 발췌한 글이다.) |